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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절초/ 김애자 본문
구절초/ 김애자
산밭으로 깻잎을 따러 가는 길에 구절초를 보았습니다. 올 여름 태풍에 둔덕이 반쯤 떨어져나간 벼랑 끝에서 외롭게 핀 꽃이었습니다. 한 뿌리에 몸을 맞대고 지내던 살붙이들은 퍼 붓는 빗줄기를 견디지 못하고 무너지는 흙더미에 깔려버리고 저만 어렵사리 살아서 핀 꽃이, 어쩜 그리도 애잔한지 눈물이 나고 말았습니다.
산그늘이 고요히 내려와 앉습니다. 뒷산에선 아까부터 “계집죽고 자식죽고” 산비둘기가 청승을 떨어댑니다.
홀아비새로도 불리는 산비둘기가 우는 저 산 너머에는 지난 초여름에 아내를 잃은 윤씨가 혼자 살고 있습니다. 부인에게 약 한 첩, 주사 한 대도 좌주지 못하고 속절없이 저승길로 보낸 지 일 년 반이 되었습니다.
지난해 모내기철이었습니다. 남편이 떡국을 좋아하여 장터 방앗간에서 가래떡 한 말을 뽑아 마을버스를 타고 집으로 들어왔습니다. 하지만 집으로 가려면 이번에는 오르막 오리 길을 걸어야 함으로, 머리에 임을 이고 걷기보다는 등에 지는 편이 수월했습니다.
햇볕은 내리쬐고 등에 진 가래떡도 다 식지 않는 터여서 땀이 비 오듯 했을 것입니다. 얼마나 목이 탔으면 집에 들어서자마자 샘으로 달려가겠어요. 얼마나 숨이 찼으면 샘가에서 넘어졌겠어요. 이웃이라고 모두 저만큼씩 떨어져 사는 터라 아무도 촌부가 샘가에서 넘어진 것을 알지 못했습니다. 넘어져 영영 일어설 수 없게 된 줄은 몰랐습니다.
윤씨는 어이없게 죽은 아내를 뒷밭에 묻었습니다.
외식이란 겨우 자장면밖에는 먹어보지 못했다는 촌부. 그가 떠나던 날에는 참으로 날씨도 쾌청 했습니다. 바람도 적당하게 불어 나뭇잎들이 만장처럼 나부끼었고 낮은 구릉이나 습한 찬 골짜기에는 산딸기가 꽃처럼 붉었으며 뻐꾸기는 환장하게 울어 온 산을 적시었습니다.
그 집 개는 장례를 치르고 열흘이 지나도록 안주인의 무덤에서 떠날 줄을 몰랐습니다. 정이나 배가 고프면 집으로 내려와 찌그러진 양재기에 담긴 사료 몇 알 주워 먹고는 다시 무덤가로 돌아가선 간간이 목을 빼고 하늘을 향해 늑대같이 울어대는 통에 윤씨는 애간장이 다 녹는 것 같아 그만 개장사를 불러들이고 말았습니다.
개장수에게 끌려가던 녀석의 눈망울이, 녀석의 충설심이, 그 착하고 불쌍한 한 마리 짐승의 슬픔이 여름 내내 가슴에 여울져 내렸습니다.
또 다시 바람이 불어옵니다. 흙더미에서 자그르르 흘러내리는 모래알과 흰꽃 나부끼는 구절초를 뒤에 두고 들깻잎 노랗게 물든 산밭으로 발길을 옮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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