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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가 이미경의 블로그 입니다

낭(狼)과 패(狽) 본문

소금인형의 수필

낭(狼)과 패(狽)

소금인형 2009. 9. 17. 22:39

낭(狼)과 패(狽)/이미경


앞을 가로 막은 것은 자동문이었다. 사람이 드나들거나 물건을 넣었다 꺼냈다 하기위하여 틔워놓은 곳이 문이건만 제 기능을 잊은 듯하다. 견고한 벽처럼 서 있는 유리문을 들여다본다. 알 것 같으면서도 알 수 없는 사람의 마음을 보는 것처럼 답답하다. 이런 내 마음도 모르는 채 턱하니 버티고 서서 비켜주지 않는 본새가 오히려 수문장 같다. 사람보다 결점이 적을지는 몰라도 융통성은 찾으려야 찾을 수가 없다. 실수나 잘못을 너그럽게 받아주는 아량은 사람만의 몫인가 보다.

경비원을 없애고 자동문으로 교체한지 일주일째다. 문으로 들어가는 방법이 전자출입카드라는 것을 알고 있지만 아침에 깜박 잊고 방에 두고 나왔다. 전자카드가 아니면 드나듦을 허락하지 않는 인정머리 없는 문 앞을 서성인다. 인간이 기계에 설정된 기준대로 기계의 방식에 맞추기를 강요받는 느낌이 씁쓰레하다.

시스템을 바꾼 표면적인 가장 큰 이유는 경비절감이었지만 사실은 사생활보호라는 이유도 한몫을 했을 터였다. 자동문으로 교체되기 전 경비원이 한 통로에 오래 있으면 주민들에 대해 너무 많이 안다며 주기적으로 교체시키기도 했으니까. 개인적인 것이면 아주 작은 것도 소통하지 않으려는 마음이 자동문에 고스란히 나타나있다. 문에는 한 치의 틈도 보이지 않는다. 마음에 빗장을 채우고 돌아누운 사람의 차가움이 느껴진다.

자동문 유리를 자유롭게 드나드는 빛을 바라보던 나는 경비실을 바라본다. 무거운 짐을 들고 오는 날이면 어김없이 뛰어 나와서 짐을 받아주던 인정의 자리에 봄볕이 휑하게 앉아 있다. 사람이 들던 곳에는 사람의 온기가 없으니 황량하기 그지없다. 가끔은 식곤증에 졸기도하고 주민들의 눈을 피해 술을 홀짝이긴 했지만 사람의 정이 그립다. 그런 이유로 주민과 옥식각신하며 불협화음을 울리던 풍경도 이제는 볼 수 없을 것이다.

옛날 옛적에 낭(狼)라는 동물과 패(狽)라는 동물이 살고 있었다. 낭(狼)은 태어날 때부터 뒷다리 두 개가 없거나 아주 짧게 태어났다. 반대로 패(狽)는 앞다리 두 개가 없거나 짧았다. 그래서 낭과 패는 서로 부족한 부분을 채워주며 늘 함께 다녀야했다. 그렇게 붙어 다니다가 혹 떨어지는 경우가 생기면 그야말로 낭패였다.

깔끔하게 경비를 보지 못했던 낭(狼)같은 경비원이었지만 완벽하지 못한 패(狽)같은 나에게는 어울리는 짝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문을 열고 들어가는 낯선 남자가 보였다. 한참을 서상이고 있던 나는 남자의 뒤에 바짝 붙어 따라 들어갔다. 승강기를 타며 남자를 보았다. 사각턱에 체격이 좋은 사람이었다. 검은 체육복에 모자까지 쓰고 있는 모습이 범죄영화를 떠올리게 한다. 까닭모를 긴장감이 돌아 빠르게CC-tv를 바라보았다. 예전에는 처음 본 사람이라도 경비원과 인사를 나누면 일단 안심이 되었건만 주민이든 아니든 카드만 있으면 출입이 가능하다는 생각을 하니 더 불안하다. 어쩌면 문 앞을 서성이다가 남자 뒤를 슬며시 따라붙는 나를 관리실에서는 주의 깊게 살펴보고 있을 것도 같아 그나마 마음이 놓였다. 아마도 관리사무실에서의 요주의 인물은 남자가 아니라 나 일 것 같아 쓴웃음이 나온다.

승강기에서 내려서야 현관 열쇠도 집안에 두고 나왔다는 것을 알았다. 정말 꼼짝없이 갇힌 신세다. 자동문에 제지당하고 고용한 사람들에게 통제되는 현실에서 문득 나는 한 마리의 패(狽)가 된 것 같다. 위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에 주저앉으며 생각한다.

사람과 사람사이에 합리적이라는 이유만으로 끼어드는 문명들로 인해 오늘도 인간들은 소통되지 않는 곳에서 낭(狼)과 패(狽)가 되어 서성이고 있는지도 모르겠다고.  


 2010.3.3 대구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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