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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가 이미경의 블로그 입니다

[스크랩] 김종완 선생님/ 대구 강연 본문

수필읽기

[스크랩] 김종완 선생님/ 대구 강연

소금인형 2010. 4. 17. 20:07

 

시(侍): 모실 시 : 절에 가서 기도드리는 것.

시(恃): 믿다. 의지하다. 어머니. 자부하다(뽐내다→ 장자): 내 마음에 절을 지어 놓았으니, 심령이 배 부른 자. 심령이 가난 한 자는 천국이 자기 것이요. 부자가 천국에 가기는 낙타가 바늘귀 통과하는 것보다 어렵다고 했다.

나는 글을 읽으면서, 너무나 잘 써서 나를 기죽이는 글들을 보면 전엔 줄 짝짝 그으면서, 난 언제 이렇게 쓰지 하고 열등감과 한쪽에서 일어나는 시샘에 마음고생을 했는데, 요즘은 간이 부어가지고는 이 작가가 날 향해 이렇게 말하는 것 같다.

“난 이렇게 심오한 생각을 하거든. 넌 못하지? 또는 난 이렇게 섬세하게 예민하게 느끼거든. 넌 못 느끼지?”

한마디로 못난 내 앞에서 뻐기는 것 같다. 그럼 걱정되지. 잘 나서 뻐기는 자는 천국 가기 틀렸다는데. 우린 죽어서는 못 만나겄소! (그럼 난 마음이 가난하니 천국에 틀림없이 갈 거란 말이 되네. 이게 바로 자기를 모르는 것이지.)

 

문학이란 나를 뽐내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물을, 너를 받아들이는 것, 즉 모시는 것이다. 그러면 여러분은 물을 것이다. 내 얘기 좀 하려고 하면 뽐낸다고 하더라고, 그게 뽐내는 거라면 글을 어떻게 쓸 수 있겠소? 정말 그러게요.

여기서 문제를 하나 제기 합시다. <모시는 것과 뽐내는 것>의 차이란 무엇인가.

 

모과를 가지고 글을 한번 써 봅시다.

 

·모과차를 담다. → 실용

·못 생긴 게 향기롭다. → 덕

·늦가을까지 햇살 속에서 익었기에 향기롭다(설중매의 시선). 나도 뭔가를 하련다. 난 훌륭한 사람이니까.→ 교훈

·우리집에 모과나무 있었다.→ 추억담

·모과 선물을 받다. → 아직도 그 향기 속에 그가 있다(4-50대)→ 낭만

·모과가지에 달려 있는 모과의 모양 →엄마의 젖가슴을 파고드는 아이같다. 단단한 과육, 등등

·독특한 모양, 무늬. 꽃의 향기. 모과꽃→고 곱고 여린 것이 이렇게 큰 열매를.

·인터넷을 뒤져서 모과의 유래, 의학적 효능 등등 (가장 재미 없는 글이지요.)

 

이게 우리가 쓰는 일반적인 수필작법입니다.

이렇게 쓰면 일단 글이 되지요. 그러나 독자는 얼마 읽다가 뻔한 얘기라고 외면하기 십상이지요. 그럼 어덯게 써야 하나?

 

  

 

모과 썩다

정진규

 

올해는 모과가 빨리 썩었다 채 한 달도 못갔다 가장 모과다운 걸, 가장 못생긴 걸 고르고 골라 올해도 제기 접시에 올렸는데 천신하였는데 그 꼴이 되었다 확인한 바로는 농약을 하나도 뿌리지 않은 모과였기 때문이라는 판명이 났다 썩는 것이 저리 즐거울까 모과는 신이 나 있는 눈치였다 속도가 빨랐다 나도 그렇게 판명될 수 있을까 그런 속도를 낼 수 있을까 글렀다 일생(一生) 내가 먹은 약만해도 세 가마니는 될 것이다 순수한 것이라야 빨리 썩는다 나는 아예 글렀다 다만 너와 나의 사랑이 그토록 일찍 끝난 것도 그러한 연유에서였을까 첫사랑은 늘 깨어지게 되어 있다 그런 연고다 순수한 것은 향기롭게 빨리 썩는다 절정에서는 금방인 저 쪽이 화안하다 비알 내리막은 속도가 빠르다 너와의 사랑이 한창이었던 그때 늘 네게서는 온몸으로 삭힌 술내가 났다 싱싱한 저승내가 났다 저승내는 시고 달다 그런 연고다

 

시인 정진규

경기 안성시 1939년 10월 19일(72살)출생. 1960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시 '나팔서정'으로 데뷔 고려대학교 대학원 졸업 현대시학 주간을 했고 1985년 월탄문학상을 수상했다.

 

 

정진규는 모과에 대해서 시를 썼다. 모과의 덕을 말하는 것도 아니고 모과의 추억이나 모과의 쓰임에 대해서가 아니라, 모과의 썩음에 대해서.

 

 

 

시 해설/ 김종완

 

올해는 모과가 빨리 썩었다 채 한 달도 못갔다 가장 모과다운 걸, 가장 못생긴 걸 고르고 골라 올해도 제기 접시에 올렸는데 천신하였는데 그 꼴이 되었다 확인한 바로는 농약을 하나도 뿌리지 않은 모과였기 때문이라는 판명이 났다 (여기까진 시도 아냐. 나도 쓰것다. 그러나 그 다음이 시다. 평범했던, 일상의 언어가 갑자기 요동치기 시작한다. 혁명한다) 썩는 것이 저리 즐거울까 모과는 신이 나 있는 눈치였다 (죽음에 신이 나 있다니. 소멸의 환희) 속도가 빨랐다(신이 난 근거) 나도 그렇게 판명될 수 있을까(어떻게? 농약을 하나도 뿌리지 않는) 그런 속도를 낼 수 있을까 글렀다 일생(一生) 내가 먹은 약만해도 세 가마니는 될 것이다 순수한 것이라야 빨리 썩는다(주제. 완전 소멸을 꿈꿔 본 적 있는가? 정말로 깨끗한 청산. 죽어 저승 같은 것 없다면, 죽어도 또 생이 있다면 죽으나 마나고. 이 시는 소멸의 기쁨을 모르면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어. 보다 많이 쌓고, 보다 크게 쌓고자 하는 보다 많은 것을 가지는 게 지고의 선인 유물론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없음을 무를 허를 이야기 해.) 나는 아예 글렀다 다만 너와 나의 사랑이 그토록 일찍 끝난 것도 그러한 연유에서였을까 첫 사랑은 늘 깨어지게 되어 있다 그런 연고다(죽으면서 돌아보면 삶은 정말 아름다웠을 거야. 가장 아름다웠던 것은 순수했던 시절들. 순수란 마치 휘발해 버리는 드라이아이스 같은 것. 오! 첫 사랑이여) 순수한 것은 향기롭게 빨리 썩는다(그래서 순수를 지킬 수 있다) 절정에서는 금방인 저 쪽이 화안하다(저 쪽? 시인은 제기접시 위에서 썩고 있는 모과를 보고 있다. 썩음이 절정에 이르렀다. 마치 밤하늘에 쏘아 올린 불꽃이 사그라지며 절정의 아름다움을 뽐내듯이) 비알 내리막은 속도가 빠르다(순수한 것은 저리도 빨리 사라지나니! 소멸의 상쾌함.) 너와의 사랑이 한창이었던 그때 늘 네게서는 온몸으로 삭힌 술내가 났다(이 시를 감상하는 마지막 관문이다. 산문은 고체적 언어이고 시는 액체적 언어이다. 곧 썩힘의 언어다. 그래서 시는 애매하다. 모과가 썩으면서 나는 냄새? 삭힌 술내. 시고 단내. 그러면 너의 정체는? 모과다) 싱싱한 저승내가 났다 저승내는 시고 달다 그런 연고다(시인은 72살의 죽음을 생각하는 나이다. 그에게 죽음이란 어떻게든 피하고 싶은 무서운 것일까? 아니다. 죽음이란 소멸하는 것. 존재하는 것은 소멸하게 되어 있다. 가장 깨끗한 소멸은 걸작을 한편 써 놓고 요절하는 것이었다. 이미 요절할 기회를 놓쳤으니 이젠 내게 주어진 마지막 숨까지 다 쉬고 죽는 자연사만 남았다. 난 지금 그 죽음의 때를 기다리고 있다. 모과의 죽음을 본다. 죽음의 냄새, 시고 달다. 그렇다면 저승도 시고 달 것이다. 나는 기다린다. 깔끔한 소멸을.)

 

우리가 앞에서 들었던 몇 가지의 예와 이 시와의 가장 두드러진 차이는 무엇인가?

이 시의 시적화자의 모습이 단편적이라도 그려지는가? 그것이 바로 인물의 성격이다. 바로 성격이 있느냐, 없느냐이다.

살아 있는 자는 존재하는 자이고 존재하는 자는 환경을 가지고 있다. 그가 처한 현재가 있다. 시인은 70을 코앞에 둔 2007년 이 시를 썼다. 죽음을 받아드리는 자세가 보인다.

미학적으로 성공한 현재란 김지하식으로 말하면 흰그늘을 띄고 있다. 슬프지만 결코 슬픔에 빠지지 않는다. 왜? 흰 빛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전통적으로 말하면 한이다. 진정한 우리의 한은 슬픔에만 빠져있지 않다. 그건 청승이다. 현재를 잃었을 때, 글은 십중팔구 감상에 빠지고 만다. 청승을 떨거나 부박(浮薄)스럽거나.

이제 수필 두 편을 감상해보자.

자, 여러분들이 백일장에 나갔습니다. 오늘의 과제는 <기차>입니다. 여러분은 무엇을 어떻게 쓰실래요? 자, 눈을 감으세요.

 

 

 

기차는 그냥 지나가지 않는다(에세이스트 29호 발췌)

정 성 화

jsh9517@hanmail.net

어릴 적 내가 살던 곳은 경부선 기차가 지나가는 시골이었다. 저녁밥을 먹은 뒤 심심하면 나는 강둑에 앉아 기차를 기다렸다. 기차는 언제나 어두운 들녘의 한 쪽을 들치고 씩씩하게 달려왔다.

기차는 아름다웠다. 캄캄한 밤하늘에 소리 없이 풀어지던 한 무더기의 증기도 아름다웠고, 네모난 차창에서 새어나온 불빛이 만드는 금빛 띠도 무척 아름다웠다. 그 들녘에 이르러 울리던 기적 소리는, 기차가 길게 내쉬는 숨비소리로 들렸다. 나는 그때 기차가 어쩌면 한 마리의 순한 짐승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기차는 그냥 지나가지 않았다. 한 번도 가보지 못한 곳에 대한 그리움을 내 가슴속에 주르륵, 두 줄로 박아놓고 갔다.

시계가 귀하던 시절이라 기차가 오가는 시각이 시계 역할을 했다. 어머니는 내 바로 아래 동생을 서울 가는 첫 기차 시각에 낳았다고 했다. 그리고 대구에서 오는 저녁 통근차가 도착할 무렵에 나를 낳았다고 했다. 그러고 보면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나 처음으로 들은 소리는 어머니의 목소리가 아니라 기적 소리였을지도 모른다. 그래서일까. 지금도 어쩌다 기적 소리를 듣게 되면 무척 반갑다.

기찻길은 누구에게나 서정을 불러일으킨다. 멀리까지 이어지는 시각적 이미지 때문인지 기찻길이 상기시키는 그리움은 과거 지향적이면서도 미래 지향적이다. 돌아가고 싶은 곳으로의 향수와 달려가고 싶은 곳에 대한 잔잔한 열망을 동시에 품느라고 기찻길은 아마 평행선이 되었을 것이다. 반짝이는 선로와 거무스레한 침목, 그리고 녹물을 뒤집어쓰고 있는 자갈이 전부인데도 기찻길이 아름다워 보이는 이유는 뭘까. 우리가 만나고 싶은 이들이 그 길 끝에 있기 때문일 것이다.

기차 안에서 바깥 풍경을 내다보는 것도 좋지만, 나는 내가 탄 기차가 어떻게 달리는지 고개를 내밀어 기차의 앞쪽 보는 것을 좋아한다. 수시로 좌우로 꺾이면서도 이내 몸체를 추스르는 기차, 두 세 갈래의 선로 앞에서도 머뭇거림 없이 바로 한 선로를 택해 달리는 기차를 보며, 나는 의연하고 자신감 넘치는 어떤 남자의 이미지를 떠올린다. 대부분의 여자들이 기차 타기를 좋아하는 데는 그런 이유도 들어있지 않을까.

대학 시절, 그와 나는 서로 사는 곳이 달라 기차를 자주 탔다. 늘 역에서 만나고 역에서 헤어졌다. 헤어질 때마다 나는 입장권을 끊어서 그를 배웅하곤 했는데, 그는 언제나 기차의 맨 마지막 칸 뒷문에 서서 나에게 손을 흔들었다. 그리움이란 어쩌면 소실점으로 변해가는 것에 대한 아쉬움인지도 모르겠다. 그때 만일 그 사람이 기차를 타고 떠나는 모습을 내게 자주 보여주지 않았더라면, 우리는 지금 어떻게 되어 있을까. 길을 물어도 못 들은 척하며 그냥 지나가는 사이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기차는 승객과 함께 갖가지 사연도 태우고 달린다. 여유롭게 여행을 떠난 사람, 밥벌이를 위해 헐레벌떡 기차에 오른 사람, 장삿길에 올랐다가 집으로 돌아가는 사람, 그리고 실의에 빠져 무작정 기차에 오른 사람 등. 그러나 의자에 기대어 잠들어 있는 모습은 다들 편안해 보인다. 그의 고단함이 어느 정도인지 재빨리 알아차린 의자가 아주 편안하게 그를 받쳐주기 때문이다. 기차 의자만큼 세상살이의 고단함을 잘 알고 있는 의자는 또 없을 것 같다.

기차에서 잠깐 잠들었다가 깨어보면, 옆에 앉았던 사람이 내리고 다른 사람이 그 자리에 앉아 있을 때가 많다. 삶 또한 그러하다. 몇 정거장 지나다보면 내 옆에 앉아있던 슬픔이 내리고 그 대신 기쁨이 찾아들며, 어두운 얼굴로 앉아 있던 절망이 내린 뒤엔 환한 미소를 띤 희망이 내 옆에 사뿐히 앉기도 한다. 질주와 멈춤, 채움과 비움을 반복한다는 것, 그리고 종착역에 이르러서는 모든 걸 내려놓고 다시 빈 차가 되는 것까지, 기차는 우리의 삶과 아주 많이 닮았다.

기차는 제 속도 때문에 정작 좋은 풍경들을 다 놓친다. 나 역시 그렇게 살아온 듯하다. 그동안 내가 무사히 잘 달릴 수 있도록 건널목에서 차단기를 내려준 사람들과 나를 위해 철로를 보수해 준 사람들, 그리고 기찻길 옆에 피어 있던 꽃과 나무들까지 모두 잊은 채, 나는 그저 달리기에만 급급했던 것 같다. 작고 이름 없는 역이라고 그냥 지나친 간이역은 또 얼마나 많았을까. 게다가 이것저것 잔뜩 이어 붙이는 바람에 나는 지금 너무 긴 기차가 되어 버렸다.

오후에 건널목에서 동해남부선 기차를 만났다. 겨우 다섯 량의 객실만 이은 기차였다. 기차는 은빛 햇살을 받으며 마치 나비가 날아가듯 바다 쪽을 향해 팔랑팔랑 날아갔다. 나도 그렇게 산뜻하고 경쾌한 기차가 될 수는 없을까.

기차는 오늘도 그냥 지나가지 않았다.

 

 

 

 

 

작품론) 김종완

 

수필작법의 전형을 보여주고 있다. 신춘에 출품되었다면 이 작품을 뽑지 않는 심사는 잘 못 된 것이다. 완벽한 수필의 구조를 갖췄다. 습작의 작가라면 그만큼 배울 게 많다. 당신이 백일장에 나갔다. 주어진 제목이 기차다. 어떻게 쓸 것인가?

어렸을 때 우리집은 철둑길 가까이에 있었다. 여름 밤 심심해서, 아니 꼭 여름만은 아니었으니까 빼고, 저녁밥을 먹은 뒤 심심해서 강둑에 앉아 있으면 멀리서부터 기차가 어둠을 뚫고, 그러면 표현이 너무 밋밋하지. 기차는 언제나 어두운 들녘의 한 쪽을 들치고 씩씩하게 달려왔다. 그리고는 기적소리를 빽하고 지르면서 지나갔다. 아름다웠다. 기차는 아름다웠다. 캄캄한 밤하늘에 소리 없이 풀어지던 한 무더기의 증기도 아름다웠고, 네모난 차창에서 새어나온 불빛이 만드는 금빛 띠도 무척 아름다웠다. 그 들녘에 이르러 울리던 기적 소리는, 기차가 길게 내쉬는 숨비소리로 들렸다. 길게 내쉬는 숨비소리? 그러면 살았네. 나는 그때 기차가 어쩌면 한 마리의 순한 짐승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기차가 지나고 나면, 마치 내 가슴을 휑하니 뚫고 자나가버리면 허전함, 나만 두고 가버렸다는 허전함이 남았다. 기차는 그냥 지나가지 않았다. 한 번도 가보지 못한 곳에 대한 그리움을 내 가슴속에 주르륵, 두 줄로 박아놓고 갔다. 웬 두 줄? 철로가 두 줄이잖아. 한 발 더 나아가야지. 어머니는 날 대구에서 오는 저녁 통근차가 도착하는 시간에 낳았고, 동생은 서울 가는 첫 기차 시각에 낳았다고 했어. 기차는 우리의 일상에 이렇게 깊게 들어와 있었던 거지. 그렇다면 농담 한 마디.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나 처음으로 들은 소리는 어머니의 목소리가 아니라 기적 소리였을지도 모른다.내가 이 세상에 태어나 처음으로 들은 소리는 어머니의 목소리가 아니라 기적 소리였을지도 모른다.

여기까지가 거든. 그러면 에선?

기차의 이미지 그리움. 그리움은? 과거 지향적(어느 곳에서부터 왔잖아. 그러면 돌아가고 싶겠지 향수)이면서도 미래 지향적(어디론가 가잖아 열망). 두 가지를 동시에 품느라고 기찻길은 평행선인가?(말도 안 돼. 앞에선 두 줄을 그렇게 말하지 않았거든. 그런 식이라면 과거로 갈 땐 오른쪽 선을, 미래로 갈 땐 왼쪽 선을 달려야지. 그런데 기차가 왜 과거로 가? 항상 앞으로만 가니 미래로만 가는 게 아닌가?). 어쨌든 그런다 하고. 다시 돌아와서 기찻길이 아름다워 보이는 이유는 뭘까. 우리가 만나고 싶은 이들이 그 길 끝에 있기 때문일 것이다. 미래를 향해 찾아 가는 거야. 그것은 개척의 길. → 항해 → 내 남편. 야, 내 글이라고 그렇게 쓰면 독자가 욕하지. 텝포를 늦추고 일반화시켜서 우아하(의연하고 자신감 넘치는 어떤 남자의 이미지를 떠올린다. 대부분의 여자들이 기차 타기를 좋아하는 데는 그런 이유도 들어있지 않을까). 그리곤 그 위에 내 애길 살짝 얹는 거(대학 시절 남편과 연애담).그러고 보니 승에선 모두 추상적이네. 구체적이고 실체적인 것으로. 오라. 기차를 타면 대부분의 승객들이 졸아. 그들의 얼굴은 평온하더라구. 기차의자가 다 받아주기 때문이지. 오우케이, 한 건 건지고.

이젠 이다. 기차와 인생의 비유. 사색적이잖아. 그러면 기차로 비춰 본 내 인생은? 주의 사항. 잘난 체하지 말고. 나는 그저 달리기에만 급급했던 것 같다. 작고 이름 없는 역이라고 그냥 지나친 간이역은 또 얼마나 많았을까. 게다가 이것저것 잔뜩 이어 붙이는 바람에 나는 지금 너무 긴 기차가 되어 버렸다.

. 여운을 남기도록. 미학적으로 끝맺기.

 

오후에 건널목에서 동해남부선 기차를 만났다. 겨우 다섯 량의 객실만 이은 기차였다. 기차는 은빛 햇살을 받으며 마치 나비가 날아가듯 바다 쪽을 향해 팔랑팔랑 날아갔다. 나도 그렇게 산뜻하고 경쾌한 기차가 될 수는 없을까.

기차는 오늘도 그냥 지나가지 않았다.

 

결에서야 현실이 제시된다. 은빛 햇살, 나비, 바다, 팔랑팔랑, 산뜻, 경쾌. 이 단어들만으로도 기차는 바다 위로 날아갈 것 같지 않는가. 마지막 코멘트는 절창이로고.

독자들은 나의 건방진 어투 때문에 내가 이 글을 비웃고 있다고 오해할지도 모른다. 결코 그렇지 않다. 나와 이 작가와의 관계가 오래 되었고, 어떤 말을 해도 그 본의를 알아줄 수 있는 친구여서 비록 평일지라도 좀 재미있었으면 하고 건방을 떤 것이다. 나는 이 정도의 필력을 가진 수필가를 5명 이상 알지 못한다. 내가 이렇게 길고 길게 작품을 설명한 이유는 내가 그를 정말로 사랑하기 때문에 그의 문학에 결정적인 한 마디를 하고 싶기 때문이다. 정성화, 당신은 사람들이 흔히 말하는 교과서 작가 아닌가. 이젠 이런 글 그만 쓰자. 이 글은 완벽하다. 아름답고 의미심장하다. 그러나 그 아름다움은 회고적이고, 의미심장함은 상투적이다. 현실이 표백되어진 글은 이제 그만 쓰자. 현실은 쓴다고 해서 과거를 쓰지 말자는 것이 아니다. 과거가 과거로 머물러서는 안 되고, 과거를 말함으로써 현실을 말하는 것이다. 역사란 과거와의 끝없는 대화라고 했을 때 그 과거는 현실화된 과거다. 그래서 과거가 새로운 것이다. 이런 부탁을 할 수 있는 작가가 내 친구라는 게 그렇게 기쁠 수가 없다.

 

 

 

 

3일 간의 원초적 삶(에세이스트 29호 발췌)

김 인 숙

estel2159@hanmail.net

 

얼굴이 따사로웠다. 살며시 눈을 뜨니 따뜻한 아침햇살이 방 안 가득하다. 밖에서 자동차 소리가 들린다. 이제 내가 정신이 드는가?

4일 전 일이다. 아무데나 눕고 싶고 몸이 나른했다. 또 몸에 반란이 일어나려나? 잠시 쉬어가라는 신호 같아 일찍 자리에 누웠지만, 열이 오르며 온몸이 쑤셔왔다. 편도가 또 말썽부리려나 보다. 이러기 시작하면 목안 전체가 부어오를 것이다. 집에 혼자라는 생각이 들자 갑자기 두렵기 시작했다. 누군가에게 내가 아프다고 알리고 싶은데, 떠오르는 사람은 오직 돌아가신 내 어머니뿐이었다. 요즈음은 수시로 부모님 생각이 난다. 나이를 먹으면 어린애가 된다더니. 나는 얼른 성호를 긋고 성모님을 입속으로 불렀다.

얼마나 지났을까, 갈증을 심하게 느끼며 잠에서 깨었다. 온몸은 얼음에 싸여 있는 것처럼 추웠고, 걷잡을 수 없이 몸이 떨렸다. 그새 후두까지 부어올라 침을 삼킬 수도, 숨을 쉴 수도 없었다. 불덩이 같은 내 몸을 식혀야 하는데, 열만 내리면 이렇게 고통스럽지 않을 텐데……. 그렇다고 말짱한 정신으로 119구급차에 실려 가긴 싫었다. 그때 아스피린 생각이 났다. 2알을 물에 녹여 겨우 삼키고 이마에 찬 물수건을 얹었지만, 나도 모르게 끙끙 앓는 소리가 나왔다.

그렇게 자다 깨다를 반복하며 4일째 아침이 된 것이다. 완전히 열이 내리지 않아 입술은 말랐지만, 정신은 차릴 수 있었다. 그러니까 나는 21세기 문명 속에서 비문명인으로 3일을 산 것이다. 내 곁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나를 도와 줄 누군가도, 고통을 덜어 줄 약도, 병원으로 이동할 차 같은 것도 없었다. 물론 환자가 먹을 수 있는 음식도 없었다. 하지만 그것들을 내가 거부한 것은 아니다. 그저 캄캄한 적막 속에서 갈증이 느껴졌고, 입이 마르면 물을 마셨다. 아주 원초적인 것만 해결했을 뿐. 열에 들떠 앓는 것이 전부였으니까.

문명 이전, 그들이 몸을 추슬러 거처 밖으로 나왔듯이, 나도 혼자 몸을 추스르고 견디어 4일 만에 창문을 열었다. 공기가 좋았고 바람이 좋았다. 몇 달이나 지난 것처럼 감격스러웠다. 고개를 돌리니 건너편 창에 비친 내 모습이 가관이었다. 헝클어진 머리카락, 휑한 두 눈, 내 얼굴 위로 성별을 알 수 없는 비문명인 한 명이 겹친다. 손가락으로 머리카락을 비비꼬아 대여섯 가닥을 앞으로 내려 봤다. 이마에선 식은땀이 흘렀다. 다리가 휘청거리며 눈앞이 아물아물 흐려왔다.

남편에게 혼자 살 수 있다고 큰소리를 쳤었다. 서로가 미리부터 혼자 사는 연습을 해야 한다고 목울대를 돋우었다. 다가올 시간보다는 지나온 시간들을 돌아보며 살리라, 그렇게 작정을 하고 서울로 혼자 왔었다. 그러고는 팽팽히 조율되어 있었던 내 마음의 줄을 남김없이 풀었다. 오직 나만의 시간을 만들며 자유로움을 만끽했다. 내 마음에 드는 가구를 사고, 내 취향대로 집안을 꾸미고, 항상 부드러운 음악이 흐르게 했다. 내가 하는 일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방해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사는 것이 즐겁고 달콤했다. 사람들이 비웃겠지만 혼자여서 행복한 여인이 되었다.

3년이 지나고 4년이 되어간다. 읽었던 책을 읽고 또 읽었다. 작품 속에서 작가와 만나는 즐거움도 심드렁해졌다. 읽는 이가 없는 함량미달의 글을 왜 써야 하는지 그것도 자신이 없어졌다. 시간을 잃어버린 무력감. 그것은 미래가 없는, 과거에 집착 때문이 아닐지. 어제가 오늘 같고, 오늘이 어제 같은 나날들.

손으로 숟가락을 잡았지만, 다시 식탁에 내려놓고 싶었다. 꼭 이것을 먹어야 할까? 내가 씹는 소리가 귀로 들린다. 허기진 배를 채운다는 생각을 하니, 그 행위가 나를 더 외롭게 만들었다. 허나 혼자 살 수 있다고 큰소리쳤기에, 외로움도 혼자 삭여야 한다. 외로움이사 항상 나와 함께해 오지 않았던가. 새삼스러울 것도 없을 것.

라디오 FM을 눌렀다. 아름답고 경쾌한 리듬이다. 나는 오솔길을 걸으며 시냇물 소리를 듣는다. 내 감정은 맑아지고 그 하모니는 내 영혼을 편안함으로 이끈다. 독일 시인 실러는, 시간은 세 가지의 걸음걸이를 가지고 있다고 했다. 주저하면서 다가오는 미래, 화살처럼 날아가는 현재, 그리고 멈춰 서서 영원히 움직이지 않는 과거가 있다고 말했다.

시간은 지금도 나의 생각들을 훑으며 화살처럼 날아가고 있다. 문명이 숨 쉬는 병원으로 발걸음을 옮겨야겠다.

 

 

 

 

작품론) 김종완

 

「3일 간의……」의 최고 강점은 「기차는……」과 「난향……」에서 증발해 버린 현실이 복귀한 것이다. 화자는 갈급한 상황에 놓여 있다. 사회적 실존이 문제가 아니라 존재론적 실존이 문제다. 작년인가 <엄마가 뿔났다>라는 드라마가 장안에 화제를 일으켰다. 김수현의 반란이라고나 해야 할까. 현모양처인 엄마가 뿔이 나자 독립해서 집을 나온 것이다. 화자는 3년 전 서울로 올라왔다. 읍내 병원 사모님이 어느 날 독립을 선언하고 혼자 강남으로 옮겨 자리를 잡은 것이다. 왜 그랬을까? 물론 화자는 말하지 않는다. 다만 이런 막연한 암시만 있을 뿐이다.

 

남편에게 혼자 살 수 있다고 큰소리를 쳤었다. 서로가 미리부터 혼자 사는 연습을 해야 한다고 목울대를 돋우었다. 다가올 시간보다는 지나온 시간들을 돌아보며 살리라, 그렇게 작정을 하고 서울로 혼자 왔었다.

 

목울대, 지나온 시간을 돌아보며 살리라에서 독자는 짐작한다. 이건 한국의 가부장제에 대한 멋진 하이킥인 걸.

 

독립은 성공했다. 팽팽히 조율되어 있었던 내 마음의 줄을 남김없이 풀었다. 오직 나만의 시간을 만들며 자유로움을 만끽했다.” “사는 것이 즐겁고 달콤했다. 사람들이 비웃겠지만 혼자여서 행복한 여인이 되었다.

그러다 위기가 찾아왔다.

 

3년이 지나고 4년이 되어간다. 읽었던 책을 읽고 또 읽었다. 작품 속에서 작가와 만나는 즐거움도 심드렁해졌다. 읽는 이가 없는 함량미달의 글을 왜 써야 하는지 그것도 자신이 없어졌다. 시간을 잃어버린 무력감. 그것은 미래가 없는, 과거에 집착 때문이 아닐지. 어제가 오늘 같고, 오늘이 어제 같은 나날들.

 

화자는 위기의 원인을 알고 있다. 미래가 없는, 과거에 대한 집착. 위기의 원인을 알면 위기는 더 이상 위기가 아니다, 라고 한다. 정말 그런가? 위기인 줄 알면서도 해결방법이 떠오르지 않는다면 더 큰 위기 아닐까. 미래가 없다고 느끼는 가장 큰 까닭은 화자의 자연나이 때문일 것이다. 어쩌면 이것은 인간수명 백세를 누리는 우리세대 제 일의 과제일지도 모른다.

이런 심적 위기에 빠져 있을 때, 몸이 아프기 시작한다. 평생을 병원 사모님으로 살아온 사람이다. 당연히 조치를 취할 것이다. 그런데 그는 몸으로 그냥 때우기로 작정을 한다. 화자가 던지는 승부수다. 그녀는 과연 누구와 승부를 거는 걸까.

 

4일 전 일이다. 아무데나 눕고 싶고 몸이 나른했다. 또 몸에 반란이 일어나려나? (중략) 집에 혼자라는 생각이 들자 갑자기 두렵기 시작했다. 누군가에게 내가 아프다고 알리고 싶은데, 떠오르는 사람은 오직 돌아가신 내 어머니뿐이었다. 요즈음은 수시로 부모님 생각이 난다. 나이를 먹으면 어린애가 된다더니. 나는 얼른 성호를 긋고 성모님을 입속으로 불렀다.

 

스스로를 철저한 고독 속에 가두었다. 모든 관계를 끊었다. 그러자 나를 낳아준 엄마만이 남았다. 그 엄마라고 삶의 의미를 다 새겨서 아이를 낳았겠는가. 이 우주 생명어머니의 법칙에 따라 멋모르고 아이를 낳았고, 죽도록 사랑해서 길렀고, 그러다 먼저 가셨고, 이젠 내 차례. 나의 생명을 깃들게 하신 분이시여. 아들의 죽음을 그렇게 애통해 하시던 마리아여, 모든 이의 어머니인 성모 마리이여. 나를 당신의 품에 던지나이다. 그녀는 그렇게, 죽음 연습하듯 아팠다.

동굴 원시인들이 몸을 추슬러 거처 밖으로 나왔듯이 그녀는 삼일 동안 꼬박 아프고 사흘 만에 아파트 창문을 열었다. 그리고 그녀가 맨 처음 한 일은 그녀의 여성성의 확인이다.

 

고개를 돌리니 건너편 창에 비친 내 모습이 가관이었다. 헝클어진 머리카락, 휑한 두 눈, 내 얼굴 위로 성별을 알 수 없는 비문명인 한 명이 겹친다. 손가락으로 머리카락을 비비꼬아 대여섯 가닥을 앞으로 내려 봤다. 이마에선 식은땀이 흘렀다. 다리가 휘청거리며 눈앞이 아물아물 흐려왔다.

 

한 때 꽃보다도 더 예뻤던 시절이 있었다. 어찌 개화기만 호시절일까. 열매 맺고 그리고 잎 다 떨어뜨리고 몸에 수분마저 거의 다 내보내고 추운 겨울을 나는 인고의 삶 또한 의미있지 않던가. 숨 쉬어 온 날이 다 아름답지 않았던가.

부인할 수 없는 것이 몸이다. 언젠가 거추장스러울 때가 있으리라. 그때까지 함께 가야만 한다. 얻어 먹여서라도 함께 가야 하는 게 몸이다.

 

손으로 숟가락을 잡았지만, 다시 식탁에 내려놓고 싶었다. 꼭 이것을 먹어야 할까? 내가 씹는 소리가 귀로 들린다. 허기진 배를 채운다는 생각을 하니, 그 행위가 나를 더 외롭게 만들었다. 허나 혼자 살 수 있다고 큰소리쳤기에, 외로움도 혼자 삭여야 한다. 외로움이사 항상 나와 함께해 오지 않았던가. 새삼스러울 것도 없을 것.

 

빈손으로 혼자 왔다가 빈손으로 혼자 가는 게 인생이다. 그래서 허무하다고? 더 참을 수 없는 것은 고독하다고? 도망가지 마라. 눈 감지 마라. 두 눈 뜨고 삶과 대면하라. 그러면 언젠가 생이 축복임을 실감하게 되리라. 도둑같이 번개같이 그 순간이 찾아오리라. 그러기 위해선 먼저 살아야 할 터. 일어나라. 어서.

 

시간은 지금도 나의 생각들을 훑으며 화살처럼 날아가고 있다. 문명이 숨 쉬는 병원으로 발걸음을 옮겨야겠다.

 

 

 

출처 : 에세이스트
글쓴이 : 조정은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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