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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양연화 / 이미경
시간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젊고 건강했던 육체에서부터 올곧았던 정신까지도 시간 앞에서는 천천히 무릎을 꿇는다. 누구에게나 다 적용되는 시간의 횡포 앞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는 것일까 우울의 강을 서성이고 있는 어머니를 떠올릴 때마다 드는 생각이다.
어머니의 전화를 받은 것은 현관문을 나설 때였다. 점심 약속이 있어서 아침에 서둘러 운동을 하러 가는 중이었다. 어머니는 장을 담으려고 생수를 사다놨는데 아무리해도 생수병 뚜껑이 열리지 않는다며 전화를 하셨다. 오늘은 약속이 있으니 내일 장을 담그러 가겠다고 해도 막무가내로 짜증을 내셨다. 정 바쁘면 병뚜껑만 열어놓고 가라는 거였다. 덩달아 나도 짜증이 났다. 장을 넉넉히 만들어 한통 드릴 테니 올해부터는 장을 담그지 말라고 말씀 드렸는데도 어머니는 기어이 당신이 담그겠다고 하셨다. 몸이 불편하니 보나마나 그건 내 차치가 되어 두 번 일을 할 게 뻔한데도 고집을 피우셨다.
생수병을 앞에 놓고 전전긍긍하거나 불편한 몸을 탓하며 우울해 하는 모습을 상상하며 달려왔는데 어머니의 모습은 뜻밖이었다. 사진첩을 가득 가져다놓고 한장 한장 펼치고 계셨다. 사진첩을 보고있는 어머니의 미소는 들꽃처럼 잔잔했다. 이때가 참 좋았을 때라며 뭉툭한 검지로 한 장의 사진을 가리켰다. 국민학교 6학년 때, 어머니와 우리 네자매가 달성공원에서 찍은 사진이었다. 전화 목소리와는 달리 편안하게 웃고 있는 어머니의 표정을 보고는 안심이 되었다. 뇌졸중으로 한쪽 손과 다리가 불편한 어머니는 겨울이 되면서 바깥바람을 거의 쐬지 못했다. 휴일이면 가끔 가까운 곳으로 드라이브를 시켜드리지만 지팡이나 유모차에 의지해 혼자 다닐 때만큼의 갈증은 풀지 못하시는 것 같았다. 그래서인지 자주 우울해 하셨다. 그럴 때마다 내가 옆에 있어주기를 바랐다.
어머니가 가리키는 사진을 한번 슬쩍 보고는 바쁘게 종종거리며 장독에 생수를 붓고 소금을 풀었다. 계란으로 염도를 맞춘 다음 메주를 넣으려는데 메주는 내일 띄울 거라며 그대로 두라고 하셨다. 머리가 찌근거렸다. 어머니의 목적은 다른데 있었다.
한 동안 친정에 가지 않은 것은 여러 가지 일로 조금 바쁘기도 했지만 다른 이유가 있었다. 몸이 자유롭지 못하게 된 후 어머니와의 대화는 아주 단순해졌다. 의미전달을 위해서 주고받는 것이 아니라 어머니가 하시는 이야기를 일방적으로 듣고 있어야 했었다. 대부분은 내가 전혀 모르는 이웃 사람의 집안이야기나, 살아오면서 겪은 이야기들이었다. 즐거웠던 이야기보다는 어머니가 살아오면서 억울했던 이야기를 하소연 하듯이 반복하셨다. 말 할 대상이 없어서 그렇겠거니 생각하면서도 서너 번 같은 이야기를 들을 때면 나도 한계에 부딪쳤다. 그러다보면 내 의견을 말하게 되어 어머니를 더 외롭게 만들었다. 그런 날은 마음이 한없이 무거웠다. 혹 편한 사이라는 이유로 서로의 마음에 상처가 생길까 걱정이 되어 한 동안 친정에 가지 않았더니 어머니는 나름대로 나를 부를 궁리를 하신 모양이었다.
달성공원에서 찍은 사진은 내가 가진 최초의 컬러사진이기도 했다. 초록바탕의 꽃무늬 원피스를 입고 있는 사진 속의 젊은 엄마의 모습이 참 풋풋했다. 어머니가 말하는 ‘참 좋았을 때’를 숨은 그림 찾듯 찬찬히 사진을 들여다보았다. 그날은 분명 어머니가 아닌 우리 자매가 ‘참 좋았던 때’ 이었다.
달성공원에서 사진을 찍은 날은 아버지께서 외박을 하신 날이었다. 어머니는 아버지 회사에 가자고 하시며 우리를 앞장세웠다. 그날 우리는 아버지 회사 근처 중국집에서 아버지와 자장면을 먹었다. 그리고 아버지가 퇴근해서 오실 때까지 달성공원에서 놀았었다. 어머니께 물어 본적은 없지만 어른이 된 후 그 사진을 볼 때마다 봄바람이 잠깐 아버지 가슴에 스민 게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머니가 말하는 ‘참 좋았을 때’란 젊음이 아닐까 생각하고 있는데 또 다시 엄마의 하소연 넋두리가 시작되는 기미가 보인다. 이번에는 바리게이트를 치듯 내가 먼저 말을 했다.
“우리 엄마는 좋은 기억도 많을 텐데 왜 하필이면 불편한 기억만 떠올리며 우울해 하는 것일까요?”
어머니는 좋은 기억이 없다며 한숨을 내쉬셨다. 나는 빙그레 웃으면서 사진 한 장을 가르쳤다. 남동생 돌 사진이었다. 한복을 입은 어머니가 남동생을 안고 있는 사진이었다. 딸만 내리 넷 낳고 아들을 얻은 어머니의 얼굴에는 자랑스러움이 가득 묻어있었다. 사진을 보는 동안 어머니의 얼굴에는 미소가 폭죽처럼 터졌다. 대여섯 권의 사진첩에는 불행했던 순간이 하나도 담겨있지 않았다. 사진첩을 보면서 추억과 마주한 어머니와 나는 오랜만에 웃었다. 어머니의 마음을 어둡게 하는 기억들 대신 행복만이 봉인되어있는 사진첩의 사진들을 어머니의 머릿속에 영화 필름처럼 감을 수 있다면 좋겠다.
내가 들은 어머니의 이야기는 대부분 사람살이에서 상처 받은 이야기들이었다. 가족 또한 어머니에게 알게 모르게 상처를 준 사람일 것이다. 그런데도 주위에 사람이 없는 것을 못견뎌하신다. 그러고 보면 상처받고 다쳐도 여전히 사람을 그리워하는 병을 천형처럼 가지고 살아야 하는 게 우리네 삶인가보다.
어머니가 달성공원에서 찍은 사진을 보고 ‘참 좋았을 때’라고 한 것은 비록 상처를 주고받아도 가족과 부대끼며 살았던 때를 말하는 것 같았다. 아버지도 작년에 돌아가시고 자식들도 제 둥지를 만들어 떠나버렸다. 외로움이 어머니의 우울증을 깊게 하는 것 같아 가슴이 아팠다.
약속 때문에 일어서며 외투를 걸치는 나에게 어머니가 말씀하셨다.
“고추장 거리 사다 놨다. 내일은 고추장 담가서 가져가거라. 김장김치며 고기며 내가 네한테 얻어먹은 게 많아서 그런다. 남거든 나도 좀 주고.”
내일은 어머니가 좋아하는 꽃을 사들고 고추장을 담그러 친정에 가야겠다. 어머니는 여전히 내 옆에서 듣기 싫은 잔소리를 하실 테지만 누가 알겠는가. 어쩌면 그것 또한 어머니에게는 ‘참 좋았던 때’로 기억 될 수도 있지 않을까. 인생에 있어 아름답고 행복한 때를 뜻하는 화양연화는 사람마다 다를 것이다. 어머니가 생각하는 아름답고 행복했던 순간이란 식구들과 부대끼며 살아간 순간순간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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