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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금인형의 수필

향기

소금인형 2006. 1. 17. 11:17

                                       

향기/이미경 

 

    자주 눈길이 하늘로 향한다. 아침나절 받은 친구의 전화 때문이었다. 새로 개발한 주막이 있으니 눈이 내리면 나오라는 말을 했다. 친구는 음식 맛이 좋고 값도 싼 집을 찾을 때마다 개발이라는 말을 쓴다. 사람들이 좋아서, 분위가 좋아서, 가끔씩 술자리에 같이 있기는 하지만 사실 나는 술을 잘 못마신다. 그렇다고 재치 있는 입담이 있는 것도 아니다. 게다가 분위기가 무르익어 있어도 저녁 때가되면 뒤도 안돌아보고 종종걸음쳐 나온다. 그런 줄 뻔히 알면서도 눈이 내린다고 기꺼이 술친구로 불러준 친구의 마음이 고마워 흔쾌히 승낙을 했던 터였다.

 오후가 되자 회색빛 하늘에서 눈발이 날리기 시작했다. 현관문을 잠그고 계단으로 내려가는데 불현듯 그녀가 떠올랐다. 서로의 삶에 어떠한 영향도 준적이 없었던 그녀가 지금 왜 생각나는 것인지. 그녀를 처음 본 것은 지금의 아파트로 이사 오던 날 엘리베이터에서였다. 그녀는 유난히도 흰 피부와 잘 어울리는 까만 원피스를 입고 있었다. 내가 먼저 그녀에게 인사를 건넸고 그녀는 가볍게 목례만 했었다. 그녀는 반상회나 주민들이 모이는 자리에 거의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래서 나 또한 그녀를 기억하지 않았었다. 그리고 그해 겨울 시장에서 그녀를 마지막으로 본 것이 인연의 전부였다. 긴 밍크코트를 입은 그녀는 좌판에서 채소를 파는 할머니와 실랑이를 하고 있었다. 몇 차례 언성을 높이더니 천 원짜리 한 장을 획 던지고는 총총히 내 옆을 지나갔다. 그리고 며칠 후 그녀가 거액의 돈을 떼먹고 야반도주했다는 말이 바람결에 실려 왔다.

 스치듯 지나간 그녀가 지금 생각난 이유는 무엇일까. 몇 계단을 더 내려가다가 나는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 향기 때문이었다. 그녀를 떠올리게 한 것은 향기였다. 어찌된 연유인지 복도에서 장미향이 퍼지고 있었다. 마치 그녀가 이곳에서 오랫동안 머물렀다 가기라도 한 듯이.

그녀에게선 향수냄새가 났었다. 처음 만난 엘리베이터 안에서도, 시장에서 내 옆을 지나갈 때도 진한 장미향이 났었다. 1층으로 다가 갈수록 향이 짙어지더니 머리가 지끈거릴 정도로 지독한 냄새난다. 반짝이는 유리 파편, 누군가 그곳에서 향수를 통째로 깨뜨린 모양이었다. 존재하는 것에는 고유의 향기가 있다. 그래서 그 향기로만으로도 프리지어와 레몬을 구별할 수 있다. 그런데 왜 나는 장미향에서 장미꽃을 생각하지 않고 그녀를 떠올렸을까.

그녀와 장미향 향수를 분리해 본다. 한낱 실루엣에 지나지 않는다. 그것은 향수가 그녀 고유의 향기가 아니라는 뜻 일게다. 냄새의 원천에서 조금 벗어나자 지끈거리던 머리가 한결 편하다. 은은하게 퍼져 기분을 좋게 하던 향기가 정작 냄새의 정점에 섰을 때는 괴로움을 수반하는 모순이라니. 문득 냄새의 꼭지점에서 가장 좋은 향기를 내는 것은 없는지 궁금해진다. 있다면 그것이야 말로 완전한 향기임이 분명할 터인데 말이다. 

 친구가 개발했다는 주막은 생각보다 작았지만 깔끔했다. 홀은 주방과 개방되어 있는 탓에 음식냄새로 가득하다. 오랜만에 내리는 눈을 안주 삼은 양 술 한 모금에 창밖을 내다보는 사람들도 눈에 띈다. 차림표가 붙어 있는 벽 쪽에 친구가 있었다. 언제부터 와 있었던 것일까 얼굴이 발그레하다. 내 잔에 반쯤의 술을 따라준다. 술을 잘 마시지 못하는 나를 위한 배려였다. 언제나 남을 생각할 줄 아는 친구의 마음은 나를 편하게 한다. 친구가 따른 술 한 모금을 마신다. 경기가 좋지 않아 살기가 힘들다는 넋두리가 어디선가 들려온다. 슬쩍 주위를 둘러본다. 옆 테이블에서 일용 근로자인 듯한 사람들이 몇일째 일자리를 얻지 못해  공을 쳤다는 푸념을 늘어놓는다. 다른 한 곳에는 남루한 차림의 남자가 혼자서 술을 마시고 있다. 그는 주인아주머니에게 만원을 주며 담배심부름을 부탁했다.처진 어깨에 근심어린 얼굴이다. 주막이 주는 삶의 무게를 느낄 때쯤 주인아주머니가 돌아 왔다. 담배를 받은 남자는 팁이라며 거스름돈을 아주머니에게 주었다. 순간 내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삶이 곤궁해도 그의 마음은 작은 낭만을 만드는 여유가 있어 보였기 때문이었다. 그 때 가게 문이 열리며 노숙자 한 사람이 들어왔다. 주인아주머니 정색을 하며 노숙자를 밀어내었다. 주고받는 말로 보아 종종 오는 모양이었다.

 그때였다. 돈은 내가 낼 터이니 술 한 잔 대접해 보내라는 말이 들린 것은. 며칠째 일자리를 얻지 못했다는 일용근로자들이었다.  내 삶의 무게가 버거우면 타인의 아픔이 잘 보이지 않는 법인데 그들은 남의 어려움을 보고 있었다. 그 여유는 향기를 만들었다. 바깥의 눈이 소리 없이 쌓이는 동안 이 주막에도 향기가 쌓이고 있었다. 나는 향기의 정점에 있었던 거다. 친구의 따스한 배려의 향기와 작은 액수의 거스름돈이 내던 낭만의 향기 그리고 나보다 더 어려운 이웃을 바라보는 여유의 향기 속에 나는 있었다. 향수의 원천에서 더욱 감미롭게 뿜어내는 삶의 향기였다. 이것이 바로 완전한 향기가 아닐까.

 시계는 저녁 시간을 가리키고 있었건만, 아늑한 향기에 취한 나는 일어서지 않았다.

2016년 12월 대구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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