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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파 본문

소금인형의 수필

한파

소금인형 2012. 9. 16. 21:52

 

한파 /이미경

 

 

혹한이 찾아왔다. 이월의 느닷없는 추위는 모든 것을 주춤하게 만들었다. 한파가 몰고 온 눈보라에 비닐하우스와 축사는 무너지고 길들도 지워졌다. 초등학교는 임시 휴업에 들어갔다. 나도 동장군의 기세에 눌린 것인지 온몸에 한기가 돌았다. 이런 날은 꼼짝하기가 싫다. 입 다문 조개처럼 집안에 숨고 싶다는 유혹이 손짓한다. 결국 헬스도 쉬기로 했다.

식구들이 빠져 나간 집은 고요하다 못해 적막하다. 창문으로 들어오는 투명한 햇살만이 한가로이 이곳저곳을 기웃거리며 빛을 나눠주느라 바쁘다. 빛이 닿은 물건들은 유리알처럼 반짝 반짝 빛을 내며 생기가 돌았다. 이런 풍경을 배경으로 음악을 틀고 좋아하는 차를 마시거나 책을 뒤적이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만월처럼 충만한 때가 있었다. 그러나 언제부턴가 혼자 덩그마니 남겨진 공간이 겨울 벌판처럼 다가오며 우울해졌다. 이런 감정은 나를 혼란스럽게 했다. 누군가가 빈 둥지 증후군 같다고 귀띔해 주었다. 재미있다는 영화를 봐도 감동이 없었고 맛있는 음식 앞에서도 식욕이 없었다. 어디에도 의미가 없는 것이 살아있는 것도 죽은 것도 아닌 세계에 있는 것 같았다. 몸이 기억하는대로 청소를 하고 빨래도 하며 식구들의 식사를 챙길 뿐이었다.

오랫동안 숨쉬기운동만하고 살아온 내가 헬스장에 등록을 한건 석 달 전의 일이었다. 빈 둥지 증후군을 앓는다는 말을 듣고 친구가 한달음에 달려왔다. 산을 자주 타는 친구였다. 마음이 이울었다 싶으면 숨이 턱에 차오를 때까지 한 발 한 발 산을 오른다고 했다. 그러다보면 머릿속이 훤하게 맑아진다며 웃었다. 육체적인 노동이 정신에 베푸는 은혜에 대해서는 동의를 하는 터라 운동을 하기로 했다.

주위에 좋은 시설과 차별화된 프로그램을 내세우는 휘트니스 센터가 많이 생겼지만 예전에 다니던 헬스장을 고집한건 집에서 가장 가깝다는 이유였다. 모든 게 귀찮아진 터여서 차림새에 신경 쓰지 않고 다녀야 꾸준히 운동을 할 것 같았다. 헬스장은 변한 게 별로 없었다. 운동기구의 위치도 그대로였고 살짝 금간 거울에 나뭇잎 스티커가 붙은 것도 그대로였다. 예전부터 다니던 뽀글이 아줌마도 있었다. 익숙한 것이 주는 편안함이 좋았다.

트레이너는 유산소 운동으로 시작해서 유산소 운동으로 마무리하는 게 좋다고 했다. 습관처럼 러닝머신으로 눈을 돌렸다. 살을 확실하게 빼겠다는 듯 숨이 턱에 차게 헉헉대며 달리는 아줌마와 유산소 운동과 근력운동을 동시에 하겠다고 무거운 아령을 들고 뛰는 아저씨가 보였다. 이어폰을 귀에 꽂고 스텝을 밟듯 경쾌하게 운동하는 아가씨와 시간을 죽이기 위해 왔는지 TV를 보며 세월아 네월아 걷는 사람도 있었다.

기계를 작동시켰다. 천천히 걷고 나니 찌뿌듯하던 몸이 풀리면서 마음이 한결 가벼워진다. 언제나 정신이 육체를 지배할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육체가 오히려 정신을 지지하고 있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는다. 온 몸에 땀이 나기 시작했다. 속도를 높여 빠르게 걷다가 뛰기를 반복하다보니 250칼로리가 소모되었고 한 시간이 경과되었다고 붉은 빛이 점멸하며 알려주었다.

알람은 세월 위에서 열심히 걸으며 뛰었는데도 여전히 제 자리 걸음만 하는 내 삶을 언뜻 비춰주는 것 같았다. 열심히 산다고 살았음에도 한 발자국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한 것 같은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며 차가운 수렁 속으로 빠져들었다. 러닝머신 위를 걷는 것처럼 내 삶이 지리멸멸해지며 갑자기 한기가 돌았다.

 

뽀글이 아줌마의 부음은 나를 혹한 속으로 밀어 넣었다. 며칠 보이지 않기에 여행이라도 간 줄 알았다. 가끔씩 가슴이 답답해서 바람을 쐬러간다며 결석을 하곤 했었다. 아무리 열심히 운동을 해도 살이 빠지지 않는다며 넉넉한 뱃살을 흔들며 넉살 좋게 웃던 모습이 눈에 선하다. 세월의 흔적인양 엉성해진 머리를 뽀글뽀글한 파마로 가리고 늘 해바라기처럼 웃던 사람이었다. 긍정적이고 유쾌하게만 보였던 아줌마가 극단적인 선택을 했단다. 유서도 발견 되었다고 했다. 아마도 그동안 앓던 우울증이 더 깊어 졌을 거라며 사람들이 수군거렸다. 아들과 딸을 의사로 키워놓았기에 헬스회원들은 그녀를 부러워했다. 나이 드신 어른들은 하나도 아니고 둘을 의사로 만들려면 자식 뒷바라지에 노고가 많았을 거라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그럴 때마다 자식들이 알아서 잘 자라 준거라며 겸손해 하면서 환하게 웃었다. 세상에서 맘대로 되지 않는 것 중에 하나가 자식문제라 했는데 뽀글이 아줌마는 복이 많은 사람이라는 생각만 했었다. 운동을 마치고 목욕탕에 가면 나에게 미안해 할 거 없다며 억지로 때를 밀어주어 아직도 등이 따끔거리는데 느닷없는 들리는 부음이라니.

번듯한 명함 한 장 없이 제 자리 걸음만 걷고 있는 내 모습에 뽀글이 아줌마가 다가와서 겹쳤다.

주춤거리던 혹한이 물러갔나 보다. 창문을 여니 날빛이 좋다. 아파트 조경수에 가지치기가 한창이다. 나무에 물이 오르기 전에 불필요한 가지를 정리해 주어야 동면에서 깬 나무들이 더 튼튼한 모습으로 기지개를 켤 것이다. 윙윙거리는 전기톱 소리에 내 마음속에서 웃자라던 우울의 가지들이 우두둑 잘려나간다.

다시 땀에 옷이 젖을 정도로 운동을 해야겠다. 그동안 몸도 마음도 꽁꽁 얼어버린 탓에 운동을 거의 못했다. 그래도 추위를 예전보다 훨씬 덜 타고 자리보전 하지 않은 것을 보면 러닝 머신위의 걸음이가 제자리걸음만은 아니었지 싶다.

남은 세월을 살아가다보면 혹한처럼 제자리걸음만 걷는 것 같은 허무한 날이 올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한파는 언젠가 반드시 물러가는 기후 변화에 불과한 것이 아니겠는가.

 

 

  수필사랑 23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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