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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잡한 거리에 문득 피는 꽃 / 복거일 본문
혼잡한 거리에 문득 피는 꽃 / 복거일
도심의 거리에서 광고 쪽지들을 나눠주는 사람들은 반가운 사람들은 아니다. 복잡한 거리에서 길을 막고 쪽지를 내미는 손길을 만나면, 짜증이 나기가 십상이다. 그런 쪽지들을 보고 찾아가는 사람들이 있으니까, 그런 것들을 나눠주겠지만, 대부분 읽어볼 만한 것이 못 된다. 한 번 받아들면, 쓰레기통이 눈에 뜨이지 않을 때는 성가시기도 하다.
야릇한 모자나 우스꽝스러운 가면을 쓰고 몸의 앞뒤에 울긋불긋한 광고판을 달고 다니는 샌드위치맨들도 있다. 더러 종을 흔들고 다녀서, 시끄러운 거리를 더욱 시끄럽게 만든다.
이런 사람들에 대해서 조지 오웰은 말했다. “어느 아침 우리는 샌드위치맨 일자리를 찾았다. 우리는 사무실 뒤에 있는 골목길로 다섯 시에 갔었으나, 이미 삼사십 명이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었고, 우리는 두 시간 뒤에 우리에겐 일자리가 없다는 얘기를 들었다. 우리는 크게 실망하지 않았는데, 그것은 샌드위치맨이 부러워할 만한 일자리가 아니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하루에 열 시간 동안 일하고서 삼 실링쯤 받는다. 그것은 힘든 일이고, 바람 부는 날은 특히 그렇고, 그들이 제대로 돌아다니나 보려고 감독들이 자주 둘러보기 때문에 숨어버릴 수도 없다.” 오웰이 1920년대 서구 사회의 밑바닥에서 맛본 경험을 담담하게 적은 「파리와 런던에서 영락하여」에 나오는 이 구절에서 우리는 가벼운 충격을 거듭 받는다. 요란한 광고판과 우스꽝스러운 가면 속엔 가난한 사람이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고 이어 겉모습 때문에 사람을 보지 못할 만큼 우리에겐 상상력이 부족하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오웰은 이어 독자들에게 가벼운 충고 한 토막을 덧붙였다. “모든 샌드위치맨들이 탐내는 일자리는 광고 쪽지들을 나눠주는 일인데, 이것은 「샌드위치맨과」 똑같은 돈을 받는다. 당신이 광고 쪽지들을 나눠주는 사람을 보면, 한 장 받아듦으로써 당신은 그에게 좋은 일을 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는 그의 쪽지들을 다 나눠주고 나면 일이 끝나기 때문이다.”
꼭 십 년 전에 읽은 글이다. 이제 와서 생각하면, ‘지옥으로 가는 길은 선의로 덮였다’는 서양 격언이 점점 실감나는 복잡한 세상에서 위의 얘기만큼 좋은 일을 할 수 있도록 나를 도와준 실제적 충고는 드물었던 듯하다.
관심을 가져서 그런지, 어쩌다 시내에 나가게 되면, 내 눈엔 광고 쪽지들을 나눠주는 아주머니들이나 할머니들이 잘 들어온다. 입학 시험이 끝난 때라, 요즈음은 학원 광고 쪽지들이 많다. 그러나 날씨가 추워서 손을 주머니에 넣은 사람들이 많은 까닭인지, 선뜻 받아가는 사람들은 많지 않다. 굳이 피해 가거나 손길을 뿌리치고 가는 젊은이들도 적지 않다. 상냥하게 생긴 젊은이들이 그렇게 하는 것은 추운 날 길거리에서 아무도 달가워하지 않는 쪽지들을 내미는 사람들의 처지를 그려볼 만한 상상력이 없기 때문이리라. 그렇게 조그만 선행을 하는 데도 큰 상상력이 필요하다는 것은 얼마나 안타까운가. 이 세상에 부족한 것은 사랑이 아니라 상상력이다.
오웰의 충고를 새기면서, 나는 먼저 손을 내민다. 동행이 있으면, 한 장 받아들면서, 말한다. “한 장 더 주세요, 아주머니. 동행이 있거든요.” 그러면 쪽지들을 나눠주는 이들은 내 얼굴을 살피면서 싱긋 웃는다. 삶에 찌든 그들이 자신의 처지를 알아주는 사람에게만 보이는 뜻밖에도 싱싱한 웃음이다.
지금 살벌하지 않은 도시가 어디 있으며 혼잡하지 않은 거리가 어디 있으랴. 그런 도시의 그런 거리에서 싱싱한 꽃 한 송이를 피우는 일은 그리도 쉽다. 겉모습 속의 사람을 볼 만한 상상력이 있다면.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 죽음 앞에서> 중에서. 문학과 지성사, 19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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