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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렇게 읽었다-김민숙의 어릿광대 본문
흔들리며 피는 꽃
영국의 대문호 셰익스피어는 자주 인생을 연극에 비유했다. 그는 자신의 희곡 대사를 통해 온 세상은 무대이고 모든 사람은 배우라 했다. 즉 태어남이 무대의 등장이고 죽음이 무대의 퇴장이란 말이 아니겠는가. 그렇다면 실존하는 모든 사람은 자기의 배역이 있을 것이다.
김민숙의 수필집 제목이면서 수필제목이기도 한 어릿광대는 종부이다. 극 중 인물은 아니지만, 말이나 행동으로 판을 어울리게 하는 어릿광대를 종부에 비유한 것이다.
작가는 종부를 겸손하게 어릿광대로 표현했지만 실존하는 종부의 배역이 크다는 것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다.
종갓집은 제 터전에서 흩어져 살던 일가친척들이 모여 맘 편히 화투놀이를 할 수 있는 곳이다. 그리고 그곳에서의 화투놀이는 사람들을 하나로 묶어주는 동아줄로 표현했다. 일가친척들을 하나로 묶을 수 있는 유일한 집의 종부야말로 큰 배역이며 자부심이 또한 있을 것이다. 보이지 않는 곳의 수고로움을 따뜻한 눈으로 들여다볼 줄 아는 작가는 역설적으로 종부를 어릿광대에 비유했다.
어릿광대(작가)의 첫 대사는 ‘새해를 맞는 일이 그리 쉬운 일이냐고, 내가 묻고 내가 대답한다.’이다. 수필의 첫 문장을 굳이 대사로 표현하는 이유는 이 작품이 꼭 한편의 모노드라마 같았기 때문이다. 어릿광대가 되기까지 겪는 작가의 심리적 변화에 반응하며 관객(나)은 어릿광대의 대사와 표정, 동작 하나하나에 몰입한다.
잠시 무대는 어릿광대의 등장과 함께 며칠 전으로 돌아간다. 각자의 일터에서 제 삶에 충실 하느라 한동안 보지 못한 자손들이 명절에 모이는 것이다. 그 자손들이 혹여라도 자고 갈까 봐 명절을 앞둔 며칠 전부터 이불을 빨고 대청소를 하고 음식을 지지고 볶다 보니 연극의 시간적 배경이 되는 초이튿날은 온몸이 해파리처럼 흐물거려 어릿광대는 손자의 앞이마보다는 뒤꼭지가 더 이쁘다는 세간의 우스갯소리를 떠올리며 쓸쓸히 웃는다.
그러면서도 마음을 숨기고 신바람 나는 듯 자식들의 시중을 드는 어릿광대의 모습을 보며 관객은 살아간다는 것에 대하여 한번 생각하게 된다.
철이 든다는 것, 어른이 된다는 것, 사회구성원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때때로 어릿광대의 역할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누군가가 어릿광대 역할에 충실할 때 사회가, 가정이 삐거덕거리는 소리를 내지 않고 놀아간다. 그런데 전통적인 한국가정에서 어릿광대의 역할은 늘 종부/맏이가 도맡아 하는 불편한 현실이 있다.
무대는 다시 어릿광대의 회상장면으로 이어진다.
시조부가 계시던 시절, 설날은 일가친척으로 북적거렸다. 한옥의 바깥 부엌에서 삼사십 명의 떡국을 시어머님과 함께 하루 종일 끓여 날랐다. 저녁나절 가래떡 두말이 동이 날 때쯤이면 시집간 시누이들이 하나둘 돌아오기 시작했다. (중략)
열 살 아래의 고만고만한 친손, 외손이 일곱이나 되는 그 전쟁통 같은 나날을 뒤치다꺼리하시던 시어머니는 어릿광대였다.
어릿광대가 되지 못한 나는 늘 문밖을 서성거렸다
조선 시대 유교가 들어오면서 시작된 종부의 역할은 막중했다. 종손의 적장자를 출산, 양육하여 가계(家系)를 이어야 하고 종가의 봉제사(奉祭祀) 준비를 모두 책임져야 했다. 그리고 종가를 방문하는 모든 손님을 정성껏 접대하여 종가의 지위·위세·품위를 유지해야 하였다. 그래도 그때는 지위와 신분이 있었다. 그러나 조선 후기 노비가 해방되면서 종부의 사회적 지위는 떨어지고 가사와 농사일까지 해야 했다. 관습의 영향으로 현대까지도 종부의 책임과 구실은 고스란히 남게 된다.
이 극의 대사에는 그런 것에 대한 불평, 불만의 대사는 한마디도 없다. 작가가 이 불편한 현실에 순종하고 있는 듯하다. 그뿐만 아니라 힘든 일을 혼자서 도맡아 하는 어릿광대인 시어머니를 바라보는 그녀의 시선은 연민이 아닌 부러움이다. 알다시피 ‘못’ 부정은 하고 싶지만, 능력이 없어 못 함을 나타낸다. ‘어릿광대가 되기 싫은’이 아니라 어머니처럼 ‘어릿광대가 되지 못한’으로 표현하고 있다. 그것이 체념이든, 숙명이든 작가는 시어머니가 종부로서 갖는 자부심을 자신도 가지고 싶다는 욕망이 무의식 속에 숨어 있다.
찬바람이라도 쐬면 가슴이 트이려나 싶어 옥상에 올라갔다. 혼자 가만히 들숨과 날숨을 쉬노라면 어린 날의 할머니가 환하게 웃는 모습으로 나를 감싸 안았다.
“찹다. 들어가자”
할머니의 손이 따듯했던 기억은 없다.
작가는 환상과 현실을 교묘하게 짜깁기하는 방법으로 경계에서 인간이 느끼는 혼란을 극적으로 표현했다. 욕망은 고뇌를 먹고 사는지 어머니처럼 되지 못해 흔들리고 흔들리던 그녀의 무의식은 종부로서 손에 물이 마를 날 없던 할머니의 넉넉함과 따뜻함을 기억해 낸다. 지금보다 더 힘든 시절이었음에도 완벽한 어릿광대였던 할머니를 떠올리며 현실과 욕망 사이의 서성거림을 멈추고 어릿광대로 탈바꿈한 것이다.
초사흘 아침 길을 나선다. 그때 쉬이 대문을 나사지 못한 원을 뒤늦게야 푼다.
몸과 마음을 가볍게 털어내고 싶은 마음에 갓바위에 가려고 집을 나섰지만 어디에도 시원한 곳은 없다. 신천대로의 상행로는 주차장 수준이다. 오도 가도 못하고 길에 갇혀있는 사람들을 보노라면 어느 삶에도 비단길은 없나 보다. (생략)
인간은 단단하고 견고하게 쌓아올린 세계가 있어도 늘 현실을 외면하기 위한 도피처를 찾는 불완전한 존재이다. 이제는 어엿한 어릿광대가 되었지만, 작가는 여전히 흔들린다. 아니 어쩌면 자신이 광대의 반열에 든 것을 눈치 채지 못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직위는 없고 의무감만 가득한 종부는 다시 길 위에서 서성인다. 꽉 막혀 오도 가도 못하는 길을 보며 작가는 모든 사람이 각자의 배역에서 힘들어 한다는 것을 느낀다.
흔들림은 중심을 잡기 위한 일이다. 충분히 흔들린 작가는 삶의 이곳저곳에서 힘들어하는 사람들은 따스한 시선으로 보듬는다.
농경시대의 대가족 문화에나 걸맞은 명절을 디지털 시대의 핵가족 사회에서 그대로 지키려다 보니 곳곳이 고달프다.
연극으로 치자면 관객과 배우의 심리적인 거리를 나타내는 소격효과에 해당되는 부분으로 보인다.
소격효과란 독일의 연극인 베르톨트 브레히트가 창안한 개념으로 관객으로 하여금 당연하고 고정불변한 것처럼 보이는 사회현상을 새로운 관점에서 바라보게 함으로써 깨달음에 이르도록 유도하는 극적장치를 말한다. 즉, 친숙하고 익숙한 대상에 대해 객관적 거리감을 갖고 비판적으로 바라볼 수 있도록 새로운 의미 관계를 규정하거나 대상을 새로운 원근법 속에 집어넣는 기법인 것이다. 이쯤에서 관객은 어릿광대의 대사와 표정, 동작 하나하나에 몰입하던 것을 멈추고 비로소 우리의 전통적인 문화를 객관적으로 다시 바라보게 되는 것이다.
우리 집은 사위와 딸, 그리고 막내까지 끼어 화투판을 벌인다. (중략)
기웃거려보아도 명분 없는 내가 끼어들 자리는 없다. 떡국을 끓여 나르며 덩달아 신을 내는 나도 이제 어쩔 수 없는 어릿광대다.
피하지 않고 자신을 대면하는 것이야말로 삶에서 가장 빛나는 순간이다. 자기의 자리를 외면하고 도망치는 순간 삶은 그 의미를 잃어버릴지도 모른다. 길 위에서 돌아온 작가는 진짜 광대가 되어있음을 느낀다.
흔들리며 피는 것이 어찌 꽃뿐이겠는가. 사람 또한 흔들리고 흔들리며 성숙하는 자연의 일부인 것을.
이미경; 수필세계 신인상 등단(2006), 영남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졸업, 수필세계 작가회, 대구 문인협회 수필사랑 회원, 대구수필가협회 총무 간사, 제1회 프런티어 문학상 수상, 제1회 대구일보 경북문화체험 전국수필대전 동상수상(2010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