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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등 본문
갈등
이미경
장례식장으로 향하는 길목에는 가을 햇살이 가득하다. 태나서 죽고 괴로워하고 즐거워하는 일은 가을볕 마냥 억겁 속에 되풀이되어온 자연스러운 일이지만 마흔도 안 된 그녀의 부고는 뜻밖의 일이다.
남편은 내 신앙생활의 시작을 못마땅해 했다. 친척 아주머니의 광신적 믿음으로 가정이 깨어지는 것을 본 어린 시절의 기억 때문인 듯했다. 농사일도 내팽개친 채 바깥으로만 떠돌다 사라진 아주머니와 술로 지새우던 그녀의 남편, 그리고 땟국이 졸졸 흐르던 친척 동생들의 슬픈 모습을 실루엣처럼 떠올렸는지도 모르겠다.
둘째 아이가 학교에 들어가자 종일을 코끝에서 단내나게 종종걸음치던 시간이 엿가락처럼 늘어지며 틈이 생겼다. 그 틈은 무성한 잎사귀를 떨쳐낸 겨울나무처럼 헛헛함을 자주 느끼게 했다. 알 수 없는 허기를 채우기 위해 많은 사람을 만나고 취미생활도 해 보았지만 마찬가지였다. 가을빛이 마냥 좋던 날, 무작정 걷다가 이른 곳은 성당 뜰이었고, 성가대의 노랫소리에 안식을 얻은 나는 그날 이후 믿음을 갖게 되었다.
일 년에 한 번 등(燈)을 다는 것이 신앙의 전부였던 시어머니 모습에 익숙해져 있던 남편은 종교 생활에 수반되는 봉사활동이나 기도 모임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런 일로 가끔 집 비우는 일이 생기자 아이들이나 가정에 소홀해질까 은근히 촉각을 곤두세웠다. 내가 선택한 일에 대해 충실하면 할수록 남편과 충돌하는 일이 잦아졌다. 가정평화와 신앙 모두를 놓치고 싶지 않았던 나는 갈등했고, 그 갈등이 시지프스의 바위 같이 느껴졌을 때 그녀를 만났다. 그녀는 오빠와 언니가 성직자이며 본인도 그 길로 가다가 적성에 맞지 않아 그만두고 결혼했다고 했다. 신앙의 뿌리가 깊은 것 같아 나는 가끔 내 속내를 그녀에게 털어놓았고 그때마다 그녀는 가정이 우선이라며 현명하게 대처하는 방법을 일러주고 다독여 주었다. 그녀의 말대로 나는 주말이면 남편의 스케줄을 먼저 묻고 집안일에도 더 많은 신경을 썼다. 그러자 남편도 차츰 내 종교 활동을 묵인해 주었다. 몸은 피곤했지만, 마음은 평온한 나날이었다.
삶이 평화로 충만해 보일 때 그녀를 찾았다. 그러나 웬일인지 그녀의 모습을 좀처럼 성당에서 볼 수 없었다. 이사를 하고 교적 정리를 하기 위해 다니던 성당으로 가다가 우연히 그녀를 만났다. 이사를 했다는 말과 그동안 고마웠다는 말을 했다. “보기 좋네요. 신앙생활 열심히 할 거죠?” 진심으로 기뻐했던 것이 그녀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하얀 국화꽃으로 장식된 사진 속에서 그녀는 엷게 웃고 있다. 지금 생각하니 생전의 그녀 웃음에는 묘한 쓸쓸함이 묻어 있었던 것 같다. 문상을 하기 위해 빈소로 들어가려는데 안내하던 아주머니가 옆방으로 가라고 한다. 무슨 일인가 싶어 잠시 당황했다. 두 눈을 크게 뜨고 다시 영정을 쳐다보았다. 그녀의 빈소가 틀림없으나 무언가 의아심을 느끼며 옆방으로 향했다. 황량하기 그지없는 사각의 공간에 그녀의 또 다른 빈소가 있었다. 조금 전에 본 것과 똑같은 사진 속의 그녀가 말없이 나를 바라본다. 꿇어앉아 두 손을 모으고 산 사람이 죽은 이를 위해 해줄 수 있는 것이 고작 기도밖에 없다는 현실에 절망하며 멍하니 앉아 있었다.
“젊은 사람이 병으로 가서 그런가? 초상집이 너무 냉랭하구먼.” 누군가 소곤거리는 소리에 고개를 들어 주위를 둘러본다. 그러고 보니 이상하다. 여느 상갓집처럼 음식을 먹거나 술을 마시는 문상객도 보이지 않고 빈소가 두 개였다는 생각이 스친다.
‘상주들은 다 어디로 간 걸까?’ 서둘러 연도를 마치고 그곳을 나왔다.
장례식장은 문상을 마친 이들로 왁자지껄하다. 죽은 이들에 대한 회상만이 살아 있는 는 자의 위로가 되기라도 하듯이 그들은 끊임없이 이야기한다. 그녀의 사연을 아는 이를 행여 만날까 하여 두리번거리는데 그녀의 친정 노모와 나누는 수녀님의 이야기가 들려온다.
“아직도 성당에서의 장례미사를 허락하지 않고 있는지요?”
“그쪽도 워낙 불심이 깊은 집이라 불교식으로 하기를…….”
“아이고 불쌍한 것. 마지막 가는 길이라도 편하게 해 줄 일이지.”
빈소를 하나 더 마련한 것이 우리를 위한 배려인 척하지만 실은 우리 쪽 문상객이 보기 싫다는 표현인 걸 안다며 노모는 흐느꼈다.
바위만한 갈등에 깔려 신음조차 못 했을 그녀 앞에서 내 손에 박힌 가시 하나가 더 아프다고 호들갑 떨었던 시간이 마음에 걸린다. 설령 그녀의 고통을 알았다 한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 있었으랴. 같은 갈등이었건만 그녀의 아픔을 알지 못함이 내 상처만 핥던 좁은 식견인 것 같아 가슴이 아리다. 모태 신앙인이었던 그녀는 온몸으로 퍼지던 암보다도 단 하나의 믿음만을 강요하는 인간의 이기심이 더 고통스러웠으리라. 하얀 국화꽃으로 장식된 그녀는 여전히 엷게 웃고 있다. 갈등이란 산자의 몫이라 듯 이승의 풍경을 빠져나간 그녀는 그저 웃고만 있다.
(2006년 수필세계 등단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