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줄자 본문
줄자/이미경
샤방한 옷들이 눈앞에서 펼쳐졌다. 재빠르게 훑어보고는 마음에 드는 원피스에 마우스를 갖다 대었다. 오른쪽 버튼을 누르자 화면이 바뀌면서 옷의 치수가 보인다. 팔 길이를 재기 위해 줄자가 필요한데 어디 있는지 모르겠다.
달팽이처럼 몸을 감은 줄자를 찾은 건 둘째 아들 방에서였다. 책상 한가운데서 나보란 듯이 누워있는 막대자와는 달리 몸을 둥글게 말고 책상 구석에 수줍게 세로로 서 있었다. 막대자의 기세에 눌려 주눅이 든 것 같아 안쓰러웠다. 줄자의 끝을 살짝 잡아당겼다. 억눌러 감았던 감정을 내뱉듯이 줄자가 풀려나온다.
“엄마에게 나는 부끄러운 아들이지요?” 뜻밖의 말을 들은 건 둘째가 대입 시험을 치르고 난 후였다. 눈에서는 눈물이 폭포처럼 쏟아지고 있었다. 그러더니 어깨를 들썩이며 꺼이꺼이 울기 시작했다. 그 아이에 대해서는 모든 것을 다 안다고 생각했는데 이게 무슨 날벼락이란 말인가.
아들만 있는 나에게 있어 둘째는 딸 같은 존재였다. 내가 바쁠 때면 세탁기의 빨래를 꺼내 탈탈 털어서 반듯하게 널어주기도 했고 피곤하다는 엄살에는 쪼르르 다가와 발 마사지를 해주었다. 나란히 마스크 팩을 하고 누워 이야기를 나누는 것도 둘째였다. 엄마 앞에서는 늘 밝은 아이였다. 순간 많이 당황스러웠다. 왜 그렇게 생각하느냐는 물음에 형은 공부를 잘해서 원하는 대학에 갔는데 자기는 그저 그런 대학에 가야 하니 모자라는 사람 같다고 했다.
둘째는 조용한 성격에 다정다감하고 잔정이 많다. 초등학교 수학여행 때 만원을 가지고 가서 자신을 위해 통 크게 다 쓰고 온 큰 아이와 다르게 둘째는 이천 원을 가지고 가서는 엄마에게 줄 돼지 인형을 사는데 다 써버렸다. 따뜻한 마음이 있는 둘째에게 난 막연한 믿음이 있었다. 조금 느리게 가지만 큰 걱정을 안 했다.
그런 내 마음과 달리 둘째는 스스로 형의 그림자에 갇혀 허우적거리고 있었나 보다. 남들 앞에서는 형을 자랑스러워하면서도 형에 대한 열등의 상처를 혼자 싸매고 있었다. 그저 숫기가 없다고 생각했는데 형과 비교하며 자신감을 잃어가는 줄은 몰랐다.
며칠을 제 방에서 꼼짝하지 않던 둘째는 갑자기 춤을 배우겠다고 했다. 움츠러드는 자신을 세상을 향해서 조금씩 꺼내려는 몸짓 같아 반가웠다. 줄자처럼 자신을 감았다 풀었다 하며 조금씩 밖으로 나오기를 바랐다. 그러나 아이는 세상 밖으로 나오는 것을 생각보다 힘들어했다. 스스로 입은 마음의 상처는 생각보다 깊은 듯했다.
아이를 데리고 심리 상담 선생님을 찾아갔다. 상담 선생님에게서 들은 말은 충격이었다. 첫째와 둘째를 차별 없이 키웠다고 생각했는데 아이는 차별을 받았다는 것이다. 아이는 초등학교 때 형이 95점을 받아와도 엄마는 더 잘할 수 있었다며 형을 나무라면서 자신은 70점만 받아와도 엉덩이를 툭툭 치며 칭찬을 했다고 했다. 그것은 공부에 소질이 없는 둘째를 위한 내 나름의 배려였다. 그것을 차별로 받아들일 줄은 꿈에도 몰랐었다.
자신감이 넘치고 빠른 첫째와 달리 둘째는 부끄러움이 많고 매사에 조금 느렸다. 아이의 특징을 파악하고 나는 나름대로 둘째를 배려하며 키웠었다. 혹 아이가 성적으로 스트레스를 받을까 봐 형과 비교하지도 않았다. 시험을 못 쳤다며 풀이 죽어있으면 오히려 성적은 조금씩 올리면 된다고 말해주었는데 형처럼 야단을 치지 않아서 공부를 열심히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아이는 혹 형보다 뒤처지는 자신을 엄마가 싫어할까 봐 엄마 눈에 거슬리는 행동은 하지도 않았고 엄마를 많이 배려했다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둘째의 심리는 불안했다고 했다. 억눌린 감정 또한 많을 것이라 했다. 눈물이 쏟아졌다. 모질어서 상처를 주는 것 보다 몰라서 상처를 주는 경우가 더 많은 것이 세상일인 것 같았다.
고맙게도 둘째는 대학에 들어가더니 조별과제가 있으면 자청해서 대표로 발표하며 스스로 자신감을 가지기 시작했다. 사람 앞에 서는 것이 떨리지만, 발표 후에 듣는 교수님의 칭찬이 좋다고 했다. 덩달아 학교 성적도 올라갔다. 형이 과외를 해서 적지 않은 용돈을 벌자 자신도 용돈을 벌어보겠다며 나갔다가 풀이 죽어 돌아왔다. 형만큼 돈을 벌려면 하루 8시간을 일해도 안 된다는 것을 알았다며 좌절하더니 이내 장학금을 타는 것으로 용돈에 대한 상처를 해결해 나갔다.
줄자의 끝을 살짝 놓자 뜨르륵 힘차게 말려 감겼다. 원통 안에 감긴 줄자의 길이처럼 둘째는 내실을 단단히 다지며 성숙해 갈 것이라 믿는다. 감긴 줄자를 막대자 옆에 나란히 놓는다. 현실은 과일 하나를 사도 비교해서 사고 사람을 평가할 때도 경쟁이라는 방법을 통해서 비교한다. 원하든 원하지 않든 간에 든 끊임없이 누구와 비교를 당하며 제 몫의 삶을 살아야 한다. 조금은 피곤한 세상에서 자신에 대해서 정확히 알기 위해 줄자의 끝을 부지런히 감았다 풀었다 하는 한 막대자 옆에서 기죽어 있던 짜리몽땅한 줄자는 더는 없을 것이다. 그렇게 조금씩 세상을 향해서 조금씩 꺼내다 보면 어느덧 1M가 넘고 2M가 넘어갈 것을 믿는다. 품고 있는 줄자의 길이는 자신을 아는 만큼 믿는 만큼 더 길어지리라.
세상에는 쓰임이 없거나 존재할 가치가 없는 것은 없다. 많이 쓰이고 적게 쓰이는 차이가 있을 뿐이다. 지금처럼 곡선을 재는 데 필요한 줄자가 없었다면 딱 맞아 떨어지는 원피스를 사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줄자의 끝을 길게 당겼다가 놓아본다. 경쾌한 소리를 내며 줄자가 또르륵 감긴다. 단단히 감긴 줄자를 책상 한가운데에 있는 막대자 옆에 나란히 놓는다.
이미경; 수필세계 신인상 등단, 영남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졸업, 수필세계 작가회, 대구 문인협회 수필사랑 회원, 대구수필가협회 총무 간사, 제1회 프런티어 문학상 수상, 제1회 대구일보 경북문화체험 전국수필대전 동상수상(2010년)
대구의 수필 10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