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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화 본문

소금인형의 수필

목화

소금인형 2007. 11. 21. 07:39

목화 /이미경



현관을 나서는데 경비원이 졸고 있다. 오던 날부터 졸기 시작하더니 오늘은 아예 머리를 의자 뒤에 기대어 편안하게 자고 있었다. 나는 짐짓 모른척하며 문을 나와 수돗가로 발걸음을 옮긴다. 경비실 벽과 아파트 벽이 ㄱ자로 이어진 어두운 곳에 꽃이 피어 있다. 누에고치 네 개를 맞붙여 놓은 것 같은 솜꽃 두 송이다. 목화의 주인은 잘 계실까? 부지런히 청소를 하고 화단을 가꾸시던 전번 경비아저씨의 모습이 떠올랐다.

몇 달 전 쓰레기를 버리고 들어가는 길에 낯선 꽃 하나를 발견했었다. 마치 미농지로 만든 종이꽃 같은 것이 단아한 꽃이었다.

“저 꽃 이름이 뭐예요?”

화단에서 풀을 뽑던 아저씨가 웃으면서 목화라고 했다.

“어머 저게 목화란 말이예요?” 내가 신기해하며 꽃 앞으로 다가가자 아저씨는 옛날에는 어디서나 볼 수 있었지만 요즘은 보기 힘든 꽃이라는 말을 덧 붙였다. 수수한 미색(米色)이 이렇게 화사할 수도 있다는 것을 목화를 보고 처음 알았다. 부드럽지만 나약해 보이지 않는 그 꽃이 내 마음을 붙잡았다.

그 후로 그 앞을 지나 갈 때면 물을 주기도 하고 꽃을 바라보다가 가기도 했다. 목화는 넘치게 꽃을 피우는 법이 없었다. 한 나무에서 다소곳이 두세 송이가 피고 지기를 반복했다. 꽃끼리 간격을 두고 피었다가 붉은색 수의로 갈아입고는 말없이 떨어졌다. 떠나는 뒷모습이, 꽃이지는 자리가 결코 슬프거나 추하지 않았다.

경비 아저씨의 하루는 노란 음식물수거통을 씻는 것으로 시작하셨다. 그런 다음에는 보이는 휴지를 줍고 화단에 씨를 뿌리고 가꾸었다. 마치 내 집 마당을 가꾸는 듯이 즐겁게 정성껏 모든 일을 하셨다. 잠시도 몸을 가만히 두지 않는 아저씨 덕에 우리통로 앞은 늘 햇빛에 반짝 거렸다.

우리 통로에는 경비원이 두 분이 경비 일을 하는데 늘 그 아저씨만 쓰레기를 분리했다. 아저씨가 종일을 깨끗이 치워 놓은 곳에서 다른 경비원은 종일을 느긋하게 있다가 퇴근했다. 오고가는 사람만 지켜보다 퇴근을 했으니 그 다음날 아저씨가 근무 할 때면 일거리가 쌓였다. 그래도 아저씨는 싫은 내색조차 않고 묵묵히 일만하셨다.

우리 통로 사람들이 입을 모아 아저씨를 자랑하자 다른 통로에서는 주민들의 볼멘 목소리가 높아갔다. 옆 통로 경비아저씨 좀 보라는 말들이 오고갔다. 급기야 다른 통로에서는 주민과 경비원사이에 작은 다툼이 있었다. 똑같이 주민들의 돈으로 월급을 받는데 어찌 두 사람은 그렇게 다르냐고 했다.

그 소동이 아저씨에게 예상치 못한 일을 안겨 주리라고는 누구도 생각하지 못했다. 아저씨는 늘 하던 대로 일을 했고 다른 통로의 경비원들은 가끔 삼삼오오 모였다 헤어지곤 했다. 아저씨의 얼굴빛이 쓸쓸해 보일 때쯤 목화에는 탐스러운 다래가 열렸다. 복숭아 모양의 다래가 토실해질 쯤 아저씨가 보이지 않았다.

아저씨가 며칠 동안 보이지 않자 나는 다른 경비원에게 아저씨에 대해 물었다. 경비원은 아저씨가 건강이 좋지 않아 그만두었다는 말을 했다. 한마디 말도 없이 가 버린 걸로 보아 많이 위독한 게 아닌가 싶어 마음이 쓰였다. 아저씨가 떠난 뒤 음식물수거통은 오물이 묻어 더러워져갔고 제대로 분리가 되지 않은 쓰레기통은 지저분했다. 아저씨의 부재 흔적들이 군데군데 보이기 시작할 때 아래층 새댁에게서 아저씨에 대한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

아저씨는 군 고위 간부로 명예퇴직을 하셨다. 절도 있는 생활이 몸에 밴 사람이 갑자기 할 일이 없게 되자 못 견뎌하셨다. 그래서 가족들의 만류도 뿌리치고 이곳에 오셨다. 그런데 다른 통로의 경비원들이 아저씨를 못마땅해 했다. 때마침 관리비를 줄이는 방편으로 경비원을 줄이자는 말이 오고가는지라 경비원들은 긴장하고 있던 터였다. 아저씨의 그런 행동이 다른 경비원들의 눈에는 혼자만 살아남으려는 행동으로 보였던 것이다. 경비원들 사이에서 은근한 따돌림과 괴롭힘을 당하던 아저씨는 스스로 그만 두었던 것이다.

다래가 열리고 한참이 지나도 다래는 벌어지지 않았다. 나는 조바심이 났었다. 날씨는 추워지는데 이러다 목화솜이 열리지 않으면 어떡하나 싶어서였다. 늘 조바심을 내며 목화를 봐왔는데 오늘 드디어 솜꽃을 피운 것이다. 목화솜을 만져보았다. 따뜻하다.

일을 즐길 수 있는 아저씨와는 달리 일이 밥벌이인 사람들을 위해 아저씨는 조용히 떠났을 것이다. 그리고 어디에선가 또 목화를 심고 계실 것 같다.

나는 조심스럽게 솜꽃 한 송이를 땄다. 내년에는 내가 심을 요량이다.

두 번씩이나 꽃을 피우는 목화를 따서 집으로 돌아오는 동안에도 경비원은 단잠을 자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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