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록시읽는 기쁨 (46)
수필가 이미경의 블로그 입니다
간통 - 문인수 이녁의 허리가 갈수록 부실했다. 소문의 꼬리는 길었다. 검은 윤기가 흘렀다. 선무당네는 삼단 같은 머리채를 곱게 빗어 쪽지고 동백기름을 바르고 다녔다. 언제나 발끝 쪽으로 눈 내리깔고 다녔다. 어느 날 이녁은 또 샐 녘에사 들어왔다. 입은 채로 떨어지더니 코를 골았다. 소리 죽여 ..
봄날 오후 -김선우 늙은네들만 모여 앉은 오후 세 시의 탑골공원 공중변소에 들어서다 클클, 연지를 새악시처럼 바르고 있는 할마시 둘 조각난 거울에 얼굴을 서로 들이밀며 클클, 머리를 매만져주며 그 영감탱이 꼬리를 치잖여-징그러바서, 높은 음표로 경쾌하게 날아가는 징·그·러·바·서, 거죽..
자살/ 류시화 눈을 깜박이는 것마저 숨을 쉬는 것마저 힘들 때가 있었다 때로 저무는 시간을 바라보고 앉아 자살을 꿈꾸곤 했다 한때는 내가 나를 버리는 것이 내가 남을 버리는 것보다 덜 힘들 것이라고 생각했다 나무가 흙 위에 쓰러지듯 그렇게 쓰러지고 싶었다 그러나 나는 아직 당신 앞에 한 그루..
해감 / 고영민 민물에 담가 놓은 모시조개처럼 눈을 감고 있었다 몇번을 소리쳐 부르자 당신은 간신히 한쪽 눈을 떠보였다 눈꺼풀 사이 짠 물빛이 들었다 마지막으로 당신은 나를 제 몸 속에 새겨 넣겠다는 듯 오랬동안 쳐다보았다 그르렁, 그르렁 입가로 한 웅큼의 모래가 토해졌다 간조선을 지나 들..
1월 / 오세영 1월이 색깔이라면 아마도 흰색일 게다 아직 채색되지 않은 신의 캔버스 산도 희고 강물도 희고 꿈꾸는 짐승 같은 내 영혼의 이마도 희고 1월이 음악이라면 속삭이는 저음일 게다 아직 트이지 않은 신의 발성법 가지 끝에서 풀잎 끝에서 바람은 설레고 1월이 말씀이라면 어머니의 부드러운 ..
이정록 신랑이라고 거드는 게 아녀, 그 양반 빠른 거야 근동 사람들이 다 알았지. 면내에서 오토바이도 그중 먼저 샀고, 달리기를 잘해서 군수한테 송아지도 탔으니까. 죽는 거까지 남보다 앞선 게 섭섭하지만, 어쩔 거여, 박복한 팔자 탓이지. 읍내 양지다방에서 맞선보던 날, 나는 사카린도 안 넣었는..
폭설 - 오탁번 三冬에도 웬만해선 눈이 내리지 않는 남도 땅끝 외진 동네에 어느 해 겨울 엄청난 폭설이 내렸다 이장이 허둥지둥 마이크를 잡았다 -주민 여러분! 삽 들고 회관 앞으로 모이쇼잉! 눈이 좆나게 내려부렸당께! 이튿날 아침 눈을 뜨니 간밤에 또 자가웃 폭설이 내려 비닐하우스가 몽땅 무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