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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가 이미경의 블로그 입니다

주목작가 이미경-문장 가을호 본문

푸른 노트

주목작가 이미경-문장 가을호

소금인형 2013. 8. 29. 12:20

 

 

 

 

 

작가 노트

 

관계란 참 묘하다. 만난 기간이 길다고 해서 반드시 친밀한 것도 아니고, 내가 가깝다고 생각해도 상대방은 아니라고도 할 수 있다. 그래서 관계설정은 늘 헷갈리기 일쑤다.

수필과 나의 관계도 예외는 아니다. 이 정도의 세월이면 이제 수필에 대해 어느 정도 알 것도 같지만, 아직도 내게는 양파 같은 존재여서 그 주위를 공허하게 맴돌고 있다.

내게 문학의 끈을 쥐여준 이는 아버지이다. 내 기억의 시작은 아버지의 팔베개를 베고 소월의 시 산유화를 들으며 잠들던 네 살 때의 장면이다. 아주 오래된 일이지만 감미로운 느낌에 싸여 잠이 들곤 했었던 기억은 늘 현재형이 되어 내 가슴에서 숨 쉬고 있다.

내가 태어나던 해에 방송국 신춘드라마 공모에 입선한 적이 있는 아버지는 평생 쓰는 일을 게을리하지 않으셨다. 산유화만큼 많은 소재로 라디오 대본을 쓰셨고 그 일을 그만둔 뒤에도 시를 쓰고, 편지를 쓰고, 일기를 쓰셨다. 지금 내 방에는 아버지께서 유품으로 남기신 방송 대본 몇 권과 아버지의 삶이 빼곡히 적힌 스무 개의 수첩이 작은 상자에 담겨있다. 이제 아버지의 상자에는 아버지의 꿈이, 문학이 더는 자라지 않는다. 요즘 들어 그 상자를 바라볼 때마다 글과의 관계를 좀 더 쫀득쫀득하게 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관계란 게 저절로 아름답게 영위되는 것이 아니라 마음 쓴 만큼 정성을 들인 만큼 굳건히 유지될 터인데 지금껏 문학과 적당한 거리를 두며 평행으로 걸어왔음을 고백한다.

얼마 전 백두산 천지를 다녀왔다. 천지는 운무로 가득해 한 치 앞을 볼 수 없었다. 8월임에도 바람이 미친 듯이 불어댔다. 나는 고도를 기다리는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처럼 천지를 봐야 한다는 절실함과 천지를 못 보고 돌아갈지도 모른다는 불안을 반복하면서 그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다. 지루하리만큼 바람은 운무를 몰고 다니며 비까지 뿌렸다. 추위에 지칠 그때쯤이었다. 아주 짧은 순간 바람이 운무를 몰아내고 천지 주변을 에워싸고 있는 바위산이 순간적으로 보였다 사라졌다.

세상에 공으로 얻어지는 것은 없다. 반짝이는 한편의 글이 되기까지 비바람이 동반되고 우렛소리에 놀라기도 하다 보면 아주 짧은 시간 천지의 바위산이 보였듯 수필이란 멋진 길도 열릴 것이다. 그렇게 평생을 메우고 견디며 묵묵히 이 길을 걸어가리라.

지천명이 되고 보니 글 몸살 한번 심하게 앓지 않고 글을 써왔다는 게 새삼 부끄럽다. 아주 가끔이지만 어려서 들었던 아버지의 자장가였던 산유화가 환청처럼 들려 잠이 깰 때가 있다. 눈을 뜨면 어김없이 창은 희뿌옇게 밝아오는 새벽이었다. 세상에는 산에 피는 꽃만큼 다양한 사람들이 다양한 삶을 엮으며 살고 있으니 그것들을 품고 어루만지며 쓰기를 게을리하지 말라는 아버지의 당부 같기도 해서 글 몸살을 심하게 앓아야 할 것 같다는 조바심이 요즘 든다. 돌이켜보니 내 삶은 바람 없는 호수처럼 심한 굴곡이 없었다. 그래서 기억조차도 가난하지도 부유하지도 않은 진공 속이다. 이제 진공의 기억 속에 싱크홀 하나를 만들어 볼까 한다. 진공 속 기억들을 싱크홀에 호명하여 마주며 다시 조명해 보고 싶다.

영화 적벽 대전에서 기억에 남는 장면은 주유와 제갈량이 거문고를 치는 장면이었다. 중후하면서 격양된 듯 울리는 거문고 소리로 서로 소통하는 대목은 최고였다. 말을 하지 않아도, 그저 지켜보고 있어도, 삶이, 일상이, 행동이 말이 되어 소통되는 관계.

도대체 얼마만큼의 세월이 흘러야 내 안으로 들어오는 것들이 감동적인 글로 표현이 될까?

아마도 그게 내가 평생 풀어야 할 숙제이며 업보일 것이다.

 

갈등 / 이미경

 

 

장례식장으로 향하는 길목에는 가을 햇살이 가득하다. 태나서 죽고 괴로워하고 즐거워하는 일은 가을볕 마냥 억겁 속에 되풀이되어온 자연스러운 일이지만 마흔도 안 된 그녀의 부고는 뜻밖의 일이다.

 

남편은 내 신앙생활의 시작을 못마땅해했다. 친척 아주머니의 광신적 믿음으로 가정이 깨어지는 것을 본 어린 시절의 기억 때문인 듯했다. 농사일도 내팽개친 채 바깥으로만 떠돌다 사라진 아주머니와 술로 지새우던 그녀의 남편, 그리고 땟국이 졸졸 흐르던 친척 동생들의 슬픈 모습을 실루엣처럼 떠올렸는지도 모르겠다.

둘째 아이가 학교에 들어가자 종일을 코끝에서 단내나게 종종걸음치던 시간이 엿가락처럼 늘어지며 틈이 생겼다. 그 틈은 무성한 잎사귀를 떨쳐낸 겨울나무처럼 헛헛함을 자주 느끼게 했다. 알 수 없는 허기를 채우기 위해 많은 사람을 만나고 취미생활도 해 보았지만 마찬가지였다. 가을빛이 마냥 좋던 날, 무작정 걷다가 이른 곳은 성당 뜰이었고, 성가대의 노랫소리에 안식을 얻은 나는 그 날 이후 믿음을 갖게 되었다.

일 년에 한 번 등()을 다는 것이 신앙의 전부였던 시어머니 모습에 익숙해져 있던 남편은 종교 생활에 수반되는 봉사활동이나 기도 모임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런 일로 가끔 집 비우는 일이 생기자 아이들이나 가정에 소홀해질까 은근히 촉각을 곤두세웠다. 내가 선택한 일에 대해 충실하면 할수록 남편과 충돌하는 일이 잦아졌다. 가정평화와 신앙 모두를 놓치고 싶지 않았던 나는 갈등했고, 그 갈등이 절정에 달하였을 때 그녀를 만났다. 그녀는 오빠와 언니가 성직자이며 본인도 그 길로 가다가 적성에 맞지 않아 그만두고 결혼했다고 했다. 신앙의 뿌리가 깊은 것 같아 나는 가끔 내 속내를 그녀에게 털어놓았고 그때마다 그녀는 가정이 우선이라며 현명하게 대처하는 방법을 일러주고 다독여 주었다. 그녀의 말대로 나는 주말이면 남편의 스케줄을 먼저 묻고 집안일에도 더 많은 신경을 썼다. 그러자 남편도 차츰 내 종교 활동을 묵인해 주었다. 몸은 피곤했지만, 마음은 평온한 나날이었다.

삶이 평화로 충만해 보일 때 그녀를 찾았다. 그러나 웬일인지 그녀의 모습을 좀처럼 성당에서 볼 수 없었다. 이사를 하고 교적 정리를 하기 위해 다니던 성당으로 가다가 우연히 그녀를 만났다. 이사를 했다는 말과 그동안 고마웠다는 말을 했다. “보기 좋네요. 신앙생활 열심히 할 거죠?” 진심으로 기뻐했던 것이 그녀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하얀 국화꽃으로 장식된 사진 속에서 그녀는 엷게 웃고 있다. 지금 생각하니 생전의 그녀

웃음에는 묘한 쓸쓸함이 묻어 있었던 것 같다. 문상하기 위해 빈소로 들어가려는데 안내하던 아주머니가 옆방으로 가라고 한다. 무슨 일인가 싶어 잠시 당황했다. 두 눈을 크게 뜨고 다시 영정을 쳐다보았다. 그녀의 빈소가 틀림없으나 무언가 의아심을 느끼며 옆방으로 향했다. 황량하기 그지없는 사각의 공간에 그녀의 또 다른 빈소가 있었다. 조금 전에 본 것과 똑같은 사진 속의 그녀가 말없이 나를 바라본다. 꿇어앉아 두 손을 모우고 산 사람이 죽은 이를 위해 해줄 수 있는 것이 고작 기도밖에 없다는 현실에 절망하며 멍하니 앉아 있었다.

젊은 사람이 병으로 가서 그런가 초상집이 너무 냉랭하구먼.” 누군가 소곤거리는 소리에 고개를 들어 주위를 둘러본다. 그러고 보니 이상하다. 여느 상갓집처럼 음식을 먹거나 술을 마시는 문상객도 보이지 않고 빈소가 두 개였다는 생각이 스친다.

상주들은 다 어디로 간 걸까?’ 서둘러 연도를 마치고 그곳을 나왔다.

장례식장은 문상을 마친 이들로 왁자지껄하다. 죽은 이들에 대한 회상만이 살아 있는 는 자의 위로가 되기라도 하듯이 그들은 끊임없이 이야기한다. 그녀의 사연을 아는 이를 행여 만날까 하여 두리번거리는데 그녀의 친정 노모와 나누는 수녀님의 이야기가 들려온다.

아직도 성당에서의 장례미사를 허락하지 않고 있는지요?”

그쪽도 워낙 불심이 깊은 집이라 불교식으로 하기를…….”

아이고 불쌍한 것. 마지막 가는 길이라도 편하게 해 줄 일이지.”

빈소를 하나 더 마련한 것이 우리를 위한 배려인 척하지만 실은 우리 쪽 문상객이 보기 싫다는 표현인 걸 안다며 노모는 흐느꼈다.

바위만 한 갈등에 깔려 신음조차 못 했을 그녀 앞에서 내 손에 박힌 가시 하나가 더 아프다고 호들갑 떨었던 시간이 마음에 걸린다. 설령 그녀의 고통을 알았다 한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 있었으랴. 같은 갈등이었건만 그녀의 아픔을 알지 못함이 내 상처만 핥던 좁은 식견인 것 같아 가슴이 아리다. 모태신앙인이었던 그녀는 온몸으로 퍼지던 암보다도 단 하나의 믿음만을 강요하는 인간의 이기심이 더 고통스러웠으리라. 하얀 국화꽃으로 장식된 그녀는 여전히 엷게 웃고 있다. 갈등이란 산자의 몫이라 듯 이승의 풍경을 빠져나간 그녀는 그저 웃고만 있다. (2006년 수필세계 등단작)

 

 

고부 / 이미경

 

남편에게는 자랑처럼 생색내는 것이 하나 있다. 남들은 몇 년에 한 번 갈까 말까 한 제주도를 만사 제처 놓고 일 년에 두세 번씩은 데리고 가지 않느냐는 것이다. 그러면서 시집 하나는 잘 온 게 분명하다는 뒷말을 붙이는 것도 잊지 않는다. 본댁이 제주인데 그렇게 능청스러울 수가 없다. 나는 대답 대신 작은 웃음을 보낸다. 내 맘을 알 리 없는 남편은 그 말에 대한 긍정인 웃음인 줄 알았는지 한술 더 보탠다. 자기를 만나기 전까지는 제주도 구경은 못 했을 거라고 한다. 맞는 말이다. 그렇지만 내가 미소를 지은 진짜 이유는 따로 있다. 고추당초 보다 맵다는 시집살이와 고부갈등이 없기 때문이다.

폐백인사가 끝나자 맏동서인 형님은 빈방으로 나를 안내했다. 실내 장식이라곤 궤짝밖에 없는 것으로 봐서 평소에 창고용도로 쓰는 방인 것 같았다. 혼자 있으니 긴장이 풀리면서 스르르 눈꺼풀이 내려앉았다. 나도 모르게 꾸벅꾸벅 졸고 있는데 굵고 억센 목소리가 또렷이 들렸다. ‘폭삭 속아수다눈꺼풀이 놀라서 제자리로 돌아갔다. 궁금해진 나는 창호지가 발린 문틈으로 살짝 밖을 내다보았다. 어머님이 뒷정리를 끝내고 돌아가는 아주머니들에게 답례품을 나누어 주고 계셨다. 그러면서 폭삭 속아수다라는 말을 계속하시는 것이었다. 답례품을 받은 하객들은 위로의 말이라도 하는지 뭐라고 한마디씩 하셨다. 경사스런 결혼식 날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기에 저리도 속았다는 말을 계속하시는 것인지 두려움이 밀려왔다. 그렇지 않아도 폐백인사를 드릴 때 친척 어른께 폭삭 속아수다를 들은 후로 내 신경은 곤두서있었다. 나는 아침부터 지금까지의 시간을 쫙 펼친 후 다시 하나하나 짚어 나갔다.

결혼식을 마치고 피로연을 하기 위해 시댁으로 돌아오니 마당에서는 벌써 잔치가 벌어지고 있었다. 두레상에 음식을 차려 나르는 아주머니들과 하객들의 소리가 뒤섞인 마당 풍경은 장터를 방불케 했다. 삼삼오오 모여 앉은 아낙들은 알 수 없는 수다를 주고받으며 목젖이 보이도록 웃다가 내가 보이자 주위로 몰려왔다. 그리고는 소금과 팥을 뿌렸다. 잡귀를 물리치기 위한 의식인 것 같았다.

방으로 들어온 나는 드레스를 입은 채로 상을 받았다. 신부상이라고 했다. 웨딩케이크를 중심으로 수많은 음식이 색색의 과일과 꽃으로 장식되어 있었다. 고명으로 쓰인 귤의 새콤달콤한 맛과 딸기의 상큼한 맛이 코끝으로 전해졌다. 시골이라는 것이 믿기지 않을 만큼 화려한 밥상에 시장기는 돌았지만 불편한 옷 때문에 먹는 시늉만 했다.

상을 물리고 한복으로 갈아입었다. 친인척들에게 폐백인사를 드리기 위해서였다. 어머님께서는 절을 할 때마다 절 받은 분과 나와의 관계를 열심히 설명하셨지만 머리에는 하나도 들어오지 않았다. 다리가 아파 올 때쯤 허연 수염을 기르신 어른께 절을 올렸다. 치맛자락이 발에 밟혀 엉덩방아를 찧을까 걱정하고 있는데 그 분이 폭삭 속았다는 말을 하셨다. 나에게 한 말인지 어머니께 한 말인지는 분명하지 않았지만 폭삭 속았수다라는 그 말이 절하는 내내 머릿속에서 뱅뱅 돌았다. 절을 올려야 할 사람들이 얼마나 많던지 현기증이 나며 다리가 후들후들 떨릴 때쯤에야 폐백인사는 끝이 났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짚이는 게 없었다. 그렇다면 뭘 오해하고 계시는 걸까. 철이 없었던 나는 물설고 낯선 곳에 덩그러니 남겨진 것 같아 눈물이 볼을 타고 흘렀다. ‘폭삭 속았수다.’ 라는 말이 수고하셨습니다.’ 하는 제주 방언인 것을 안 것은 한참이 지난 뒤였다.

결혼 초에는 시댁 어른들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는 나는 방긋방긋 웃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어머님은 며느리를 위해 천천히 아주 열심히 가르쳤지만 설명하는 단어가 죄다 제주도 말인지라 못 알아듣기는 마찬가지였다. ‘감제를 가져오라는 어머니 말에 발음이 비슷한 감자를 갖다 드리면 어머니는 아무런 말없이 당신이 고구마로 바꾸어 가져오셨다. 제주도에서는 감자를 지슬이라고 하고 고구마를 감제라고 말한다는 것을 체험으로 익힐 수밖에 없었다. 이렇듯 신라 며느리와 탐라국 시어머니 사이에는 의사소통이 불가능했으니 고부간의 갈등이 끼어들 리 만무했다.

세월이 두께가 쌓이면서 제주도 말을 조금은 알아듣게 되었다. 하지만 어머니와 나 사이를 바다가 또 가로 막고 있었다. 물리적인 바다야 비행기로 한 시간이면 건널 수 있는 거리지만 삶에서 느끼는 심리적인 바다는 멀고도 멀었다. 그러다 보니 서로 상대방에 대한 형식적인 예의와 배려로 고부관계가 형성되었다.

어머니는 일 년에 몇 번 오지 않는 며느리를 손님처럼 맞이했다. 집안은 늘 깨끗이 청소되어 있었으며 냉장고에는 찬거리로 가득했다. 시골 살림이라는 게 웬만큼 닦아서는 눈에 띄게 표시가 나지 않는다. 며칠 전부터 바쁜 농사일 틈틈이 윤이 나도록 청소를 하셨을 마음을 알기에 나도 성심성의로 어머니를 대했다. 순박하게 늙어가는 촌부의 아내인 어머니를 존경했고 줄 것이 없어 못 줘 미안해하는 어머니를 사랑했다. 어머니 또한 낯선 시댁 문화를 군말 없이 따라주는 며느리를 귀여워하셨다.

친구들이 모이면 그들 중 누군가가 시집살이 이야기를 할 때가 있다. 시집에 대해서는 너나없이 주거니 받거니 하며 목소리를 높이기가 일쑤다. 남편을 가운데 놓고 시어머니와 밀고 당겨본 경험이 없는 나는 딱히 할 말이 없었다. 그저 친구의 말에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평범한 시어머니에 평범한 며느리가 만났음에도 고부갈등이 없는 특별한 나를 친구들은 부러워했다.

나이가 어느 정도 들고 보니 갈등이 깊었던 친구일수록 시어머니에 대한 연민도 깊었다. 미움도 정이라고 때로는 모자람 때문에, 때로는 너무 넘침 때문에 상처를 주고받았던 날들을 아파하고 안쓰러워했다. 서로 늙어가는 눈을 바라보며 여자로서의 동질감을 느끼는 듯했다.

해풍을 많이 맞거나 일교차가 큰 곳에서 자란 과일이 단단하며 맛과 향이 좋다고 한다. 사람 관계 또한 좋았다 나빴다 하며 시나브로 든 정이 고부간의 깍듯한 배려보다 못하지는 않을 것 같다. 어찌 보면 세상의 진정한 맛이란 사랑과 미움, 이해와 오해, 기쁨과 슬픔 같은 대립 항들의 굴곡진 조화 속에서 만들어지는지도 모를 일이다. 달기만 하거나 쓰기만 한 것보다는 달고 쓰고 짜고 맵고 신 것이 어우러진 맛에 더 묘한 감흥이 있지 않은가.

뒤돌아보면 나와 어머니의 관계는 말이 통하지 않으니 갈등도 없었고 깊은 정도 없었다. 그러기에 얼었다 녹았다 하면서 맛과 색이 골골하게 오른 친구의 고부관계를 한번 쯤 부럽다고 말하면 과욕이라고 나무랄지도 모르겠다.

뭔가가 잘못 되었다면 바꾸거나 고치면 되는 게 세상일이다. 하지만 되돌릴 수 없는 것이 있는 것 또한 세상일이다. 어머니는 몇 해 전 자그마한 유택으로 거처를 옮기셨다.

 

 

 

작전주 /이미경

 

 

한동네에 사는 친구가 오랜만에 놀러 왔다. 그녀는 오래전부터 컴퓨터로 주식거래를 한다. 주식을 사서 단기적으로 팔아 시세 차익을 보는데 수입이 짭짭하다고 했다. 한창 수입이 좋을 때에는 외국여행을 다녀오기도 했고 명품 가방을 자랑하기도 했었다.

그런 친구를 보며 나도 혹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귀차니즘이 있는 터여서, 종일 햇빛도 보지 못하고 컴퓨터와 씨름해야 한다는 사실에 생각을 접었다. 그런 나에게 친구는 돈맛을 몰라서 그런다며 쓴소리를 했었다. 그런 친구도 승승장구만 한 것은 아니었다. 주식의 속성인 변동성을 어르고 달래며 자주 롤러코스터를 탔다. 친구의 삶을 그래프로 그리면 높고 험한 봉우리가 세 개로 그려지건만 여전히 주식을 버리지 않는다.

얼마 전 친구는 주식에 관한 고급정보를 가지고 있다며 여윳돈이 있으면 투자하라고 넌지시 말했다. 은행 이자보다는 몇 곱절 불려 주겠다는 것이다. 이미 내가 돈이 있다는 것을 알고 한 말이기에 대답할 말이 딱히 없었다. 그때 조상신이 돌보기라도 한 듯 신문에 쓰인 글자가 확 내 눈에 들어왔다. ‘저평가된 우량주’, 나도 모르게 저평가된 우량주에 묻어두었다는 말로 빠져나갔었다.

커피를 마시면서 친구의 얼굴을 보니 다크써클이 배꼽까지 내려와 있다. 무릎 나온 바지를 손가락으로 누르며 작전주를 사서 낭패를 보았다고 했다. 고급정보를 가지고 있다더니 작전 세력에 말려들었던 모양이었다. 얼마 남지 않은 돈으로 주식거래를 한다는 것을 알기에 친구에게 곱게 눈을 흘겼다.

넌 어째 작전주에는 그렇게도 약하냐?” 친구의 남편을 두고 한 말이었다.

커피를 마시던 친구가 풋 웃었다.

이십 년도 더 된 이야기이다. 증권회사에서 근무하던 친구는 고객이었던 한 남자에게 마음을 빼앗겼다. 훤칠한 키에 잘 생긴 남자였다. 남자는 많은 돈을 투자하진 않았다. 주식을 배우는 중이라며 친구에게 조언을 구한다며 다가왔다. 그녀가 남자에게 반한 건 잘 생긴 외모 탓도 있었지만, 목소리 때문이라고 했다. 무뚝뚝한 경상도 말이 아니라 배속같이 사근사근한 목소리로 서울말을 쓴다고 했다. 그의 목소리를 들으면 바람이 먹구름을 몰고 가듯이 기분이 환해진다며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얼마 후 그들은 사랑에 빠졌다. 남자는 가끔 우리 모임에 나와 밥값을 내 주기도 하고 영화관도 같이 갔다. 주말이면 자가용에 우리를 태우고 근교로 나들이도 갔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옆에 있다는 이유로 꽃이나 액세서리 같은 선물도 자주 받았다. 그녀는 친구들 사이에서 선망의 대상이 되었고 그 때문에 열렬했던 한 쌍이 비교를 당해 결별을 하기도 했다.

친구의 시작은 모든 것이 순조로웠다. 두 사람이 살기에는 넓은 아파트에 신혼에 쓸 살림들을 채우기에 바빴다. 결혼식도 고급스러웠다. 턱시도를 입은 영화배우 같은 남편 옆에 서울에서 바로 가져왔다는 드레스를 입은 친구는 엄지공주 같았다. 결혼식 내내 엄지공주의 입 모양이 상현달인 것을 보고 많이 부러워했다.

친구는 결혼하면 회사를 그만둘 거라는 말을 입버릇처럼 했다. 꿈이 화가였다면서 그림공부를 할 거라고 했다. 이상적인 만남이란 서로의 꿈을 존중하고 격려하는 관계라 막연하게 생각한 나였기에 그들의 결혼을 진심으로 축하했다. 그때는 정말 잘 어울리는 한 쌍으로 보였다.

손가락에 묻은 물방울을 탁탁 튕기며 살 것 같았던 친구는 회사를 계속 다녔다. 증시가 상한가를 치던 시절이라 회사를 그만두기가 아까울 거로 생각했다. 세월이 흘러도 그녀의 살림살이는 변화가 없었다. 다른 친구들은 전세를 살다 집을 사고, 평수를 늘려 이사를 하는 동안에도 그녀의 살림살이는 그대로였다. 내 허리에 슬금슬금 군살이 붙는 동안 그녀 얼굴에는 기미가 짙어갔다.

하루는 친구가 와서 제 발등 제가 찍었다며 눈물 콧물을 뺐다. 신혼여행을 다녀온 후 회사를 그만두겠다고 했더니 남편이 말리더란다. 자가용도 집도 심지어 결혼비용도 다 빚이라고 했다. 빚이란 것이 자신에게 갖다 주느라 진 것이니 누구를 원망할 수도 없는 노릇이라 했다. 작전주에 말려들어도 지독하게 말려든 것 같다며 펑펑 울었다.

얼마 후 친구는 구조조정으로 명퇴했다. 퇴직금 중 일부는 자신의 비자금이라며 나에게 맡겨 놓고 나머지 돈은 남편의 사업 자금으로 주었다. 잘생기고 정 많은 친구의 남편은 사업에 소질은 없었다. 다시 조그만 기업체에 취직했고 친구는 나에게 맡겨 놓았던 돈으로 주식거래를 시작했다. 한동안은 웬만한 봉급생활자보다 더 많은 수익을 올렸다. 그러다가 몇 년간은 오르막과 내리막을 반복하더니 결국 지금까지 빚을 안고 있다. 높은 산을 몇 번 넘은 사람에겐 낮은 산은 언덕쯤으로 보이나 보다. 친구는 삶이 조금 힘들지만 견딜만하다고 했다. 세상에는 폭력남편, 바람피우는 남편도 있는데 자신의 남편은 잘하고 싶은데 운이 따라주지 않는 착한 남편이라며 쑥스럽게 웃었다.

어찌 보면 우리는 모두 살아 움직이는 작전주 인지도 모른다. 남들보다 돋보이고 싶어서 명품으로 치장하고 그럴듯한 말로 달콤하게 속삭인다. 때로는 가짜가 진짜인 척 유혹하기도 한다. 작전주들이 유령처럼 떠다니는 어수선한 공간에서 삶을 영위하며 울기도 하고 웃기도 하니 세상은 참 요지경 속이다.

무심한 얼굴로 창밖을 보던 친구가 말한다. “넌 참 복도 많다.” 여전히 파도 타는 삶을 살아야 하는 친구로서는 권태로울 만큼 잔잔히 사는 내 모습이 부러운 모양이다.

넌 이게 단순히 복으로만 보이니. 이건 전생에 나라를 구한 공에다가 작전주를 피하는 방법을 피땀 나게 연구한 내 노력의 결과라고 말할 수 있지

나는 웃으며 농담을 했다. 그러자 이번에는 친구가 곱게 눈을 흘기며 말한다.

뻥치고 있네.’

 

 

문장.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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