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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의 물방을 본문

소금인형의 수필

신의 물방을

소금인형 2012. 9. 16. 21:44

 

신의 물방울 /이미경

 

나는 술을 거의 마시지 못한다. 알코올이 잘 해독되지 않는 체질 탓이다. 냄새만 맡아도 어지럽다. 어쩌다 한 모금 마신 날은 혼자 다 마신 것처럼 얼굴은 잘 익은 토마토가 되어 같이 있던 사람들 보기가 민망해진다. 뿐만 아니라 가슴도 두근거리고 머리가 아프며 몸이 가렵다. 남들은 술을 마시면 기분이 좋아 진다고 하는데 나는 오히려 괴로우니 술을 가까이 하지 않는다. 그러나 술자리가 주는 분위기를 좋아해서 불러주는 친구가 있으면 거절하지 않는다. 물론 그런 일은 거의 없다. 같이 취해 아우러져야지 멀쩡한 정신으로 안주나 축내고 있는 사람을 그 누가 좋아 할까. 하지만 술맛도 모르는 사람이 무슨 문학을 하느냐며 비아냥거리는 친구만은 예외였다.

친구에게서 전화가 온 것은 저녁을 먹고 설거지를 할 때였다. 우리 집 앞에 있는 술집이라며 잠시 보자고 했다. 벌써 한 잔 했는지 전화선을 타고 오는 목소리에 취기가 가득했다. 1분 안에 나오지 않으면 우리 집으로 쳐 들어온다고 했다. 친구의 목소리에서 느껴지는 취기로 봐서 빨리 나가지 않으면 정말 우리 집으로 올 것 같았다.

남편 친구들은 대부분 술을 좋아하는 사람들이다. 그래서 남편은 술을 좋아하고 즐긴다. 자주 술을 마시며 취중 실수를 친구처럼 거느리고 다닌다. 그럴 때마다 나는 사람은 어떤 친구를 가까이 하느냐가 참 중요하다며 잘 난 체를 했었다. 내 주위에는 늘 새로운 것에 도전하는 사람이 많아 나도 그렇게 살고 있다며 으스댔다. 친구의 등장으로 남편에게 한 말이 무안해질까봐 서둘러 친구에게 달려갔다.

친구는 안주로 얼큰한 탕을 시켜놓고 혼자 술을 마시고 있었다. 무슨 일 있느냐고 물었더니 히죽 웃으며 딴청이었다. 신이 인간에게 준 선물 가운데 가장 마음에 든다며 술병을 들어 보였다. 신이 준 이 물방울이 없으면 세상살이가 더 신산할거라며 술을 내게 권했다. 신기하게도 몸이 술을 받아들였다. 친구와 다르게 한 번에 다 마시지는 못했지만 술을 거부감 없이 마셨다. 술기운 탓인지 늘 듣던 음악이 감미롭게 귀에 착착 달라붙었다. 머릿속으로 흥얼거리고 있는데 친구의 고함소리가 들려왔다. 화장실을 다녀오겠다던 친구가 취중에 술을 먹고 있는 남자 손님의 뒤통수를 때려 싸움이 난 것이다. 술에 취해 해롱대는 친구의 모습이 참을 수 없을 만큼 경박해보였다. 신의 물방울은 무슨 얼어 죽을 신의 물방울인가 싶었다. 그럴 수만 있다면 차라리 먼지라도 되어 그 자리를 피하고 싶었다.

친구 대신 사과하는 나를 상대편 남자는 알아보는 듯했다. 하필이면 우리 집 위층 아저씨였다. 취할 대로 취해 말이 꼬이는 친구와 나를 싸잡아 한심하다는 눈으로 보고 있었다. 내가 술 한모금만 마셔도 얼굴이 붉어진다는 것을 그 남자가 알 리 없었다.

악몽 같은 일을 뒤로 하고 집으로 왔을 때 문을 열어준 사람은 남편이었다. 현관에 신발을 벗어 놓기 바쁘게 남편은 설거지 팽개치고 나가더니 먹지도 못하는 술까지 먹고 왔다며 잔소리를 해댔었다. 술을 빨리 해독시키지 못하는 간 때문에 술 냄새가 많이 났었나보았다. 부엌으로 가서 설거지를 하는데 가슴 밑바닥에서부터 부아가 거품처럼 일었다. 내가 매일 그러는 것도 아니고 일 년에 몇 번도 안 되었다. 그러는 사람은 어떤가. 열손가락을 열 번 꼽아도 모자랄 거 같았다. 더군다나 남편은 고주망태가 될 때까지 술을 마시지만 나는 그런 일은 없었다. 이참에 속 시원하게 마음에 있던 말 다 뱉고 싶었으나 아들이 있었다. 한 잔의 술도 술이라고 술이 술을 불렀다. 슬그머니 지난 와인 투어 때 손수 담근 포도주가 생각이 났다. 정성들여 만들어 잘 보관해 두었으니 맛있게 숙성 되었을 터였다.

 

베란다로 가서 술을 한잔 가득 부어들고 부엌으로 왔다. 설거지를 안주 삼아 홀짝 홀짝 마시기 시작했다. 접시하나 씻고 술 한 모금 마시고, 냄비하나 씻고 한 모금을 마셨다. 달짝지근한 게 술술 넘어갔다. 얼마 되지 않아 몸이 뜨거워지는가 싶더니 기분 좋은 나른함이 덮쳤다. 지금껏 이해되지 않던 모든 상황들이 그럴 수도 있지.’로 변했다. 구름 속을 맨발로 산책하는 기분이 이럴까 흥얼흥얼 콧노래까지 나왔다. 사람들이 왜 술을 마시는지 알 것 같았다. 가슴으로 이해 안 되면 머리로라도 이해하며 살아야지 싶었다. 남편도 회사에서 받는 스트레스가 많을 텐데 나라도 받아주자는 생각이 들었다. 남편 친구 아무개 씨는 경제력 있는 여자를 만나 떵떵거리며 산다는데 능력이라곤 없는 나를 만나 고생하는 남편이 가여웠다. 몸이 버들가지처럼 휘어진다싶더니 솜사탕 위에 누워 있는 것 같았다. 아주 편안해지면서 남편과 아들의 목소리가 윙윙거리며 아득하게 들려왔다.

누군가 내 옷을 벗기는 것 같은 느낌에 눈을 떴을 때는 침대 위였다. 남편은 내 옷을 벗기고는 따뜻한 수건으로 내 얼굴을 닦고 있었다. 분명 조금 전까지 부엌에서 설거지를 하고 있었는데 어찌된 일일까. 아들 말에 의하면 주방에서 갑자기 쿵하는 소리가 들리더란다. 텔레비전을 보다가 놀라서 달려와 보니 내가 거친 숨을 몰아쉬며 쓰러져 있었다했다. 뇌가 나를 보호하기위해 잠시 기절을 시켰던 것이다.

참을 수 없는 두통으로 다시 눈을 뜬 건 캄캄한 새벽이었다. 사람들이 말하는 골 때린다의 의미를 확실하게 체험한 것 같았다. 어둠속을 더듬어 서랍에서 진통제를 꺼내먹었다. 좀처럼 가라앉지 않는 두통에 뒤척이다가 거실로 나왔다. 어둠속에서 보이는 사물들은 다 낯설어 보였다. 날마다 보던 TV, 좌우로 추를 흔들고 있는 벽시계도 분명 익숙한 듯하면서도 생소했다. 소파에 몸을 기대고 앉아 한참을 우두커니 있었다. 알 수 없는 눈물이 쏟아졌다. 슬픈 것도 아픈 것도 아닌데 눈물샘이 고장 난 것처럼 줄줄 흘렀다. 몸에 가득 차 정화되지 못한 삶의 노폐물이 눈물이 되어 빠져 나가는 듯했다. 후련했다.

문득 친구가 생각났다. 술이 없으면 세상살이가 더 신산할거라며 술잔을 들어보이던 얼굴이 떠올랐다. 술을 좋아한다고만 생각했었던 친구의 현실이 투명하게 보였다. 술의 위로가 자주 필요했을 만큼 아팠을 친구의 삶이 느껴졌다. 오래전 남편과 사별하고 아이를 키우며 사는 친구의 아픔에 무뎠던 내가 보였다. 경험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언제나 먼 길을 돌아와서야 타인을 이해하게 되는 덜 여문 나를 보았다. 가장 가까이에 있는 친구의 그림자도 보지 못했던 나는 삶 속에서도 이면을 바라보는 것에 얼마나 서툴렀을까. 나로 인해 더 외롭고 아파했을 사람들은 없었던 것일까.

이제 더는 야누스의 얼굴을 가지고 있는 술을 무작정 싫어 할 수 없을 것이다. 그 짧은 시간에 술에 대해 무지한 내가 인간의 내면을 이해하는 맛과 삶의 문리를 터지게 하는 향기를 알게 되었으니 말이다. 친구가 술을 신의 물방울이라고 했던 말의 의미를 어렴풋이 알 수 있을 것도 같았다.

 

2012년 수필가협회 연간집 (대구의 수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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