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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2009 부산일보 신춘 당선작- 박월수 본문

수필읽기

[스크랩] 2009 부산일보 신춘 당선작- 박월수

소금인형 2009. 1. 1. 22:52

부산일보



[신춘문예 - 수필] 달 / 박월수

-생명의 상징 물을 여자의 달거리로 불러오려 했다는 건
잉태의 근원이 거기에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었으리라…




 그날은 배꼽마당이 들썩거리도록 말 타기를 하고 놀았다. 배가 촐촐할 무렵 친구는 내 손을 잡고 자기 집으로 이끌었다. 친구의 어머니는 호박전을 굽고 있었다. 금방 구운 호박전은 달콤하고 고소했다. 노랗고 동그란 모양이 달을 닮았다고 생각했다. 그 달이 반달이 되고 하현달이 되고 눈썹달이 되어 내 속으로 사라졌다.
몇 개의 달을 삼켰는지 모른다. 어스름 녘이 되어 달처럼 부른 배를 안고 집으로 왔다. 달을 닮은 호박전을 먹을 때부터 아래가 이상했었다. 이제껏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싫고도 궁금한 무엇이 내 몸에서 벌어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구석에 숨어서 아무도 몰래 아랫도리를 내려 보았다. 낮에 먹은 호박전 빛깔이 끈끈하게 묻어 있었다. 아침이 되어 제일 먼저 살펴본 샅에서는 붉은 달빛이 흥건했다. 울컥 서러움이 밀려들었다.
뒤꼍 뚜껑 덮인 대야에서 몰래 훔쳐본 어머니의 서답이 떠올랐다. 달빛보다 더 붉은 물에 담겨있던 서답은 한 번도 앞마당 빨랫줄에서 하얗게 펄럭인 적이 없었다. 언제나 뒤꼍에 낮게 엎드려 달빛 아래서만 말랐다. 결코 다른 빨래와 함께 섞인 적 없는 그것은 어린 내 눈에도 부끄러움이었고 남에게 숨겨야 할 비밀이었다.
앉은뱅이책상 서랍 속에 꼭꼭 숨겨둔 흔적을 반나절도 안 되어 어머니께 들켰다. 어머니는 달거리가 시작된 거라고 했다. 여자라서 겪는 불편이며 부끄러움이니 참아야 한다고도 했다. 달마다 한 번씩 며칠에 걸쳐 하게 된다는 마지막 말은 울고 싶은 나를 적잖이 안심시켰다. 내 속에서 흘러나오는 붉은 달빛을 날마다 경험하며 살 수는 없다고 절망하던 참이었다. 어머니의 말이 끝나고 왜 여자는 부끄러워야 하고 숨겨야만 하는지 묻고 싶었지만 그러지 못했다. 뒤꼍의 뚜껑 덮인 대야를 생각하니 나도 그래야만 할 것 같았다. 오후 내내 반짇고리 곁에 앉아 하얀 소창을 만지작거리던 어머니는 개짐이란 걸 만들어 내게 주었다. 뒤꼍에서 몰래 훔쳐 본 어머니의 서답이랑 참 닮았었다. 내 것이 좀 작았을 뿐. 샅에 차는 물건이라 했다.
셋이나 되는 오빠들 틈에서 풀썩거리며 자란 나는 억지로 여자가 되어야했다. 달을 지날 때 마다 개짐이 지닌 부피가 부담스러워 치마를 입고 견뎌야 했으며 달거리의 아픔도 참아야 하는 줄만 알았다. 여자보다 남자가 더 많은 우리 집에서 아무 눈에도 띄지 않게 모아둔 서답을 씻느라 밤에 몰래 깨어있기도 했다. 그러면서 나는 어머니의 자궁처럼 포근한 유년의 배꼽마당과 결별했고 달을 닮은 호박전을 유난히 싫어하게 되었다. 내가 잉태의 신비를 경험하기 전까지는.
달콤 쌉싸래한 신혼의 어느 날, 여름 땡볕에 제 몸을 둥글게 말아 키운 감자를 삶았다. 오지게 잘생긴 놈을 골라 입안에 넣다가 울컥 신물이 올라왔다. 빙빙 어지럼증이 생기더니 하늘이 노랬다. 달을 본지가 언제인지 헤아려 보곤 오스스 소름이 돋았다. 내 안에서 새 생명이 움을 틔운 것이다. 세상이 다 내 것이 된 양 좋았다. 몸속의 아이가 톡톡 발길질을 하던 날은 숨이 멎을 것 같은 경이로움에 휩싸이기도 했다. 말갛게 숨 쉬던 달빛이 치마 아래로 축축하게 번지던 날 아이의 첫 울음 소릴 들었다. 서 말의 붉은 달빛을 쏟은 후에야 아이를 낳는다는 우리 어머니의 어머니, 그 어머니의 어머니처럼 나도 그만큼의 달빛을 쏟은 후 비로소 엄마가 된 것이다.
우주가 내 품에 와서 안긴 듯한 잉태와 출산의 기쁨을 가슴 뻐근하게 누려보고서야 알 게 되었다. 내게로 들어 온 달의 소중함과 내 안에서 느끼는 귀찮지만 달콤한 비밀은 건강한 여자에게만 허락된 의무이며 축복이라는 것을.
예전엔 가뭄이 심하면 붉은 혈이 선명한 여자의 개짐으로 깃발을 만들어 기우제를 지내는 풍습이 있었다. 생명의 상징인 물을 여자의 달거리로 불러오려 했다는 건 잉태의 근원이 거기에 있다고 믿은 때문이었으리라. 그런 이유로 지금껏 내가 알던 것과는 달리 여자의 달거리는 신성한 것으로 여겨졌을지도 모를 일이다. 우리 조상들은 달의 정기를 받으면 여성의 생산력도 높아진다고 믿었다. 보름달이 뜨기를 기다려 '강강술래'나 '월월이청청' 같은 놀이를 여자들만 즐긴 것을 보면 말이다.
나는 이제 내가 처음 달을 보았을 때의 어머니 나이가 되었고 엉덩이에 살이 통통하게 오르고 젖무덤이 봉긋하게 부푼 딸은 그때의 내 나이가 되었다. 둥근 호박전 빛깔을 가진 달과 제 몸의 붉은 달빛도 그 아이는 보았다. 빠르게 시간이 흘러 그 아이가 우주와 소통하게 될 날을 나는 손꼽아 기다린다. 달이 가져다 준 몸의 신비를 우주를 품에 안으므로 온전히 이해하게 되는 날 비로소 그 아이도 생명의 경이로움을 온 몸으로 받들고 지켜가게 되리라.
그때쯤이면 아마 나는 달의 몰락을 경험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 시기에 겪게 된다는 끝 모를 우울과 나른함으로 힘든 날들을 맞을 수도 있다. 혹은 쓸쓸함과 불안함이 엄습해 와서 밤마다 잠 못 들고 뒤척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내게서 뜨고 지던 달의 기억들이 모여 이루어진 아이와, 그 아이의 아이를 보면서 순하게 견디어 낼 것이다. 이미 오래전에 달이 준 의무와 축복을 누린 후 참다운 *완경(完經) 을 이룬 내 어머니처럼.

*완경(完經)-김선우의 시 제목에서 빌려옴. 폐경(閉經)



당선소감 - 세상 응달 데우는 힘 받은 느낌

옛 사문진 나루에서 묻어 온 안개가 오늘은 포근할 거라며 속살거리는 듯 합니다.
쥐눈이콩 한 움큼 넣은 물을 끓이며 멀리 동해바닷가 양남 오일장을 떠올립니다. 가녀린 사각의 기둥이 띄엄띄엄 늘어선 채 녹슨 양철지붕을 받치고 있는 곳, 세월의 더께가 덕지덕지 앉은 그 곳에서 겨울바람을 맨몸으로 맞으며 약 콩을 팔던 할머님이 계십니다. 쥐눈이콩은 쓰임새가 많아 달여서 그 물을 마시면 몸에 열을 내리고 볶아서 먹으면 몸이 차가운 이를 따뜻하게 한다는 말씀을 제게 전해 주셨습니다.
쥐의 눈처럼 반짝이는 작은 콩알을 보며 소중한 꿈 하나를 품었습니다. 마음 시린 이에게 이로운 사람으로 스며들고 싶었습니다.
반가운 편지 같은 당선 소식을 접했습니다. 세상의 응달진 한 귀퉁이를 다정한 언어로 데울 수 있는 힘을 부여받은 느낌입니다. 의미 있는 글밭을 일구시는 홍억선 교수님과 수필사랑 문우님들께 고마움 전합니다.
입이 큰 주전자가 노래를 합니다. 쥐눈이콩 물이 끓기 시작한 모양입니다. 몸에 열이 많은 그이를 위해 우선은 뚜껑을 열어놓고 오래도록 달여야겠습니다.

박월수/1966년 대구 출생. 수필사랑문학회 회원. 수필사랑 심화2기.

심사평 - 구성력 치밀·이미지 구사 뛰어나

응모작 680여 편 중에서 정독을 거쳐 1차로 50편을 골랐다. 기성수필가들에 비해 부족함이 없는 작품들이었지만 문장력과 체험의 육화와 감동력을 기준으로 2차 심사를 거쳐 20편을 뽑았다. 3차 심사에서는 흠결이 기준이 되었다. 단락의 미흡, 결미의 미완성이나 체험의 공감력과 의미화가 부족한 글이 탈락하면서 10편이 남았다. '달', '우화(羽化)', '해원(解寃)', '순례의 길', '맨발', '청동숟가락', '소금', '유화와 묵화', '혼서(婚書)', '주름'이었다. 종심의 대상으로 윤남석의 '주름', 조재환의 '혼서', 신성애의 '우화', 그리고 박월수의 '달'이 올라왔다. '주름'과 '혼서'는 문장에서 부족함이 없으나 참신한 해석력과 내적 치열성이 상대적으로 부족하여 최종심에서 아쉽지만 제외되었다.
신성애의 '우화'는 도시의 문화생활을 누리려는 할머니의 시골탈주를 서정적으로 묘사하면서 여성주의의 확장이라는 현대성을 지닌 점에서 주목을 끈다. 박월수의 '달'은 여성의 달거리를 모성적 운명을 초월하여 원초적 생명력으로 승화시킨 작품이다. 우주의 달과 여성의 달을 병치시킨 상상력, 기가 넘치는 문장, 치밀한 구성력과 이미지 구사에서 뛰어났다.
오랜 고심 끝에 '달'을 당선작으로 최종 결정하였다. 정치한 구성력과 생명원리로 형상화한 해석력을 서정적 문체와 참신한 시각보다 높게 평가하였다. 여타 작품의 균질성도 최종심의 기준이 되었다. 당선자에게 축하를, 낙선자에게 위로를 보낸다. 3심에 오른 분들에게도 상응하는 격려를 보내면서 더욱 정진하시기를 바라마지 않는다. (심사위원 박양근 부경대학 교수)

출처 : 수필사랑
글쓴이 : 홍억선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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