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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집으로 간다 본문
나는 집으로 간다 / 이미경
은은한 불빛이 좋다. 잔잔하게 흐르는 음악도 마음에 든다. 나는 갤러리를 느릿느릿 걸으며 그림들을 둘러보다 걸음을 멈추었다. 몇 개의 검은 반원과 하얀 사각형위로 푸른 물감이 덧칠 된 그림 앞이었다. 흐릿하지만 그것은 분명 집의 모양이었다. 어찌 보면 눈물 가득 고인 눈으로 본 느낌을 표현한 것 같기도 하고 또 어찌 보면 달리는 차창 밖에서 본 느낌을 그린 것 같기도 하다. 가로로 쓸고 간 물감에 형체가 일그러진 검은 지붕과 하얀 벽은 눈물에 아롱 젖은 모습이거나 속도 때문에 물체의 초점이 흔들린 것 같다. 그것은 밑그림이 마르기전에 빠른 손놀림으로 터치 된 터라 묘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다. 마치 지붕과 벽이 분리되어 푸른 안개 속을 둥둥 떠다니고 있는 것 같다.
그 그림 속에는 눈물 그렁그렁한 눈으로 가정을 지키며 앉아있는 친구의 집의 끝에 서서 푸른 안개가 들러 쌓인 집을 보고 있던 내가 어딘가에 있을 것만 같다.
며칠 전 친구를 만났다. 오랜만에 만난 친구는 햇볕이라곤 한 번도 쬐지 않은 사람마냥 뽀얗다 못해 창백한 얼굴이었다. 그래서 아이라인이 그려진 눈이 더 휑하게 보였다.
“내가 살기 위해 그랬어.” 순식간에 친구의 눈에 검푸른 눈물이 넘쳤다. 마치 큰 폭풍우에 터진 둑처럼 주체하지 못할 눈물이 탁자 밑으로 뚝뚝 떨어졌다.
갑작스런 친구의 행동이 당황스러웠지만 몹시 파리해진 모습에서 그간에 편치 않았음을 알았다. 나는 주스를 한 모금을 마시며 친구의 감정이 누그러지길 기다렸다.
창밖에는 단풍든 나무들이 정물화처럼 서있었다. 바람이 불고 있는지 나뭇잎이 우수수 떨어졌다. 소리가 들리지 않는 창 너머의 세상은 바람이 불고 있어도 늘 평화로워 보였다.
울음소리가 잦아지더니 친구는 탁자위에 놓인 휴지를 뽑아 눈물을 닦고 있었다.
내가 부러웠단다. 가계부를 쓰고 생활비를 쪼개 적금을 붓던, 평범하게 사는 내 모습이 늘 가슴에 들어와 있었단다.
친구는 알고 있을까? 오래전 그녀가 짧은 치마에 꽃다발을 들고 가다 나와 마주치던 날, 나는 아이를 업고 장바구니를 든 부스스한 모습이었다. 그날 이후로 친구를 보면 괜히 초라해졌다. 경쾌한 친구의 구두소리에 우울해지곤 했다. 그래서 가끔은 친구를 피해 돌아서 집으로 온 날이 있었다. 해외를 마음대로 드나드는 친구를 보며 내 삶이 우물 안 개구리 같아 답답해하던 날도 있었다.
친구는 잠시 말을 멈추더니 깊은 숨을 쉬었다.
“나 그동안 많이 힘들었어. 남편에게는 늘 여자가 있었거든. 알면서도 남편에게 말을 하자니 자존심이 상해 모르는 척 했었지. 날이 갈수록 상처는 뜨겁고 무거워지더구나. 혼절 할 때쯤 나도 살기 위해서 남자를 만났어. 남편에게 복수를 했다는 생각에 숨통이 다 트이더구나. 그런데 자꾸만 허해지는 이 감정은 뭘까 지금까지도 만나고 있는데.”
가슴이 먹먹해졌다. 친구에게 그런 비밀이 있을 거라고는 상상조차 못했다.
허리에 슬금슬금 군살이 붙듯 생활에도 군살이 오르며 안정감을 찾아가는 나와 달리 친구는 처음부터 모든 것이 탄탄했다. 잡지 광고의 한 페이지를 옮겨놓은 듯한 집에서 친구는 늘 행복해 죽겠다는 표정을 하며 살고 있었다. 그런 친구가 내 앞에서 아이라인이 지워지는 줄도 모르고 검은 눈물을 흐리고 있었다.
그동안 내가 본 것은 친구의 이미지일 뿐, 실체를 한 번도 제대로 본 적이 없었다는 생각에 씁쓸하기까지 했다. 친구의 몸이 말라가고 마음이 젖어 가는 동안 나는 어쩌면 그토록 무디었을까. 그 무딘 감성으로 살아오면서 내가 놓쳐버린 풍경은 또 얼마나 많을 것인가.
그날 친구가 왜 나에게 고해를 하듯 그런 말을 했는지는 모른다. 그저 들어만 달라던 친구의 말로 미루어 보아 누구와의 소통이 절박한 상황이었으리라는 짐작만 할뿐이다. 그렇게 돌아간 친구의 마음이 조금이나마 가벼워졌는지는 덧칠된 밑그림 마냥 알 수가 없다.
부디 친구가 떠다니는 지붕과 벽을 단단히 매조지하고 그림 속 안개를 헤쳐 나가길 바랄 뿐이다. 친구와 헤어진 내내 바람에 흔들리는 가을 잎같이 마음이 스산했다. 혼자서 퍼붓는 눈발을 삭이느라 겨울 들판의 나목처럼 울었으리라.
천천히 그림의 제목을 본다. ‘나는 집으로 간다-아름다운 시절.’
살아가다보면 신산한 날도 있다. 잠시 바람을 피해 들어간 곳이 안온했다 하더라도 영원히 머물 수는 없다. 이제 잎이 지고 찬바람이 불면 모든 것이 따뜻함을 찾아 제 자리로 돌아갈 것이다. 갤러리를 나오니 어둠이 내리고 있다. 제 자리를 찾기 위해 이리저리 헤매는 낙엽을 보며 나는 집으로 간다. (2007. 수필세계 겨울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