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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생연분 본문

소금인형의 수필

천생연분

소금인형 2012. 9. 16. 21:28

 

천생연분 / 이미경

 

모를 일이다. 좌회전 우회전을 외치며 부지런히 왔는데 또 길이 미로처럼 느껴진다. 오늘도 목적지 주변을 몇 번 돌아야 할 것 같은 예감에 조수석에 앉은 나는 슬슬 불안해진다. 남편의 눈치를 살피는데 등줄기에서 식은땀이 흐른다. 오는 내내 길은 체한 것만큼 답답했고 날씨 또한 찜질방 같았으니 분명히 길치라는 말로 짜증을 내며 잔소리를 해댈 것이 분명했다.

그깟 맛 난 음식 혼자 좀 먹었기로 무에 그리 마음에 걸려 꼭 남편을 데리고 오고 싶어 안달했을까 싶다. 먹지 않은 듯 시치미 딱 떼고 있다고 누가 뭐라 그럴 사람도 없는 데 말이다. 이런저런 눈치를 보면서도 굳이 남편을 데리고 나와 매번 듣기 싫은 후렴구 같은 잔소리 듣는 내가 나도 이해가 안 된다.

며칠 전 친구가 괜찮은 밥집이 있다며 데리고 갔다. 식당 마당에는 소담스러운 야생화가 여기저기 피어서 바람에 한들거렸고, 한지를 바른 문들과 통나무로 된 식탁이 마음을 편하게 했다. 커다란 접시에 얌전하게 담긴 음식은 보기에도 깔끔했고 맛 또한 좋았다

남편은 시골에서 태어나고 자라서인지 고향을 느끼게 해주는 정서를 좋아한다. 그런 분위기와 음식이 맛있는 집을 가끔 알게 되면 남편이 먼저 떠오른다. 그래서 남편과 꼭 같이 와보는데 내가 길치라는 게 문제다. 이 길인 것 같아 들어서면 아니고 이번에는 정말 저 길이 맞는 것 같아 들어서면 또 아니다. 결국, 몇 바퀴를 돌다가 목적지를 찾는 사람은 남편이다. 왜 맛집은 하나같이 대로변이 아닌 골목 안에 있는 것인지 애먼 장소가 원망스럽다.

분명 지금쯤 짜증이 뚝뚝 떨어지는 얼굴로 실타래 같은 잔소리를 슬슬 풀 때가 되었는데 어찌 조용하다. 잔소리를 잊은 것일까? 아니면 나이가 들어도 여전히 길치인 아내가 오히려 가련한 것일까?

사람의 감정은 참 묘한 데가 있다. 잔소리가 없으면 좋아해야 하는데 침묵이 어색하다. 나의 잔소리가 어느 날 멈추었을 때도 남편 역시 이러한 기분이 들었을까 그래서 장을 뜨던 그날 남편은 나를 보고 당신도 늙나보다고 말했던 것 같다.

해마다 장 담글 때가 되면 남편이 맨 처음 하는 일은 장독을 사러 가는 일이다. 장독이 일회용 그릇은 아닐진대 우리 집은 그러하다.

결혼을 하고 나는 장을 손수 담가 먹기 시작했다. 잘 띄운 메주를 사다가 소금물을 풀어 장을 담그는 일이 재미있었다. 염도를 잘 맞추어야 장이 짜지도 않고 변하기도 않기에 소금물의 염도를 맞추는 일은 적당한 긴장감을 주어 좋았다. 그러고 난후 장물의 숙성을 위해 결 고운 햇빛이 부지런히 장독을 기웃거리게 하려고 독 뚜겅을 여는 일과 베란다 문을 열어 순한 바람을 불러오는 일이 즐거웠다. 먼지 없는 독을 날마다 닦으며 간장색이 조금씩 검게 변해가는 것을 보는 것도 좋았다. 그렇게 서너 달이 지나고 장 뜨는 날이면 남편은 어김없이 사고를 냈다. 독을 씻어준다며 독에 기다란 실금을 내놓았다.

나는 새로 산 장독이 아까워서 물 묻은 독이 미끄러운 줄 모르냐며 듣기 싫은 소리를 남편에게 했다. 매사가 그렇게 조심하지 않는다며 잔소리를 들어 놓았다.

내 잔소리가 갈바람 낙엽처럼 폴폴 날리는 것으로 장 담기가 끝나고 나면 독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남편이 가져다 버린 것이다. 처음에는 물기 없는 것을 넣으면 되는데 버렸다며 또 듣기 싫은 소리를 했었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넣어 둘 것도 딱히 없는 독이다. 농사를 짓는 것이 아니니 보관할 만한 곡식이 있는 것도 아니고 김장김치는 김치 냉장고에서 보관하니 큰 독은 장을 담글 때만 소용되는 물건이었다.

올해도 남편은 어김없이 장독에 금을 내었다. 정확히 열다섯 번째였다. 나는 늘 해오던 잔소리를 대신 다친대는 없느냐는 말을 했다. 독을 씻던 남편의 하얀 머리가 민들레 홀씨처럼 바람에 나부끼고 있는 것이 보였기 때문이었다. 문득 독을 깬 이유가 독을 다루는 것이 서툴러서가 아니라 이제 힘이 부쳐 들지 못한 것 같았다.

남들은 우리 부부를 보고 천생연분이라 말을 했지만 나는 썩 수긍하지 않았다. 우리 부부는 다른 점이 정말 많다. 남편은 맵고 짠 양념으로 맛을 낸 음식을 좋아하지만 나는 음식 고유의 담백함을 살린 맛을 좋아한다. 남편이 감성적으로 일 처리를 한다면 나는 이성적으로 처리한다. 동적인 것을 좋아하는 남편과 달리 나는 정적인 것이 더 좋다. 그런데 지금 생각해보니 잔소리하는 것이 딱 천생연분이다.

굳이 독을 씻는다며 고생은 고생대로 하고 좋지 않은 잔소리를 15년이나 꿋꿋이 들은 남편이나 오늘처럼 길치에서부터 시작하여 자존심 상하는 말까지 번번이 듣는 나를 보면 둔하거나, 잊어버리기를 잘하는 선을 마주 잡고 있는 천생연분이 틀림없다. 천생연분이란 모든 면에서 잘 맞는 부부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지겨운 잔소리를 들으면서도 한 방향으로 가는 것밖에 모르는 미련한 짝을 이르는 말이 아닐까

 

  수필사랑 22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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