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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부 / 이미경
남편에게는 자랑처럼 생색내는 것이 하나있다. 남들은 몇 년에 한번 갈까 말까한 제주도를 만사 제처 놓고 일 년에 두세 번씩은 데리고 가지 않느냐는 것이다. 그러면서 시집 하나는 잘 온 게 분명하다는 뒷말을 붙이는 것도 잊지 않는다. 본댁이 제주인데 그렇게 능청스러울 수가 없다. 나는 대답 대신 작은 웃음을 보낸다. 내 맘을 알 리 없는 남편은 그 말에 대한 긍정인 웃음인 줄 알았는지 한술 더 보탠다. 자기를 만나기전 까지는 제주도 구경은 못했을 거라고 한다. 맞는 말이다. 그렇지만 내가 미소를 지은 진짜 이유는 따로 있다. 고추당초 보다 맵다는 시집살이와 고부갈등이 없기 때문이다.
폐백인사가 끝나자 맏동서인 형님은 빈방으로 나를 안내했다. 실내 장식이라곤 궤짝 밖에 없는 것으로 봐서 평소에 창고용도로 쓰는 방인 것 같았다. 혼자 있으니 긴장이 풀리면서 스르르 눈꺼풀이 내려앉았다. 나도 모르게 꾸벅꾸벅 졸고 있는데 굵고 억센 목소리가 또렷이 들렸다. ‘폭삭 속아수다’ 눈꺼풀이 놀라서 제자리로 돌아갔다. 궁금해진 나는 창호지가 발린 문틈으로 살짝 밖을 내다보았다. 어머님이 하객들에게 답례품을 나누어 주고 계셨다. 그러면서 ‘폭삭 속아수다’ 라는 말을 계속하시는 것이었다. 답례품을 받은 하객들은 위로의 말이라도 하는지 뭐라고 한마디씩 하셨다. 경사스런 결혼식 날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기에 저리도 속았다는 말을 계속하시는 것인지 두려움이 밀려왔다. 그렇지 않아도 폐백인사를 드릴 때 친척 어른께 ‘폭삭 속아수다’를 들은 후로 내 신경은 곤두서있었다. 나는 아침부터 지금까지의 시간을 쫙 펼친 후 다시 하나하나 짚어 나갔다.
결혼식을 마치고 피로연을 하기위해 시댁으로 돌아오니 마당에서는 벌써 잔치가 벌어지고 있었다. 두레상에 음식을 차려 나르는 아주머니들과 하객들의 소리가 뒤섞인 마당 풍경은 장터를 방불케 했다. 삼삼오오 모여 앉은 아낙들은 알 수 없는 수다를 주고받으며 목젖이 보이도록 웃다가 내가 보이자 주위로 몰려왔다. 그리고는 소금과 팥을 뿌렸다. 잡귀를 물리치기위한 의식인 것 같았다.
방으로 들어온 나는 드레스를 입은 채로 상을 받았다. 신부상이라고 했다. 웨딩케이크를 중심으로 수많은 음식이 색색의 과일과 꽃으로 장식되어 있었다. 고명으로 쓰인 귤의 새콤달콤한 맛과 딸기의 상큼한 맛이 코끝으로 전해졌다. 시골이라는 것이 믿기지 않을 만큼 화려한 밥상에 시장기는 돌았지만 불편한 옷 때문에 먹는 시늉만 했다.
상을 물리고 한복으로 갈아입었다. 친인척들에게 폐백인사를 드리기 위해서였다. 어머님께서는 절을 할 때마다 절 받은 분과 나와의 관계를 열심히 설명하셨지만 머리에는 하나도 들어오지 않았다. 다리가 아파 올 때쯤 허연 수염을 기르신 어른께 절을 올렸다. 치맛자락이 발에 밟혀 엉덩방아를 찧을까 걱정하고 있는데 그 분이 ‘폭삭 속았다’는 말을 하셨다. 나에게 한 말인지 어머니께 한 말인지는 분명하지 않았지만 ‘폭삭 속았수다’ 라는 그 말이 절하는 내내 머릿속에서 뱅뱅 돌았다. 절을 올려야 할 사람들이 얼마나 많던지 현기증이 나며 다리가 후들후들 떨릴 때쯤에야 폐백인사는 끝이 났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짚이는 게 없었다. 그렇다면 뭘 오해하고 계시는 걸까. 철이 없었던 나는 물설고 낯선 곳에 덩그러니 남겨진 것 같아 눈물이 볼을 타고 흘렀다. ‘폭삭 속았수다.’ 라는 말이 ‘수고하셨습니다.’ 하는 제주 방언인 것을 안 것은 한참이 지난 뒤였다.
결혼 초에는 시댁 어른들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는 나는 방긋방긋 웃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어머님은 며느리를 위해 천천히 아주 열심히 가르쳤지만 설명하는 단어가 죄다 제주도 말인지라 못 알아듣기는 마찬 가지였다. ‘감제’를 가져오라는 어머니 말에 발음이 비슷한 감자를 갖다 드리면 어머니는 아무런 말없이 당신이 고구마로 바꾸어 가져오셨다. 제주도에서는 감자를 ‘지슬’이라고 하고 고구마를 ‘감제’라고 말한다는 것을 체험으로 익힐 수밖에 없었다. 이렇듯 신라 며느리와 탐라국 시어머니 사이에는 의사소통이 불가능했으니 고부간의 갈등이 끼어들 리 만무했다.
세월이 두께가 쌓이면서 제주도 말을 조금은 알아듣게 되었다. 하지만 어머니와 나 사이를 바다가 또 가로 막고 있었다. 물리적인 바다야 비행기로 한 시간이면 건널 수 있는 거리지만 삶에서 느끼는 심리적인 바다는 멀고도 멀었다. 그러다보니 서로 상대방에 대한 형식적인 예의와 배려로 고부관계가 형성되었다.
어머니는 일 년에 몇 번 오지 않는 며느리를 손님처럼 맞이했다. 집안은 늘 깨끗이 청소가 되어 있었으며 냉장고에는 찬거리로 가득했다. 시골 살림이라는 게 웬만큼 닦아서는 눈에 띄게 표시가 나지 않는다. 며칠 전부터 바쁜 농사일 틈틈이 윤이 나도록 청소를 하셨을 마음을 알기에 나도 성심성의로 어머니를 대했다. 순박하게 늙어가는 촌부의 아내인 어머니를 존경했고 줄 것이 없어 못 줘 미안해하는 어머니를 사랑했다. 어머니 또한 낯선 시댁 문화를 군말 없이 따라주는 며느리를 귀여워하셨다.
친구들이 모이면 그들 중 누군가가 시집살이 이야기를 할 때가 있다. 시집에 대해서는 너나없이 주거니 받거니 하며 목소리를 높이기가 일쑤다. 남편을 가운데 놓고 시어머니와 밀고 당겨본 경험이 없는 나는 딱히 할 말이 없었다. 그저 친구의 말에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평범한 시어머니에 평범한 며느리가 만났음에도 고부갈등이 없는 특별한 나를 친구들은 부러워했다.
나이가 어느 정도 들고 보니 갈등이 깊었던 친구일수록 시어머니에 대한 연민도 깊었다. 미움도 정이라고 때로는 모자람 때문에, 때로는 너무 넘침 때문에 상처를 주고받았던 날들을 아파하고 안쓰러워했다. 서로 늙어가는 눈을 바라보며 여자로서의 동질감을 느끼는 듯했다.
해풍을 많이 맞거나 일교차가 큰 곳에서 자란 과일이 단단하며 맛과 향이 좋다고 한다. 사람 관계 또한 좋았다 나빴다 하며 시나브로 든 정이 고부간의 깍듯한 배려보다 못하지는 않을 것 같다. 어찌 보면 세상의 진정한 맛이란 사랑과 미움, 이해와 오해, 기쁨과 슬픔 같은 대립 항들의 굴곡진 조화 속에서 만들어지는지도 모를 일이다. 달기만 하거나 쓰기만 한 것보다는 달고 쓰고 짜고 맵고 신 것이 어우러진 맛에 더 묘한 감흥이 있지 않은가.
뒤돌아보면 나와 어머니의 관계는 말이 통하지 않으니 갈등도 없었고 깊은 정도 없었다. 그러기에 얼었다 녹았다 하면서 맛과 색이 골골하게 오른 친구의 고부관계를 한번 쯤 부럽다고 말하면 과욕이라고 나무랄지도 모르겠다.
뭔가가 잘못 되었다면 바꾸거나 고치면 되는 게 세상일이다. 하지만 되돌릴 수 없는 것이 있는 것 또한 세상일이다. 어머니는 몇 해 전 자그마한 유택으로 거처를 옮기셨다.
2013년 문장 가을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