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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눈깨비 내리던날 본문
아침부터 새침하게 흐린 날은 오후가 되자 진눈깨비를 뿌리기 시작했다. 아스팔트 위를 달리고 있는 시외버스 안은 가끔씩 하품을 하거나 졸고 있는 촌부 몇 사람뿐이다. 낮게 내려앉은 하늘 탓인지 모두들 나른한 표정이다. 통통 튀는 아나운서의 목소리만이 가라앉은 버스안 분위기를 띄우고 있다. 오늘이 춘분이란다. 이 진눈깨비가 그치고 나면 차창을 스치는 풍경이 푸르러 지리라.
사내가 버스에 오른 것은 공단을 막 벗어 날 때였다. 모자를 눌러쓴 사내는 차비가 조금 모자랄 거라는 말을 하며 태연하게 차에 올랐다. 부족한 차비를 들고서도 미안해하거나 굽실거리는 표정은 없었다. 막일을 하는지 어깨에 연장 가방을 멘 사내의 몸은 다부져보였다. 사내는 맞은편 자리에 구겨지듯 주저앉더니 차가 왜 이리 느리냐며 트집을 잡기 시작했다. 버스가 몇 정거장을 지나고 몇 사람이 더 타는 동안도 사내의 혼자 말은 계속 되었다. 흐르는 음악이 좋다고 하다가 방송의 멘트에 불만을 표현하며 한참을 떠들었다. 그러다가 느닷없이 차가 느리다며 소리를 질렀다. 눈길을 돌려 창밖을 바라보았다. 여전히 진눈깨비가 날린다. 차창에 부딪친 진눈깨비가 눈물처럼 주룩룩 흘러내린다.
음악이 흐르고 다시 아나운서의 멘트가 이어진다. 올해 소비자 물가 지수는 정부가 예상했던 것보다 다소 낮을 거란다. 사내는 거짓말하지 말라며 서민을 위한 정책이 무엇이 있냐며 혼자 몹시 화를 내다가 다시 차가 느리다며 투덜거렸다. 하지만 버스기사는 무관심하게 제 속도대로 운전을 했고 창밖은 여전히 진눈깨비가 아우성을 치며 차창을 두드린다.
“아! 기사 양반 액셀러레이터 힘껏 좀 밟아요. 숨 넘어 가겠네 아이쿠” 사내가 또 버스기사에게 목소리를 높였다. 이러다 버스 기사와 실랑이라도 나지 않을까 신경이 쓰였다. 쉼 없이 지껄이는 사내의 말을 들으며 내심 불안했다. 소외되고 억압된 감정을 대상 없이 내 지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마음이 지금 터지지나 않을까. 그래서 그 불똥이 가장 가까이 있는 내게 떨어지지는 않을까하여 마음이 조마조마했다. 하지만 사내의 고함소리는 버스 안에 있는 누구에게도 젖어들지 못한 채 창밖의 진눈깨비처럼 또르르 흘러내린다.
“K 시장에서 내려 P병원까지 열나게 뛰어가야겠네. 어이구, 숨넘어갔겠네. 숨넘어갔겠네.”
사내의 목소리가 다시 들렸다.
K시장에서 P병원 까지는 사내가 아무리 잰걸음으로 걸어도 30분이 족히 넘는 거리이다. 지금은 일인당국민소득 만 불이 넘고 교통발달이 눈부신 시대가 아닌가. 이 시대에도 저러고 있을 수밖에 없는 사내의 형편이 진눈개비처럼 무겁게 내려앉는다. 질경처럼 당기고 당겨도 뿌리가 뽑혀지지 않을 삶의 무게에 짓눌린 사내의 모습이 겨울 들녘에 떨고 서 있는 수숫대 같다. 요란한 벨소리가 들리더니 사내는 통화중이다. 조금 전 울분에 들떠 있던 목소리와는 다르게 차분히 전화를 받고 있다. 차를 탔으니 곧 갈 거라며 걱정 말라한다. 그럴 일은 없을 거라며 네 엄마가 너무 피곤해서 잠을 자고 있을 것이라며 아이를 달래는 사내의 음성이 흔들리고 있다. 죽기는 누가 죽느냐며 발악하는 사내의 목소리처럼 진눈깨비가 더 거세게 퍼붓는다. 버스기사에게 재촉하는 사내의 목소리도 빨라지고 커졌다. 하지만 누구도 관심을 가지는 사람은 없다. 모두들 귀머거리 벙어리가 되어서 석고상처럼 굳어갈 뿐이다.
사내를 슬쩍 쳐다보다 눈이 마주쳤다. 피곤에지치고 두려움과 불안에 떠는 눈이었다. 짧은 순간이었지만 사내의 눈은 분명 분노가 아니었다. 버스 안에서 쉼 없이 내뱉은 사내의 말은 세상을 향한 원망과 분노였지만 눈빛만은 상처 입은 순한 짐승 같았다. 사내는 그 불안감을 거친 말로써 묽게 하려고 했던 것일까 내가 먼저 눈길을 돌려 창밖을 바라보았다. 여전히 진눈개비가 아우성을 치며 차창을 두드린다.
버스는 대여섯 명의 사람을 내려놓고 K시장으로 향했다. 라디오에서는 공무원 뇌물 수수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고 있다. 무슨 말이라도 할법한데 사내는 말이 없다. 시선을 아래로 향한 채 미동이 없다. 의자에 오그리고 있는 사내의 폼이 걷다가 쓰러질 것 같다. 지치기라도 한 것인가 어째 그 침묵이 더 불안해 보인다.
조용해진 버스 안을 둘러본다. 손잡이가 리듬을 타며 혼자 흔들리고 있다. 버스 벽에 붙은 낮 익은 전단지를 보다가 사내가 있는 곳으로 고개를 돌리려는데 무언가가 보였다. 접혀진 종이인가 했는데 그건 지폐였다. 나는 사내와 지폐를 번갈이 봤다. 눈이라도 마주치면 좋을 텐데 사내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꿈쩍도 않는다.
차는 속도를 늦추더니 K시장 앞에 정차했다. 사내는 빈종이 상자처럼 구겨져 자리에서 일어났다. 갈 길이 걱정인지 창밖만 두리번거린다. 바닥에 있는 지폐를 발견하기를 바라며 시선을 창밖으로 돌렸다. 사내가 지나가는 느낌과 동시에 버스바닥을 쳐다봤다. 지폐는 사내의 발 한 뼘 뒤에 얌전히 놓여있었다. 몇 발자국만 더 가면 사내는 버스에서 내릴 것이다. 다급해진 내가 소리쳤다. “아저씨 돈 떨어졌어요.”
사내가 뒤를 돌아보았다. 나는 돈 있는 곳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사내는 지폐와 나를 한 번 힐끗 보더니 쏜살같이 돈을 낚아채 버스에서 내렸다. 버스가 미끄러지듯 출발할 때 나는 보았다. 차창 밖, 하늘을 향한 사내의 얼굴에 진눈깨비가 눈물처럼 흘러내리는 것을. (2007. 한국수필 4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