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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금인형의 수필

닿지않는소리

소금인형 2008. 2. 13. 16:31

닿지않는 소리 / 이미경


배관을 타고 물이 흘러내리는 물소리가 들렸다. 나는 반사적으로 일어나 안방에 딸린 화장실 문을 열었다. 누렇게 얼룩졌던 천장이 말끔하다. 산뜻하게 도배된 초록의 잔잔한 벽지를 보니 지난 시간들이 마치 어지러운 꿈을 꾼 것만 같다.

그날, 나는 이를 닦고 있었다. 위층에서 물 내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머리위로 차가운 물방울이 떨어졌다. 머리 에서 등줄기로 흘러내리는 느낌이 섬뜩했다. 천장을 보니  젖은 벽지에서 물방울이 맺히며 떨어지고 있었다. 아주 작은 누수가 천천히 진행되었는지 천장의 얼룩은 희끄무레한 동심원을 그리고 있었다. 나는 윗집에 인터폰으로 배관이 새고 있음을 알렸다.

위층과 우리 집은 같은 위치에 방이 있고 주방이 있을 터였다. 거의 비슷한 위치에 가구들이 자리를 잡고 비슷한 자세로 잠을 자고 있을 것이다. 어찌 생각하니 같은 배관을 쓰고 있는 윗집과 우리 집이 한집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지만 나는 윗집사람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그들은 늘 존재 신호를 배관으로 내보냈다. 늦은 밤이 되어야만 물소리가 들리는 것으로 그 집에는 맞벌이 부부가 살고 있을 거라 생각했다. 직업도 평범한 회사원은 아닐 거라고 짐작을 했다.

며칠이지나도 천장에선 여전히 물방울이 떨어졌다. 천장 벽지는 들떴고 물방울의 크기는 커졌다. 떨어진 물방울이 변기 물일지라도 모른다는 꺼림칙한 생각에 마음이 불편해 지기 시작했다.

내가 다시 인터폰을 한 것은 콩콩거리는 윗집의 존재신호를 듣고서였다. 실쭉한 여자의 목소리가 새어나왔다.

“아, 그거요. 우리 집은 불편한 거 없으니까 그쪽에서 고치세요. 원래 불편한 쪽에서 고치는 거 아닌가요?.” 며칠씩 기다리다 듣는 어이없는 대답에 순간 신경이 곤두서서 복식 호흡을 해야만 했다.

“잘못 알고 계시나본데 공사라는 게 우리 집 천장을 뜯어서 되는 게 아니라 그 집 바닥 공사를 해야 하거든요. 공동주택 규정상 그 집에서 고쳐야하니 빨리 조치를 취해주세요.”

사실 나는 공동 주택규정에 그런 게 있는지도 모른다. 어쨌든 윗집 여자는 그 공동주택 규정이라는 말에 꼬리를 내리는 듯했다.

다시 며칠이 지났건만 천장에서는 여전히 물이 새고 있었다. 젖은 부위는 더 커져 세숫대야만 해졌다. 습기에 곰팡이가 슬기 시작하는지 천장은 얼룩덜룩해졌다. 내 신경도 눅눅해져 이성을 잃고 윗집 초인종을 눌렀다. 몇 번을 누르고 나서야 낮에는 윗집사람이 늘 없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녁이 되자 윗집에서 존재신호가 내려왔다. 나는 다시 인터폰을 했다. 이번에는 여자의 목소리가 낭창하게 인터폰을 타고 내려왔다.

 “아, 그거요. 사실은 우리가 전세로 살고 있거든요. 그래서 주인집에 전화를 했는데 자기네는 한 번도 살아보지도 못한 집이니 우리더러 고쳐 쓰라네요. 입장 바꿔 생각해 보세요. 우리 집도 아닌데 왜 우리 돈 들이겠어요. 우리가 당장 불편한 것도 아니고.”

그런 이야기를 이제야 하는 여자에게 화가 났지만 답답한 사람은 나인지라 부탁조로 말을 했다.

“지금 우리 집은 물이 새서 무너지기 직전이거든요. 조금 불편하시겠지만 거실에도 화장실이 있으니 당분간 방 화장실은 사용을 하지 말아주세요. 내가 집주인에게 다시 연락해 볼게요.”  내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더 낭창해진 여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건 곤란한데요. 내 전용이거든요.” 인터폰을 내려놓으며 사람이 코뿐만 아니라 입으로도 숨을 쉴 수 있다는 것이 다행이라는 생각을 했다. 


“법적대응 밖에는 없겠는데요. 알아서 하세요.” 아파트관리소에 들어서기가 무섭게 소장이 말을 꺼냈다 . 순간 팔, 다리에 힘이 빠졌다. 

“뭐라고요. 소장님은 주민들 중재할 방법을 연구 하셔야지 법이라니요.” 내 목소리가 유난히 짜증스러웠던지 그는 마시려던 커피를 도로 접시에 내려놓았다.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던 일이 터진 둑 물처럼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만 흐르는 것에 나는 지칠 대로 지쳐 있었던 터였다. 

관리소에서 집주인의 전화번호를 알아내고도 며칠이 지나서야 겨우 통화가 이루어졌다.

“내가 돈이 없는 사람이 아닙니다. 어디어디에 땅이 몇 천 평이 있고 어느 동네에 집이 두 채나 있습니다. 한번 생각해 보세요. 명의만 되어있을 뿐 단 한 시간도 살아본 적이 없다니까요. 그러니 사는 사람이 그 정도는 해야지요. 나는 모릅니다.”

세입자와 집주인이 줄다리기를 하는 동안 우리 집 천장에서는 물이 낙숫물처럼 떨어져 내렸다. 바닥에 떨어져 부서지는 물 부스러기처럼 내 신경도 날카로워지고 있었다. 급기야 보다 못한 남편이 위층에서 물소리를 낼 때마다 긴 막대로 천장을 쿵쿵 쳐댔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나는 관리소에 한번 더 도움을 청해 놓았다. 

결국 남편은 두 집에 전화를 걸어 법적 조치를 하겠다고 말했지만 주인집과 세입자는 한치의 양보도 없었다.  그런데 오늘 외출에서 돌아오니 위층 집주인이 다녀갔다는 것이다. 

두런거리는 위층사람의 소리가 배관을 타고 내려온다. 아이를 타이르는 엄마의 소리다. 깔깔거리는 아이의 웃음소리가 뒤를 잇는다. 아빠의 묵직한 목소리도 들린다. 문득 위층 사람의 모습이 궁금해진다. 윗집의 존재는 늘 소리로만 전해진다.

물들은 배관에서 만나 함께 흘러 내려가지만 나는 윗집 사람과 함께 해본 적이 없다. 같은  땅을 디디고 살고 같은 배관을 쓰는 한집 같은 이웃과 한 달 내내 전쟁을 치루면서도.

오늘도 배관으로 연결된 집은 물이 흘러 내리는 소리로 서로가 살아있음을 알린다.

 

수필사랑 13집

 

<계간 수필세계 신인상 등단, 제1회 프런티어 문학상 수상, 수필사랑 사무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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