틀이 깨지다
틀이 깨지다 /이미경
시조부님의 부고를 받았다. 그것은 소멸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소멸은 형태가 사라지는 것이다. 틀이 깨지는 것이다.
세상의 모든 것에는 틀이 있다고 믿는다. 눈에 보이든 그렇지 아니하든 받치거나 버티거나 팽팽히 켕기게 하기 위한 테두리가 있기 때문에 제 형태를 유지하고 있는 것이다.
상가 분위기는 무겁지 않았다. 아흔을 훨씬 넘기고 잠결에 편히 가신 탓이다. 어머님과 작은어머님은 문상객이 오면 구슬픈 곡소리를 내었다. 그러다가도 손님이 뜸할 때면 언제 그랬냐는 듯 일상의 이야기를 조용히 나누었다.
친척들이 한차례 다녀가고 손님들의 발길이 뜸해졌다, 어머님은 다시 이야기를 시작하셨다.
시조부님의 마지막을 이야기하시는 것 같았다.
“어제 늦게까지 텔레비전을 보시고는 잠자리에 드셨어, 기침할 시간이 훨씬 지났는데도 기척이 없기에 가 보았더니 그만...”
어머님의 말씀이 끝나기도 전에 아흔이신 시고모할머니께서 들어오셨다. 토끼털 같은 머리에 등은 굽었지만 정정하셨다. 시할아버지도 돌아가시기 며칠 전까지만 해도 시내버스를 타고 읍내 장에 가서 수박을 사 오셨다. 시골의 맑은 공기와 무공해로 기른 채소를 먹어서 인지 시할아버지 형제자매들은 장수 하시는 분이 많았다.
시고모할머니는 할아버지 영정 앞에 털썩 주저앉았다.
“아이고 오라버니”
그때 뭔가가 고모할머니 입에서 떨어졌다. 틀니였다. 바닥에 떨어진 틀니의 분홍색과 고모할머니의 옴팍해진 입을 바라보며 민망해 하고 있는데 “큭큭”하는 소리가 들렸다. 시어머니와 작은어머니의 웃음을 참는 소리였다. 작은 아버지의 부축을 받으며 고모할머니가 나가신 뒤에도 웃음소리는 이어졌다.
얼마 후 손님 들어가신다는 말이 들렸다. 앉아 계시던 어머님이 일어나시며 동서들을 재촉했다.
“손님 왔다네, 일어나세” 그런데 엉덩이에서 ‘뽕’ 소리가 들렸다. 괄약근 힘 조절을 잘못해서 어머님에게서 난 소리였다. 작은어머니의 웃음보가 다시 터졌다. 웃음은 전염성이 강했다. 이번에는 나도 웃음을 참느라 진땀을 흘렸다. 우는 것도 웃는 것도 아닌 묘한 표정으로 문상객을 보낸 뒤에도 여기서 큭 저기서 큭큭 소리가 났다. 나도 큭 하다가 작은아버지와 눈이 딱 마주쳤다. 작은아버지께서는 집안 어른이 돌아가셨는데 웃는다며 꾸짖으셨다. 작은 어머니는 형님의 방귀소리 때문에 모두 웃었는데 왜 질부에게 그러느냐며 무안해했다. 작은아버지는 며느리들이 기가 빠졌다는 한마디를 하시고 돌아가셨다. 우리는 작은 아버지가 돌아가신 다음에도 한동안 ‘큭큭’거렸다.
시어머니는 속이 편치 않으셨는지 일어설 때마다 뽕뽕거리셨다. 작은 어머니와 나는 서로 안은 채 소리 나지 않게 웃느라 어깨를 들썩거렸다. 사연을 모르는 사람은 우리가 엄청 슬퍼서 그러는 줄 알았으리라.
결국 나는 화장실을 핑계로 빈소를 나왔다. 작은 어머니와 눈만 마주치면 웃음이 나왔기 때문이었다. 뒤따라 나온 어머님은 여기저기 전화를 거시고 계산기를 두드렸다. 그리고는 문상 온 사람들과 담소를 나누었다. 아이들은 오랜만에 본 사촌들이 반가운지 여기저기를 뛰어다니며 장난을 치다가 어른들의 주의를 받았다. 술만 취하면 주사를 부리는 먼 친척 아저씨는 누군가의 손에 이끌려 나갔다.
집안의 어른이 돌아가셨지만 사람들의 풍경은 다른 날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웃을 일이 있으면 웃고 제 슬픔에 겨운 사람은 문상을 핑계 삼아 실컷 울고 갔다.
시할아버지는 이 집을 지탱하던 큰 틀이었다. 큰 어른인 시할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것은 틀이 흐물흐물 해진 것이다.
시할아버지는 전통을 중요시 여기셨던 보수적인 분이셨다. 평소에는 인자했지만 전통에 어긋난 행동을 하면 날벼락을 치셨다. 그런 시할아버지 장례식에서 작은 어머님과 눈이 마주치면 손님들의 눈을 피해 몰래 웃었다. 집안의 어른이 돌아가신 탓인지 세월 탓인지 보이지 않는 틀이 깨지는 소리가 들렸다.
오늘의 수필 4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