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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가 이미경의 블로그 입니다

[스크랩] 2009 경남신문 신춘 당선작-주름 본문

수필읽기

[스크랩] 2009 경남신문 신춘 당선작-주름

소금인형 2009. 1. 3. 08:51

 

 주름        

 

 

                                                   전명희

 

 

주름은 길이다. 수없는 마음들이 오고 가고 수없는 사연들이 흘러가고 흘러오는 길.

내 얼굴에도 숱한 길이 있다. 가족과 친구와 이웃과 정을 나누고 더 크고 원대한 배움을 익히며 타인과의 사랑과 이별을 겪으며 그 길은 세세 갈래로 나뉘고 다져졌다. 동경과 꿈이 배어 있고 격정과 한숨이 녹아 있고 슬픔과 울분이 스며 있다. 그중 눈가의 주름은 내 얼굴의 군소의 길 중에 가장 마음에 들지 않는 길이다. 그 길은 타인의 사연이 흘러오는 것을 일부러 막아서는 듯한 험한 둔턱을 끼고 있기 때문이다. 자연히 평범한 이웃들은 그 길을 선호하지 않을 것이다. 억세고 심술궂기까지 한 그 길에는 언제부턴가 타인의 발길이 뚝 끊긴 듯도 싶다.

화장을 잘 하지 않는 내가 그래도 그 길만은 조금 시간을 들여서 파운데이션이라도 펴 바르곤 하는데 마찬가지다. 이미 나 있는 길은 기초화장에 색조화장을 아무리 정성껏 해도 두툼한 심술의 장애물을 가려낼 길이 없이 도드라져 보인다. 외출이라도 할 양이면 거울 앞에 서는 시간이 길어진다. 아무리 해도 그 길 때문에 전체적인 인상이 좋아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여보, 나 수술할까 봐요. 눈 밑이 너무 사나워 보여서 영 신경 쓰여요.”

“생긴 대로 살지, 뭘.” 남편은 아내의 이 심각한 고민이 그저 우습고 하찮아 보이기만 하는 것일까.

눈 밑 지방을 제거하는 수술이 있다기에 혹해 있다가 마침 얼마 전 미용실에서 펼쳐본 잡지책에 수술 전과 수술 후의 비교 사진을 보니 사뭇 마음이 끌려서 넌지시 화두를 꺼내본 것인데 역시 남편의 화법은 완곡하면서도 강하다. 남편이 그러라고 해도 아마 평생 성형외과의 문을 두드릴 날은 오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말이라도 한마디 “그래? 나는 괜찮지만 그렇게 마음에 걸리면 한번 알아 봐요.” 했더라면 두고두고 뿌듯해 하지 않았을까. 뿐이랴, 남편을 자랑스러워하고 신뢰하는 마음이 그 전보다 몇 배는 두터워졌을 것이다.

하기는 나도 이 ‘말 한마디의 진정!’을 소홀히 하고 남편을 서운하게 할 때가 종종 있다. 남편의 속마음이 아내의 기탄없는 칭찬 한마디 듣고 싶어 하는 줄 뻔히 알면서도 그 한마디에 끝내 인색하여 나보다 다섯이나 많은 점잖은 남편을 삐돌이 아이처럼 만들어 버릴 때가 있었다. 입장을 바꿔 생각해보니 그동안 남편이 너그럽지 못한 아내에게 얼마나 조바심을 내고 심기가 불편했을지 짐작이 가고 많이 미안해진다.

새삼 부부지정의 밀도를 되돌아보게 하는 눈 밑의 길은 언제부터 생긴 것일까.

 

십여 년 전 장애 아동들을 돌보는 직장을 다닐 때이리라. 지금은 그 주변이 얼마나 번화하게 변했는지 모르지만 그때엔 시골 마을에서 꽤 깊숙이 들어간 산 밑에 덜렁 그 건물 하나 있었다. 주변으로 봄에는 진달래, 여름에는 보드란 자귀나무 꽃들이 지천에 흔하게 피었다. 가을에는 감나무와 밤나무가 툭툭 열매를 내던지며 우리들을 유혹하던 곳이었다. 그중 어느 가을이 문제였던 것 같다. 외출이 가능한 아이들 몇을 데리고 주변의 산을 산짐승처럼 뛰어 다녔다. 예쁜 나뭇잎도 따고 밤도 줍고 떫은 감을 따서 방안에 걸어둘 욕심으로 자꾸 깊숙이 깊숙이 아이들을 몰았다. 그날 유독 커다란 잎에 원색의 붉은색 단풍물을 들인 나무들이 많았었다. 그 색이 너무 강렬해 감히 잎을 따거나 만지지는 않았지만 그 곁을 수도 없이 스치고 지나쳤던 게 결국 화근이었다. 그날 밤부터 얼굴과 목에 붉은 빛이 돌며 좁쌀만한 돌기가 돋아 나오기 시작하더니 이내 오른쪽 볼 쪽이 벌겋게 부어올랐다. 주변에서는 병원에 다녀오라고 채근했지만 나름의 소신만 가지고 차차 괜찮아지려니 하고 말았다.

지금 생각하면 왜 그토록 어리석고 무모한 태도를 고집했는지 스스로 아연할 지경이지만 그 때로선 아마 그럴 수밖에 없었으리라. 그곳 아이들은 모두 장애아들이었다. 정신지체 1급부터 뇌성마비 1급, 증상이 가벼운 아이들도 있었지만 대부분 심각한 장애를 가진 중증 장애아들이었다. 사지가 뒤틀린 채 평생을 누워서 살아야 하는 아이도 있고 제 몸을 학대하여 하루가 멀다 하고 피를 보는 아이도 있고 눈만 끔벅끔벅 누워서 떠주는 밥을 받아먹을 힘이 없어 임의로 입을 벌리고 먹여야 되는 아이도 있었다. 고릴라 같은 큰 덩치에 문턱이고, 기둥이고 가리지 않고 꽈당, 꽈당 넘어져 머리와 얼굴이 상처로 울퉁불퉁 길이 난 채 헬멧을 쓰고 사는 아이도 있었다. 그 아이들과 함께 살면서 겨우 얼굴에 난 부종과 돌기 때문에 병원을 다닌다는 것이 왠지 아이들에게 미안하고 스스로 낯이 서지 않았던 것이다. 약국에서 바르는 약으로 며칠을 버티다 보니 그럭저럭 가라앉기는 했지만 그 때 이후 눈 밑에 이상한 주름이 생겼다. 살이 부었다가 갑자기 부기가 빠지면서 늘어진 피부가 주름으로 고정돼 버린 것이다. 그날 그 유별난 원색으로 나를 유혹했던 나무는 옻나무였음을 나중에 알았다.

눈가의 주름이 곱고 순한 사람들이 있다. 이 사람들은 웃을 때 특히 이 주름이 진가를 발휘한다. 두 눈을 중심으로 마치 은은한 꽃 두 송이가 살포시 피어나고 동시에 얼굴 전체가 하나의 화사한 꽃처럼 피어난다. 꽃 같은 고운 길로 닦이기까지 그들의 생애 또한 그렇듯 순정하고 포근하고 너그럽게 끌어안지 않았을까. 자신보다는 타인을 먼저 생각하고 가까이 있는 이웃들에게 보기만 해도 힘이 되고 아름다운 자극을 심어준 삶을 살아오지 않았을까. 눈가의 길이 순하고 섬세한 이에게는 알 수 없는 그런 믿음과 넉넉함과 고요한 포용력이 느껴진다. 그런데도 이 소중한 주름을 일부러 돈을 들여 없애려고 안달을 하는 사람을 보면 마음이 답답해진다. 현재의 자신을 부정함은 물론 애써 가꾸고 닦아온 연륜과 알뜰한 삶의 흔적까지 지우려는 어리석음이 느껴지기 때문이다.

주름은 인생이다.

내가 세상에 어떤 걸음으로 걸어 나갔는지를 뚜렷이 보여주며 살아온 세월이 고스란히 묻어 있는 인생 자체다. 주름이 유독 험하고 거칠고 크고 깊숙한 사람들에게는 그 달려온 인생 또한 순탄하지 않았음이 느껴진다. 그인들 타인이 쉬어 가고 싶은 아늑하고 평탄한 길을 만들고 싶지 않았으랴. 이따금씩 쉬어가며 돌아볼 여유도 없이 숨가쁘게 달렸던 그들의 역경과 굴곡 많았던 삶에 경의를 표하며 이제라도 온유하고 다감하고 여유로운 일만 생기기를 간절히 기도할 뿐이다.

웃으면 더 밉살스럽게 일그러지는 내 눈가의 주름. 이제라도 살뜰히 보듬어 줘야겠다. 누가 보면 참 심술궂다, 밉상이다 하겠지만 한때의 순수한 소명감으로 불우한 이들과의 정을 나눴던 젊음의 흔적이 아닌가. 거울을 볼 때마다 그때의 순수한 동기를 흠모하며 현재의 나를 돌아보리라. 그때 이후 특이할 만한 주름(길)이 생기지 않았음은 더 이상 뜨겁고 진솔함이 아닌 적당 적당히 살아왔음을 의미함이 아니런가.

이제는 주름이 생기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으련다. 주름은 나 자신을 이웃에게 데려가고 이웃을 나에게로 오도록 하는 정다운 길이기 때문이다. 대신 크고 눈에 띄는 길보다는 작고 약해서 큰길에선 함부로 나다닐 수 없는 연약한 마음들이 터놓고 오갈 수 있게 가능하면 좁고 가늘고 부드러운 길을 만들리라. 그러기 위해선 지금보다 더 세밀한 마음의 정도(精圖)로 내 안을 재정비하고 지금보다 더 투명하고 정갈한 축척으로 영혼의 지도를 기록해야 하리.

거울을 보며 내 삶이 배어 있는 주름들을 본다. 어떤 의미로도 깊이와 연륜이 묻어나려면 아직 멀었다. 그것이 아닌 데에야 삶의 어떤 한가함과 나태는 물론 투정과 한숨조차 스스로 용납해서는 안 되리라.

 

 

 

 

 

[경남신문 신춘문예] 수필 당선 소감


진솔한 열정과 응석부림의 끼어듦


 

우리 부부가 누워서 티비를 보면 아이는 정신없이 놀다가도 부부 사이에 덥썩 끼어들며 흥얼흥얼 노래를 부릅니다. 야, 여기 니 자리 아니야. 저리 가. 해도 못들은 척 눈을 감고 얼굴엔 미소가 떠나지 않지요. 아들의 그 모습은 오래 전부터 이어진 것이지만 저는 최근 문득 우리 문단에 뛰어드려는 제 문학에의 자세가 그런 것이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사랑과 응석과 재롱과 투정이 모두 섞인 끼어듦, 문학의 품에 겁없이 뛰어든 제 마음 또한 그 끼어듦과 다르지 않음을 고백합니다. 그것은 제 문학적인 소양이 어린아이의 그것처럼 미숙하고 부박함을 뜻하는 말과도 같습니다. 그러함에도 진솔한 열정과 애정이 있으므로 너그러이 받아주시고 격려해 주시리란 믿음과도 같습니다. 그 첫 대답을 이렇게 흔쾌한 칭찬으로 해주시고, 격에 어울리지 않는 갈채를 받고도 이것이 마땅히 제가 받아야 하는 것인지에 대한 분별도 없이 그저 머리 쓰다듬어 주시는 손길에 감사하고 뿌듯해 하는 것을 속없다 나무라지 않으실지요.

저는 오랫동안 국문학도라는 학력이 부담스러웠습니다. 학교에서 한 번도 열심히 공부한 기억이 없는데 얼결에 졸업장을 받은 것처럼 자격지심이 많았지요. 이제 이 상으로 간신히 국문학도의 체면은 세웠으니 십수 년 제 안에 다져진 자격지심의 녹도 박박 긁어 없애야겠습니다.

상을 받고 더없이 기분이 좋은 것은 이 상이 저 혼자만의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시아버님은 경로당 나가실 때 음식물 쓰레기를 들고 나가시고 돌아오셔서는 지저분한 방을 훔치시고 그러면서도 묵묵히 기다리셨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푸근한 남편은 아내의 부족함에도 한결같은 믿음으로 다독이고 응원해 주었습니다. 몇 차례의 고배를 마시고 그때마다 좌절을 했지만 문학에의 끈을 놓지 않은 것은 남편의 은근한 격려와 배려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또 고향의 어머니는 손수 약초를 캐서 보약을 해주시고 철마다 직접 채취한 굴과 조개와 퍼덕거리는 생선들을 보내셨습니다. 이순향 선생님과 친구 영희 영매 미자의 소중한 인연도 어찌 잊을까요. 이분들의 정성과 관심에 대한 보답이다 생각하니 그저 한량없이 기쁘기만 합니다. 아, 빠트리면 안될 분이 또 한 분 계십니다. 목성균 수필가님. 최근 이분의 수필을 읽으면서 느낀 점도 많고 배운 것도 많습니다. 마음의 스승으로 삼고 계신 분이기에 누가 되지 않는다면 이 자리를 빌려 감사를 드리고자 합니다. 그리고 제 글을 뽑아주신 심사위원 여러분과 경남신문에 진심 어린 감사의 절을 올립니다.

 

 

△1968년 진도 출생 △1991 조선대학교 국어국문과 졸업 △신작시신작곡 회원 △진도 홍주 사랑 전국문학작품공모 시부문 동상 입상

 

 

 

 

 <심사평>

 

 

  

수필은 단순히 문장을 통해 개성과 기교만을 보는 게 아니고, 인생 경지와 삶의 깨달음을 보게 된다. 인격에서 향기가 나야 문장에서 향기가 나는 법이다. 삶의 경지, 인생의 품격에 따라 수필의 수준이 달라진다.

전체적으로 삶의 주변에서 일어난 사소한 체험을 통해 작자의 상상과 인생관과 감성을 불어넣어 독자적인 세계를 창조해내고 있다.

단순한 삶의 에피소드, 일상사의 기록, 잊혀지지 않는 추억담을 담아놓으려는 데 그치지 않고 자신의 체험을 통해 인생의 발견과 의미를 부여한 작품이 낳았다. 이런 수필에 대한 인식이 높아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당선작으로 선정한 전명희의 ‘주름’은 노쇠의 흔적으로 거부감을 보이는 ‘주름’에 대해 새로운 발견과 깨달음을 보여준 작품이다. 현대인들이 모두 얼굴 성형에 집요한 관심과 집착을 보이고 있는 실정에, ‘주름’을 통해 순리와 포옹과 편안함의 미학을 펼친 점이 돋보였다. 최보은의 ‘도둑고양이’는 고양이의 심리와 생태 관찰이 치밀하고 이를 통한 인생적 발견이 큰 공감을 갖게 한 작품이었지만, 구성이 단순하다는 점이 아쉬웠다. 이 밖에 ‘수의’ 등도 시선을 끄는 작품이었다.

응모 수필들이 삶의 집중력과 치열성을 보인 것보다 한가하고 사색적인 데에 치중한 작품들이 다수였다. 이제 수필도 사회성, 시대성, 문제성을 담은 작품들을 보여줄 때가 되었다. 당선자에게 축하를 보내며 꾸준한 정진을 당부한다.

 

 

▲심사위원 김열규·정목일

 

 

 

 

 

출처 : 수필사랑
글쓴이 : 김희자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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