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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폐 본문

소금인형의 수필

유폐

소금인형 2012. 9. 16. 21:48

 

 

-쥘악

 

유폐 / 이미경

 

자정이 가까워져 오는데 친구로부터 문자가 왔다. 삶이 바쁘다며 자주 연락을 하지도 않던 친구였다. 눈에서 멀어지면 마음에서도 멀어진다는 말은 맞는 말이다. 그저 무소식이 희소식이거니 하며 지내다 보니 친구의 안부가 그다지 궁금하지도 않았다.

친구는 뜻밖에도 공장에 다닌다고 했다. 지금은 휴식 시간인데 문득 생각이 나더라는 것이다. 사는데 별 어려움이 없던 친구였다. 천성이 부지런해 취미처럼 일을 손에서 놓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는 있었다. 하지만 적지도 않은 나이에 야간 근무라는 문자는 내 생각의 가지를 여러 갈래로 뻗게 했다.

 

친구 부부는 알뜰하고 부지런해서 결혼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상가건물을 샀다. 그곳에서 가게를 열었다. 한 곳에 늘 붙박이처럼 있어야 하고 밤늦게 문을 닫아 피곤하다는 말은 했지만 만족스러워했다. 상가를 살 때 빌린 대출금만 갚으면 해외로 여행을 가자며 들떠있었다.

몇 년이 지나 대출금을 갚은 친구는 장사를 그만두었다며 그동안 본의 아니게 소원(疏遠)했으니 관계회복을 위해 모임을 하자고 했다. 친구는 그 모임에서 몇 번은 잘 나오다가 이내 못 온다는 문자를 보내왔다. 시간이 지루해서 취직했는데 생각만큼 짬이 없다는 것이었다. 남은 친구들은 서너 번 만나다가 모임을 없앴다. 굳이 모이지 않아도 언제든지 만날 수 있는 친구들이었기 때문이었다.

그 후에 친구가 제법 큰 아파트를 샀다는 말이 들려왔다. 상가 건물 한 채에 집이 두 채니 경제적인 기반은 잘 다져놓은 것 같았다. 축하도 할 겸 전화를 했다. 전화를 받은 친구는 아파트 대출금을 갚기 위해서 더 열심히 살아야 한다고 말했다. 친구의 재산은 조금씩 늘어났을지는 몰라도 목소리에서는 피곤함이 둥둥 떠다녔다.

 

문자를 받고 나서 날이 밝기까지 내 생각의 가지는 끝도 없이 내닫았다. 빚보증을 잘못 섰거나 사업을 하다가 잘못되었을 거라는 막다른 골목까지 와서야 생각이 마무리되었다. 며칠 전 들은 K의 말과도 아귀가 들어맞았다. 친정에 왔을 때 잠깐 보았는데 행색이 궁상맞더라고 전했다. 그때는 친구가 워낙 검소해서 그리 비췄을 거라는 생각으로 마음에 담아 두지 않았다.

친구와 전화 통화를 기다리는 시간이 여삼추 같았다. 그동안 너무 무심했다는 자책감과 친구에 대한 측은한 마음이 파도가 되어 출렁거렸다. 얼마나 힘들었으면 그 시간에 그런 문자를 넣었을까 싶어 가슴이 아렸다.

친구의 목소리는 쇠잔했다. 그러나 친구에게서 들은 말은 충격적이었다. 딸들이 대학에 들어갔다며 열심히 일해야 한다는 것이다. 상가 건물에서 다달이 나오는 돈도 있지 않으냐는 내 말에 상가보증금에 은행 융자를 받아 땅을 사 두었기에 상가에서 나오는 돈은 고스란히 은행으로 들어간다고 했다. 친구는 돈이 생길 때마다 땅을 사두었다고 했다. 그러나 지금은 부동산들이 살 때보다 가격이 내려서 팔 수가 없다는 친구의 말이 건조하게 들렸다. 건강을 위해 밤에 일하는 것은 그만두는 게 좋겠다는 내 말에 친구는 아직은 젊으니 걱정하지 말라는 답을 하고 전화기를 내려놓았다.

 

아직 젊어서 괜찮다는 친구의 말이 머릿속에서 오랫동안 맴돌았다. 젊다는 기준을 어디에 두느냐에 따라 젊다고도 할 수 있고 그렇지 않다고도 할 수 있는 나이지만 왠지 친구가 점점 유폐되어 가고 있는 느낌이었다. 돈만 모이면 부동산을 사고 그것을 담보로 또 다른 부동산을 사서 움켜지는 미로에 유폐되어 영원히 나오지 못할 것 같은 생각에 가슴이 답답했다.

풍족하면 풍족한 대로 욕심이 생기고 부족하면 부족한 대로 살아지는 게 우리네 삶이다. 물이지만 마실 수 없는 바닷물 같은 재물을 가득 쌓아두기 위해 다람쥐 쳇바퀴 돌 듯 살고 있는 친구를 생각하면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창밖에는 꽃 잔치가 한창이었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그 나무 옆을 지날 때마다 분주한 노동의 소리가 들렸다. 부지런히 뿌리로부터 물기와 양분을 빨아올리더니 어느새 유치원의 아이들처럼 꽃송이가 쏟아져 나왔다. 살랑거리는 봄바람이 간지러운 듯 꽃 웃음이 환했다. 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밝아지는 꽃 사진을 스마트 폰으로 찍었다.

 

‘친구야, 이리도 환한 꽃이 피기 위해 필요한 땅은 한 평이면 충분해 보이는구나.’

 

수필세계2013년 여름호

 

 

 

수필세계 신인상 등단, 제1회 프런티어 문학상 수상, 수필세계 작가회, 대구문인협회 회원, 수필사랑회원, 대구수필가협회 총무간사, 영남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졸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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