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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념/김기림 본문
단념
살아간다고 하는 것은 별 게 아니었다. 끝없이 단념해 가는 것, 그것뿐인 것 같다.
산 너머 저 산 너머는 행복이 있다 한다. 언제고 그 산을 넘어 넓은 들로 나가 본다는 것이 산골 젊은이들의 꿈이었다. 그러나 이윽고는 산 너머 생각도 잊어버리고 '아르네(노르웨이의 작가 비에르손이 쓴 소설 <아르네>의 주인공. 감성적이며 먼 곳을 동경하는 젊은이)'는 결혼을 한다. 머지 않아서 아르네는 사, 오 남매의 복(福) 가진 아버지가 될 것이다.
이렇게 세상의 수많은 아르네들은 그만 나폴레옹을 단념하고 셰익스피어를 단념하고 토머스 아퀴나스를 단념하고 렘브란트를 단념하고 자못 풍정낭식(風靜浪息, 바람이 자고 파도가 잔잔해진다는 뜻으로, 들떠서 어수선하던 것이 가라앉음)한 생애를 이웃 농부들의 질소(質素, 꾸밈없이 소박함)한 관장(觀葬, 사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치르는 장례) 속에 마치는 것이다.
그러나 모든 것을 아주 단념해 버리는 것은 용기를 요하는 일이다. 가계를 버리고 처자를 버리고 지위를 버리고 드디어 온갖 욕망의 불덩이인 육체를 몹쓸 고행으로써 벌하는 수행승의 생애는 바로 그런 것이다. 그것은 무(無)에 접(接)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와는 아주 반대로 끝없이 새로운 것을 욕망하고 추구하고 돌진하고 대립하고 깨뜨리고 불타다가 생명의 마지막 불꽃마저 꺼진 뒤에야 끊어지는 생활 태도가 있다. 돈 후안이 그랬고 베토벤이 그랬고 '장 크리스토프'의 주인공이 그랬고 랭보가 그랬고 로렌츠가 그랬고 고갱이 그랬다.
이 두 길은 한 가지로 영웅의 길이다. 다만 그 하나는 영구한 적멸(寂滅, 사라져 없어짐)로 가고 하나는 그 부단한 건설로 향한다. 이 두 나무의 과실로 한편에 인도의 오늘이 있고 다른 한편에 서양 문명이 있다.
이러한 두 가지 극단 사이에 있는 가장 참한 조행(操行, 태도와 행실) 갑(甲)에 속하는 태도가 있다. 그저 얼마간 욕망하다가 얼마간 단념하고……. 아주 단념도 못 하고 아주 쫓아가지도 않고 그러는 사이에 분에 맞는 정도의 지위와 명예와 부동산과 자녀를 거느리고 영양(營養)도 적당히 보존하고 때로는 표창(表彰)도 되고 해서 한 편(篇) 아담한 통속 소설의 주인공의 표본이 된다. 말하자면 속인(俗人) 처세의 극치다.
이십 대에는 성(盛)히 욕망하고 추구하다가도 삼십 대만 잡아서면 사람들은 더욱 성하게 단념해야 하나 보다. 학문을 단념하고 연애를 단념하고 새로운 것을 단념하고 발명을 단념하고 드디어는 착한 사람이고자 하던 일까지 단념해야 한다. 삼십이 넘어 가지고도 시인이라는 것은 망나니라는 말과 같다고 한 누구의 말은 어쩌면 그렇게도 찬란한 명구냐.
약간은 단념하고 약간은 욕망하고 하는 것이 제일 안전한 일인지도 모른다. 아름다운 단념은 또한 처량한 단념이기도 하다. 그러나 예술에 있어서도 학문에 있어서도 나는 나 자신과 친한 벗에게는 이 고상한 섭생법(攝生法, 건강유지와 증진에 힘쓰는 것)을 권하고 싶지 않다.
'일체(一切)냐 그렇지 않으면 무(無)냐?'
예술도 학문도 늘 이 두 단애(斷崖, 낭떠러지)의 절정을 가는 것 같다. 평온을 바라는 시민은 마땅히 기어 내려가서 저 골짜기 밑바닥의 탄탄대로를 감이 좋을 것이다.
<문장>(1940. 5)
<해설>
글쓴이는 옳다고 생각하는 자신만의 삶의 태도를 지니고 있습니다. 이것저것 눈치보면서 확실한 태도를 갖추지 못하는 것에 대해 비판적으로 이야기하고 있죠. 이는 글의 마지막 부분에 이어지는, '일체(一切)냐 그렇지 않으면 무(無)냐?'라는 표현에서 함축적으로 드러나 있습니다. 삶을 살아갈 때는 옳다고 생각하는 쪽으로 확실한 선택을 드러내야 한다는 것입니다.
자신에게 유리한 쪽으로만 움직이려는 속인들의 처세를 비판하면서 확실한 태도가 필요하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즉, 어느 쪽으로도 기울어지지 않은 채 살아가는 태도를 견주며 확실한 신념이 있어야 함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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