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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명인간 놀이-대구일보 본문
투명인간 놀이 / 이미경
질녀는 불러도 대답이 없었다. 나와 동생들은 투명 인간이 된 것 같아 씁쓸해졌다. 집안에 행사가 있어 4녀1남이 모이는 날은 세 돌이 지난 질녀의 몸값이 상종가로 치솟는다. 조카들만 있던 집안에서 질녀는 또 다른 재미를 주었기 때문이다. 우당탕거리며 몸 개그를 보여주던 조카들과는 달리 질녀는 깜찍한 애교나 귀여운 앙탈로 즐거움을 주었다. 우리들을 깜박 넘어가게 하는 질녀의 애교를 보기 위해 나는 질녀에게 여왕보다 더 극진한 대접을 해야만 했다. 날이 갈수록 질녀의 콧대는 높아가더니 드디어 우리를 못 본 체 하는 경지에 이르렀다. 그림책에 빠진 척하는 질녀에게 내가 큰소리로 말했다.
“우리 민이가 어디 갔을까? 고모가 선물을 가지고 왔는데.”
지금까지 미동도 하지 않던 질녀가 고개를 들었다. 순간 우리들의 눈빛이 허공에서 왔다갔다. 계획된 일은 아니었지만 놀이는 그렇게 시작 되고 있었다. 말은 하지 않아도 우리들은 놀이의 규칙을 잘 알고 있었다. 절대로 눈이 마주쳐도 안 되고 부딪쳐도 모른척해야 하며 특히 질녀가 애교스런 목소리로 부를 때는 더 주의해야 한다는 것을.
민이가 안보여 걱정스럽다는 내게 질녀는 쪼르르 달려와 내 앞에 제 얼굴을 디밀었다. 방긋이 웃는 그 모습이 어찌나 앙증맞은지 나도 모르게 질녀를 향해 손을 내밀고 말았다. 놀란 동생이 턱짓을 했다. 그때서야 질녀를 못 본 척하며 체조하는 시늉으로 위기를 모면했다. 식탁 위에 있는 과자를 치우던 첫째동생이 민이를 주려고 산 것인데 보이지 않는다며 과자를 먹기 시작했다. 뜨악한 표정으로 질녀는 작은 소리로 헤헤 웃음소리를 내어보였다. 못 들은 척 과자를 먹는 고모가 이상했는지 질녀의 표정이 차츰 굳어갔다. 둘째 동생은 한 술 더 떠 민이가 없어진 것 같다며 이방 저 방으로 찾고 다녔다. 울먹이는 표정으로 질녀는 둘째동생의 뒤를 따라가며 고모, 고모하다 울음을 터트렸다. 급기야 제 설움을 못 이기겠다는 듯 드러누워 대성통곡을 해댔다. 질녀는 그렇게 자신의 존재를 알렸고 우리는 웃으면서 투명인간 놀이를 끝내었다.
어린 시절 투명인간을 꿈꾼 적이 있었다. 영국의 작가 웰스가 쓴 투명인간을 읽고 난 후 였다. 자신이 남에게 보이지 않는다는 소설 속의 설정은 참 매력적이었다. 고무줄놀이를 하고 있을 때 고무줄을 끊어가는 남자애를 혼낼 수도 있고 무엇보다도 내게 금지된 행동을 할 수 있을 터였다. 그 시절 투명인간이란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자유를 얻는 것으로만 보았다.
어른이 된 나는 가끔 투명인간이 되곤 한다. 아니 어쩌면 세상이 투명인간 놀이에 빠져 있는지도 모르겠다. 의견을 도전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의 무리 속에서 나는 투명인간이 되기도한다. 그리고 알수 없는 인간들의 흔적이 가득한 컴퓨터 통신망에서 투명인간들과 만나기도 한다. 지하철 안에서는 혼자 인양 큰 소리로 통화하는 사람, 제 눈 하나 질근 감으며 모든 일을 모르쇠로 해결하려는 풍경을 연출하는 사람도 있다. 특히 승강기 안은 투명인간 놀이의 절정 판이다. 사람들은 승강기를 타면 벽면의 거울에 제 얼굴을 비춰보느라 바쁘다. 물론 이런 행동들이 타인을 의식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계면쩍거나 편하기 위해서 하는 행동일 수도 있다. 하지만 이러한 결과로 사람들을 정말 투명인간이 되어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어른이 된 후에 안 일이지만 투명인간은 망막 역시 투명하기 때문에 아무런 상도 맺지 못한다. 소설속의 설정과 다르게 투명인간은 장님과 같아 사물을 볼 수 없는 것이다.
어차피 사람살이라는 게 사람으로 시작해서 사람으로 귀결되는 여정이 아니던가. 질녀가 울음으로 존재를 알렸듯이 우리도 인간들에 대한 최소한의 관심으로 서로 존재를 알리면 어떨까. 세상은 투명인간 놀이보다 재미있는 것이 훨씬 많은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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