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tice
Recent Posts
Recent Comments
Link
«   2024/12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
Tags
more
Archives
Today
Total
관리 메뉴

수필가 이미경의 블로그 입니다

금줄 본문

소금인형의 수필

금줄

소금인형 2006. 8. 30. 23:09
  

 

                               금줄  /이미경


 

남자는 금줄을 치고 있었다. ‘happy’라고 쓰인 리스를 현관문에서 떼어내더니 금줄을 비끄러매었다. 금줄이 어색해 보였다. 도시의 고층아파트에 매여 있어서가 아니라 집주인에게 어울리지 않는 풍경 같아서이다.

그 집에는 서울 말씨를 쓰는 젊은 부부가 살고 있다. 워낙 조용한 것을 좋아하는 성격이라 이웃들도 조심스러워했다. 그런 까닭으로 ‘happy'라고 쓰인 대문은 지금껏 그 부부만을 위해 열리고 닫히는 문이었다.

왼쪽으로 꼰 새끼에 듬성듬성 생솔가지와 숯 그리고 붉은 고추가 걸려있다. ‘우리 집에 예쁜 아기가 태어났답니다. 놀러 오세요.’ 금줄이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 같다.

금줄은 왼 새끼로 꼰다. 오른 새끼가 훨씬 쉬울 터이나 금줄은 왼 새끼를 사용한다. 그것은 앞만 보지 말고 옆과 뒤를 살필 수 있는 여유를 가지라는 뜻이리라.

또각거리는 나의 구두 소리에 인기척을 느낄 만도 하건만 남자는 아랑곳없이 금줄 다는 일에 열중이다. 일부러 헛기침하며 발걸음 소리를 낼 때야 남자가 표정 없이 뒤돌아보았다.

새댁이 몸을 풀었나 보네요. 축하해요. 나는 바로 위층에 살아요.”

남자는 그러냐는 표정을 짓더니 잠시 후 건조한 목소리로 감사하다는 말을 했다. 아이가 태어나 얼마나 좋으냐며 산모와 아기의 건강을 물으려다 그만두었다. 남자의 말투와 표정이 차가웠고 그들 부부는 자신의 삶에 끼어드는 것을 싫어한다는 말이 생각났기 때문이었다.

그들이 이사 온 지 며칠 되지 않아서였다. 털털하고 넉살 좋은 반장 아주머니가 주민을 대표해 꽃다발을 들고 그 집을 찾았다. 젊은 사람이 꾸며놓은 집구경도 하고 부녀회에서 가는 야유회에 초청해 주민과 어울릴 자리를 마련해 주기 위해서였다. 벨을 누르고 기다리던 반장 아주머니는 어이가 없었다. 인터폰을 통해 들리는 차분하고 낮은 목소리는 뜻은 고맙지만 느닷없는 방문이 당황스럽다는 것이었다. 정중하게 미안하다는 말까지 하며 약속을 하고 다음에 오시라며 문은 끝내 열지 않았다. 무안해진 반장 아주머니가 집으로 돌아가 벙어리 냉가슴 앓는 표정으로 냉수만 들이켰다는 소문은 며칠 후 온 아파트에 짝자그르하게 퍼졌다. 나 또한 어쩌다 승강기 안에서 그 부부와 마주치면 눈인사만 했을 뿐 말을 나눈 적은 없었다.

무척 합리적으로 보이는 그가 속신의 줄을 치고 있는 모습은 뜻밖이다. 굳이 금기의 줄을 치지 않아도 오가는 이 없는 집이기에 더더욱 그 모습이 우스꽝스러웠다. 견고한 문 앞에 쳐 놓은 한 가닥 금줄은 오히려 그들이 소통을 원하고 있음을 알리는 앰프처럼 보인다.

남자는 하던 일을 매조지하고는 깍듯이 묵례를 하고 돌아섰다. 아직 털털하게 사는 법을 익히지 못한 남자의 등이 서늘하다. 나도 상관하지 않을 테니 너도 간섭하지 말라는 몸짓을 살비듬처럼 떨어뜨리며 남자는 문 안으로 사라졌다.

 

까무룩히 잠들만하면 들리는 울음소리에 몇 번이나 깨다 보니 잠은 아예 저만치 달아나버렸다. 낮에 아파트 주변을 어슬렁거리던 고양이를 떠올리며 몸을 뒤척이는데 또다시 울음소리가 들린다. 간헐적으로 들리던 울음소리가 길게 이어질 때야 그 소리가 아래층 집 갓난아이 울음소리임을 알았다. 쉽게 그치지 않는 아기의 울음소리에 현관문을 열고 나갔다.

캄캄한 복도가 낯설었다. 살아오면서 이처럼 눈앞이 캄캄해지는 일이 더러 있었다. 그때마다 주변과의 소통이 위안이 되곤 했다. 벽을 더듬어 불을 켜자 인연의 통로 같은 복도에 바람이 분다. 잠시 세상에 났다 사라지는 이슬 같은 차안에서 금줄이 흔들린다. 인간이 가지는 최초의 줄인 탯줄의 현현. 신에게 가는 길과 사람에게로 가는 길과 내 몸속의 길이 다르지 않으니 시공을 초월하는 인연을 다시 돌아보라며 금줄이 거늑하게 웃고 있다. 사는 일은 마음속에 길을 내는 일이라고, 그 길을 통해 들어온 바람들을 갈무리하는 일이라고, 금줄이 덩그렁 덩그렁 울린다.

벨을 눌렀다. 생각보다 문은 쉽게 열렸고 타인의 방문을 기다렸다는 듯 새댁은 반색했다.

아기가 갑자기 왜 이러는지 모르겠어요. 남편도 출장 중이고새댁은 울상을 지으며 포대기로 꼭꼭 싼 아기를 나에게 건넸다. 아기의 몸은 불덩이였다. 포대기를 벗기고 찬물수건으로 아기의 팔다리를 닦아 열을 내린 후 병원으로 갔다.

곤하게 잠든 아기를 보며 새댁은 고맙다는 말을 연거푸 했다. 일이 생기면 어려워 말고 언제든지 연락하라는 말을 새댁에게 하고는 집으로 왔다.

며칠이 지나도록 아래층에서는 연락이 없었다. 궁금해진 나는 슬리퍼를 신고 계단을 내려갔다. 아래층 남자는 버성긴 사이로 솔가지와 숯 그리고 붉은 고추가 고개를 내밀고 있는 금줄을 걷고 있었다. 그리고는 아기가 ‘welcome'이라고 쓰인 팻말을 들고 있는 리스를 달았다. 내 발걸음 소리에 남자가 뒤돌아보며 웃는다. 그 웃음이 눈부시다.

 

 

 

 


(2006년 수필세계 겨울호)

'소금인형의 수필' 카테고리의 다른 글

공사 중  (0) 2007.06.07
갈등  (0) 2006.10.22
진눈깨비 내리던날  (0) 2006.06.29
균형잡기  (0) 2006.03.04
눈물  (0) 2006.02.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