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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금인형의 수필

폭삭속았수다

소금인형 2013. 7. 30. 12:18

 

폭삭 속았수다/ 이미경

 

 

책을 펼치는 프엉의 얼굴이 그다지 밝아 보이지가 않는다. 문화적인 차이로 상담 요청을 해온 것이 불과 며칠 전인데 그새 또 무슨 일이 있었나 싶어 내 마음도 덩달아 먹구름이 드리운다. 다문화 가정은 원활하지 못한 의사소통과 문화의 차이로 서로 상처를 입는 경우가 많다. 특히 경상도의 억센 억양은 말뜻을 모르는 외국인에게 화를 낸다는 오해를 가끔 사기도 한다.

사람은 세상을 산 기간만큼 촉수도 예민해지는 법이다. 굳이 말하지 않아도 느낌으로 알아채는 일이 젊은이보다는 나이 든 사람이 훨씬 빠른 것을 보면 말이다. 평소와 다른 분위기가 감지된 내 촉수 탓에 손은 책을 펼치고 있지만, 눈은 프엉의 눈을 응시하고 있다.

프엉은 애써 입꼬리는 올리고 눈꼬리를 내리고 있지만 그리 길지 않은 시간에 나는 그녀의 눈빛을 읽었다. 그 눈빛은 아주 익숙한 눈빛이었다. 아, 저 눈빛은 바로 25년 전 나의 눈빛이었다.

남편의 본가는 탐라국이다. 제주에서 결혼식을 올리고 친인척들에게 폐백인사를 드렸다. 어머님께서는 절을 할 때마다 절 받은 분과 나와의 관계를 열심히 설명하셨지만. 머리에는 하나도 들어오지 않았다. 하지만 폐백 중에 들은 ‘폭삭 속았수다’라는 말은 종일 내 머릿속을 맴돌았다. 폐백이 끝나자 시어머님은 나를 잠시 쉬라며 빈방으로 안내했다. 딱히 할 일이 없었던 나는 결혼식의 피로감을 느끼며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바로 그때 다시 들리는 ‘폭삭 속아수다’. 분명 어머님의 목소리였다. 눈꺼풀도 놀라서 제자리로 돌아갔다. 궁금해진 나는 문틈으로 밖을 살짝 내다보았다. 어머님은 집으로 돌아가는 친척들에게 ‘폭삭 속아수다’ 라는 말을 하고 계셨다. 친척들도 어머니께 위로의 말이라도 하는지 뭐라고 한마디씩 하고는 총총 발걸음을 옮기셨다. 경사스런 결혼식 날 도대체 무슨 일에 저리도 속았다는 말을 계속하시는 것일까? 혹 나에게 하는 말은 아닌가 하는 두려움이 밀려왔다. 그렇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짚이는 게 없었다. 철이 없었던 나는 물설고 낯선 곳에 덩그러니 남겨진 것 같아 눈물이 볼을 타고 흘렀다. ‘폭삭 속았수다.’ 라는 말이 ‘수고하셨습니다.’ 하는 제주 방언인 것을 안 것은 한참이 지난 뒤였다.

“프엉 무슨 일이에요? 선생님에게 말해 봐요”

프엉은 괜찮다는 말을 했다. 한국어가 익숙하지 않은 결혼 이주여성들은 ‘아무 일 없어요.’ 혹은 ‘좋아요’ 등의 말을 괜찮다는 말로 표현한다. 자신의 속내를 드러낼 사람이 아무도 없는 그녀에게 나는 언니나 친정어머니가 되어 다가가지만 그녀가 원하지 않는다면 어쩔 수 없는 노릇이다. 공부를 시작 할 요량으로 책을 읽는데 프엉이 조심스럽게 시어머님과 남편이 자신의 흉을 봐서 기분이 안 좋다는 말을 했다.

“그래요? 무슨 말을 했는데요?”

“몰라요 선생님 생각나지 않아요. 새벽 일찍 남편과 어머님 둘이 말했어요.”

도대체 모자 사이에 어떤 말이 오갔기에 프엉이 저러는지 답답하기 그지없었다.

“프엉 생각나는 단어 하나만 말해 봐요.”

단어를 전달하지 못하는 프엉도 답답하기는 마찬가지인 양 얼굴을 찌푸렸다.

한국에 온 지 일 년이 넘은 프엉네는 요즘 경사스런 일이 있다. 프엉이 아기를 가진 것이다.

마흔이 넘어 첫 아이를 가진 프엉의 남편과 시어머니의 좋아하던 모습을 떠올리며 내가 문장을 하나씩 만들어 물어 보았다.

“프엉 시어머니께서 남편에게 혹시 이러지 않았어요? 프엉에게 관심 좀 가져라”

“아니에요. 관심이라는 말, 나 알아요.”

“그럼 프엉에게 조심시켜라” 프엉은 고개를 흔들었다.

아이를 가진 며느리에게 모질게 하지 않는 것이 인지상정이라 분명 프엉이 오해를 하고 있는 것 같았다. 프엉의 의혹을 깨끗이 해결해주면 좋겠지만, 역부족인 것이 안타까웠다. 그저 잔잔한 미소로 프엉의 마음을 어루만지다가 책으로 눈길을 주었다.

“ 별일 아닐 거예요. 신경 쓰지 말고 공부해요” 그때 프엉이 소리쳤다.

“맞아요! 선생님 신경이라고 했어요. 신경이 뭐에요? 선생님.”

신경이라는 말의 어감이 그렇게 좋지 않게 들리는 것일까? 나도 모르게 미소가 지어졌다. ‘관심을 가져라“는 말과 같다는 말을 하자 프엉의 얼굴에도 미소가 살짝 번졌다.

속정 많은 시어머니의 억센 말투에 뜻을 모르는 프엉은 그야말로 며칠 동안 폭삭 속아 혼자 애를 태웠으리라.

웃고 있는 프엉의 미소에 그 옛날 폭삭 속았수다의 뜻을 알고 나서 겸연쩍게 웃던 내 새댁시절의 풋풋했던 웃음이 겹쳤다.

불가에서는 인연을 이렇게 말하고 있다. 모든 것은 어느 날 갑자기 우연인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그 전에 만날 요인을 품고 있다가 시간적 공간적인 때가 닿아야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그동안 살림만 하던 내가 쉰이 넘어 본격적인 사회활동을 하게 되었다. 그 첫발이 하필이면 ‘다문화 가정 방문 교사’다. 신라에서 태어나 탐라국으로 시집간 내가를 이 일을 하고 있다는 것이 예사롭지 않다는 생각이 가끔 든다.

사람살이는 문화와 언어만 다를 뿐 거기서 거기지만 언어와 문화가 다른 사람을 대하는 일이 결코 쉽지는 않다. 프엉이 서로 다름에 속아 상처받는 일이 없이 없기를 바라는 내 마음이 실리기라도 한 듯이 책을 읽는 목소리에 힘이 들어간다. (영남일보2013년)

 

 

수필세계 신인상 등단, 제1회 프런티어 문학상 수상, 수필세계 작가회, 대구문인협회 회원, 수필사랑회원, 대구수필가협회 총무간사, 영남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졸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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