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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2009 대구매일 신춘 당선작-주인석 본문
대구매일신문 신춘
왈바리
주인석
사는 일은 뚜렷한 공식도 방법도 없다. 스스로 부딪히고 깨지며 웃고 우는 가운데 버려지기도 하고 선택되기도 하여 쌓이는 것이다. 삶의 조각이 크다고 좋은 모양이 나오는 것도 아니고 작다고 쓸모없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작은 조각 하나가 인생을 무너지게 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얘는 기형이라요.”
쿵하는 소리로 기겁 하는 내게 금방 해산한 사람답지 않게 싱글싱글 웃으며 말한다. 끄응 힘을 주며 일어서는 남자 엉덩이 밑에 시커먼 것이 툭 떨어진다. 여자 몸의 진통 끝에 탄생은 보았어도 남자 밑으로 뭣이 쑥 빠지는 일은 생전 처음이다.
정말로 머리와 몸이 한 덩어리다. 여자들의 손에서 짭짤하고 매콤한 대우를 받아야 할 것이 제 구실을 못하니 남자 엉덩이를 붙잡고 있나 보다. 말 못하는 것일지라도 안타까운 마음이 든다.
건망증 심한 주인을 만나는 바람에 옹기 팔자 뒤웅박 팔자가 됐다. 뚜껑이 떨어지지 않아 벙어리 옹기가 된 것이다. 그래서 옹기 구실을 못하고 의자 신세로 살게 되었다. 옹기를 만드는 여러 과정 중에 절대 잊어버리면 안 되는 한 가지가 있단다.
처음 흙으로 빚어 그늘에 말린 그릇은 물그릇이라 한다. 건아작업을 거쳐 잿물을 입히고 환을 친다. 환을 칠 때는 난초 잎도, 학도, 자잘한 꽃무늬도 일렬로 새긴다. 신이 사람의 쌍꺼풀이나 볼우물을 그려 넣듯이. 환치기가 끝나면 마지막 강정을 한다. 이때는 건아와 달리 햇볕에서 바짝 말린다. 이때부터 이름은 날그릇으로 바뀐다.
날그릇은 가마서리가 끝나면 1300도의 뜨거운 불 속에서 옹기가 된다. 이때 웅심 깊고 넉넉한 옹기가 되기 위해서는 아주 작고 보잘 것 없는 왈바리의 도움이 있어야 한다. 왈바리는 가마서리 때 옹기 몸과 뚜껑 사이에 놓거나 몸과 몸을 켜켜이 쌓을 때 반드시 넣어야 하는 완두콩 크기의 돌이다. 왈바리 넣는 것을 잊어버리면 옹기끼리 붙어서 제 구실을 할 수 없는 모양이 된다.
왈바리는 옹기의 심장이 제 기능을 할 수 있게 도와 매끈하고 까무잡잡한 피부의 건강한 옹기로 탄생시킨다. 제 무게보다도 수십 배가 되는 뚜껑을 이고 나흘간 가마 속에서 참아내는 왈바리는 작아도 얼마나 다부진지 모른다.
왈바리는 원래 경상도 사투리로 말괄량이를 뜻한다. 자그마한 말괄량이 손에 커다란 옹기의 탄생이 달렸다니 신기할 따름이다. 옹기의 덩치로 보나 쓰임새로 보나 어느 하나 부족한 것이 없어 보이는데 그렇게 큰 탄생의 비밀을 가지고 있을 줄이야. 생각이 이쯤 미치자 우리 집 옹기의 흠이 떠올라 슬쩍 웃음이 난다. 내 별명은 어릴 적부터 왈바리다. 나이차 많은 막내로 태어났으니 왈가닥일 수밖에 없었다. 늘 혼자 놀고 스스로 터득해야 했다. 그나마 큰 흉터가 없는 것이 참 다행이다 싶을 때도 있다.
모내기가 한창인 늦봄이었다. 일꾼들을 위한 잔치국수를 준비한 엄마는 커다란 가마솥에 멸치 육수를 냈다. 엄마가 고명으로 쓸 거섶을 준비하러 나간 사이 가마솥 뚜껑에 올라앉았다. 따뜻한 기운이 엉덩이를 간질거렸다.
가마솥 배꼽을 돛대처럼 잡고 엉덩이를 반쪽씩 달싹거리며 놀았다. 그러다 조금씩 흔들었다. 살짝 살짝 뚜껑이 밀리면서 재미있는 뱃놀이가 되었다. 신이 난 나는 돛대를 좀 더 세게 흔들었다. 그때 그만 배가 미끄러지면서 커다란 파도에 휩쓸려 육수에 풍덩 빠지고 말았다.
국수 삶다가 애 삶을 뻔했다며 놀란 엄마, 심장이 제 박동 수를 찾기도 전에 또 일을 냈다. 싸리나무로 장난감 지게를 만들다가 나무는 가만 두고 애꿎은 손만 내리쳤다. 몸에 피가 거의 다 빠져 나갈 쯤 발견되어 또 한 번 엄마를 기겁시켰다. 그 일 때문인지 아직도 악성빈혈로 고생한다.
파리한 얼굴의 나는 약을 달고 살았다. 어느 날 뒤뜰의 감나무가 꼭 나처럼 생겨 보였다. 핼쑥한 이파리 터실터실한 줄기가 내 얼굴과 입술을 꼭 닮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감나무에게 내 약을 억지로 다 먹였다. 나중에 엄마한테 들켜 엉덩짝이 불나게 맞기도 했지만 그 후로도 해봐야 직성이 풀리는 모험심은 끝나지 않았다.
내가 머물다 간 자리는 늘 왈가닥 소리가 났는데 오빠는 조용하고 침착한 성격에 무게감까지 있다. 오빠 본보라는 말을 고린도전서 13장처럼 들으면서 자랐지만 타고난 성미를 바꾸는 것은 쉽지 않았다.
내가 자잘한 돌이라면 오빠는 옹기였고 속에 웃기 돌까지 품고 있다. 내가 어부렁하다면 오빠는 실속파다. 그래서 오빠는 실수하는 법이 없고 손해 보는 일이 없다.
집안에 일이 생기면 엄마는 내게 바리바리 전화를 한다. 그러니 내가 왈바리를 면치 못하고 사는 것은 당연하다. 일이 이쯤 되어도 오빠는 입을 꾹 다물고 말이 없다. 애가 터져 죽을 지경이 와도 오빠의 입은 열리지 않는다. 어찌 보면 무관심 같고 달리 보면 곰삭아 해결되길 기다리는 것 같기도 하다.
왈가닥 성격인 나는 일처리를 하면서 속이 1300도 이상 끓어오르지만 끝날 때까지는 뚜껑을 이고 참는다. 일이 끝나고 나면 왈바리는 땅에 버려지고 모든 공은 옹기한테로 돌아간다. 옹기는 모든 걸 혼자 이루어 낸 척 장독대 중간을 차지하고 묵직하게 앉아 있다.
말괄량이가 있어 정숙한 사람이 더 참해 보이듯이 온몸을 던진 왈바리의 희생이 있어 옹기가 돋보이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왈바리 없이는 제구실을 할 수 없는 운명의 옹기이기에 비밀을 숨기듯 굳게 입을 다물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나를 왈가닥이라고 배척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칭찬 할 수도 없는 오빠의 입장이 이와 같지는 않을까.
많은 사람들이 옹기 마을을 다녀간다. 옹기의 장점은 극찬하지만 옹기를 탄생시킨 왈바리의 존재를 알고 가는 사람은 드물 것이다. 의자가 된 옹기를 보고서 왈바리의 존재를 알게 된 나도 이전에는 세상을 보는 눈이 뭇 사람들과 다를 바가 없었다.
어쩌면 우리 주변에도 옹기 같은 사람보다는 왈바리 같은 사람이 더 많을지도 모른다. 때론 와글거리며 우왕좌왕 할 때도 있지만 그들의 소담스런 삶이 모여 따뜻한 사회가 존재한다.
왈바리를 쓸쓸히 내려다보고 있는 옹기를 보니, 삶은 크고 모양 나는 것도 좋지만 작고 못나도 최선을 다하는 것이 더 아름답게 보일 때가 있다. 왈바리 몇 조각을 주웠다. 나도 모르게 버린 내 삶의 조각들을 줍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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