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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어 본문

소금인형의 수필

북어

소금인형 2012. 9. 16. 21:47

북어 /이미경

    

무언가에 화들짝 놀라서 깼다. 책을 읽다 잠깐 잠이 든 모양이었다. 라디오에서 명태가 흐르고 있었다. 순간 온몸에 전율이 일었다. 지하 음악실에서 100번도 넘게 반복적으로 들었던 노래, 그 노랫소리였다.

중학교 1학년 음악 시간에 늘 클래식을 들었다. 수업종료 20분 전이면 선생님께서는 조용히 음악을 틀었다. 그리고는 돌아서서 창문만 바라보고 계셨다. 클래식을 접해 본 적이 없었던 터라 처음에는 그 시간이 무척 지루했었다. 그러나 얼마 되지 않아 그 시간은 물고기가 물을 만나는 시간만큼 생기발랄한 시간으로 바뀌었다. 딴짓하기에 아주 좋았다. 짝꿍이 애수라는 소설을 읽는 동안 나는 에릭시갈의 러브스토리에 정신을 팔았다.

기말시험이 있던 날, 기금까지 들은 곡으로 듣기 시험을 치겠다는 선생님의 말씀에 하늘이 노래졌다. 집에 클래식 음반이 있는 것도 아니었고 클래식 음악 감상실에 가서 듣는다 한들 짧은 시간에 그 생소한 음악을 다 기억하기란 불가능했다. 그나마 다행스러운 것은 두 개의 답 중 하나라도 맞으면 반 점수를 주겠다고 하셨다.

내 생애 그렇게 열심히 답안지를 작성해 보기는 그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음악을 들으며 베토벤이라고 썼다가 모차르트로 고치고 다시 바그너로, 교과서에서 들은 적 있는 음악가의 이름은 죄다 시험지에 썼다가 지우기를 반복했다. 지성이면 감천이라더니 하늘도 보기가 애처로웠는지 지우개 똥이 책상 위에 수북이 쌓일 때쯤 우리나라 가곡이 내 귀에 들렸다. 귀를 쫑긋 세우고 들어보니 바다에 사는 생물에 소주 안주라 했다. 동네 어귀 가게에서 아저씨들이 오징어와 소주를 마시던 모습이 생생하게 떠올랐다. 두 번 생각 할 것도 없이 답안지에 오징어라고 또박또박 적었다.

교실 문이 열리고 채점한 시험지와 함께 공포의 레드봉을 든 선생님이 들어오셨다. 레드봉은 빨간 은박지로 만든 먼지떨이였다. 보기에는 엉성해 보여도 그것이 허공을 한번 가르고 엉덩이 쪽으로 떨어지면 엉덩이가 네 쪽이 되고, 손바닥으로 떨어지면 저도 모르게 살풀이춤을 추게 된다는 전설의 물건이었다. 선생님이 부른 열댓 명 중에는 내 이름도 끼어있었다.

느그들은 점수 줄라고 낸 문제도 틀리나. 이런 문제를 틀린 학생은 맞을 자격도 없다카이.” 선생님은 슬며시 레드봉을 내려놓았다. 살다 보면 시험 좀 틀릴 수도 있는 거지, 뭐 그런 심한 말을 하시나 생각하면서도 내 입에서는 안도의 한숨이 흘렸다. 그러나 그때는 알지 못했다. 레드봉보다 더 무서운 것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 줄은.

선생님의 호출로 맞을 자격도 없던 아이들이 모인 곳은 음악실이었다. 선생님은 아이들을 쭉 훑어보더니 장난스럽게 음악을 들려주었다. 같은 노래를 반복해서 두어 시간 들었다. 명태라는 노래였다. 음악실을 나가면서 혼이 나간 듯 허방대었다. 그날 이후 음악 시간에 졸고는 있을지언정 딴짓은 하지 않았다.

잠만 들려고 하면 감푸른 바다, 바다 밑에서하는 환청이 들렸다. 중저음의 목소리가 귀신 목소리인양 음산하고 무서웠다. 가위에 눌린다며 안방에서 자는 날이 많아지자 내 속을 모르는 어머니는 쓴 한약을 한가득 안겼다. 공부하느라 허해져서 그런 거라며 열심히 먹으면 좋아질 거라고 하셨다.

그 사건 이후 음악 선생님의 인기도는 바닥으로 내려갔다. 인기를 먹던 사람처럼 선생님의 몸도 수척해져 갔다. 마르는 것은 몸만이 아닌 것 같았다. 생각도 혀도 굳었는지 말수도 점점 줄어들었다. 선생님에 대한 소문이 들린 것도 그즈음이었다. 이혼을 했다는 것이다. 아이들은 그 충격으로 성격이 이상해졌다며 쑥덕거렸다. 누가 봤는데 선생님이 술을 마시고 집으로 돌아가다 자기가 자기 다리를 꼬아 넘어지는 모습이 가관이었다는 말도 들렸다. 서서 창문을 내다보던 선생님은 피곤한 듯 의자에 앉아계시는 시간이 많아졌다. 음악을 틀어 놓고 퀭하게 앉아 있다가 고뇌에 일그러지는 표정이 순간순간 지나갔었다. 선생님에 대한 소문은 하루가 다르게 늘고 있었다. 술에 취해 누구와 다투는 모습을 보았다는 둥, 길거리에 쓰러져있었다는 둥 소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다녔다. 그즈음 선생님의 부고가 들렸다. 밤늦게 술을 마시고 집으로 귀가하던 선생님은 오토바이 사고를 당하셨다. 선생님의 운구 차량이 운동장을 돌고는 가뭇없이 사라질 때 우리들의 눈물은 황토 운동장에 붉은 꽃을 피웠다.

살아온 날이 살아갈 날보다 많아지면서 독이 있는 생물에 쏘인 것처럼 생생했던 기억도 시간이라는 중화제 앞에서 서서히 무너진다. 소소한 일상이어서 또는 버거운 기억이라 그러했을 것이다. 그러나 기억이란 즐겁고 소중한 기억만 새겨지는 게 아닌가 보다. 기억 저편에 북어처럼 말라 있던 아프고 슬펐던 일이 어느 날 느닷없이 싱싱한 명태가 되어 수면으로 뛰어오르기도 한다.

지금 내 곁에는 케케묵은 먼지를 덮어쓰고 있던 북어 한 마리가 과거를 거슬러 현재형이 되어 머무르고 있다. 30년도 훨씬 넘은 일이지만 추억 속에서는 여전히 아프다.

 

- 대구 출생

- 1회 프런티어 문학상 수상 (2005), - 수필세계 신인상 등단 (2006)

-1회 대구일보 경북문화체험 전국수필대전 동상수상(2010)

- 대구문인협회, 수필세계작가회, 수필사랑회원, 대구 수필가협회 총무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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