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tice
Recent Posts
Recent Comments
Link
«   2024/12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
Tags
more
Archives
Today
Total
관리 메뉴

수필가 이미경의 블로그 입니다

매실청 본문

소금인형의 수필

매실청

소금인형 2013. 8. 28. 22:49

매실청 / 이미경

 

숙성된 매실청을 보는 내 얼굴은 함박꽃이 되어간다. 시간에 삭힌 매실이 그렇게 맑을 수 없다. 세월이란 이렇듯 견고한 것을 부드럽게 풀어내고야 마는 것일까 잘 익은 매실 청을 나누어 병에 담는데 그녀의 안부가 궁금해진다.

그녀를 만나건 학교 도서관에서였다. 리포트에 필요한 책을 뽑으려는데 동시에 그녀의 손도 내가 집으려는 책으로 향했다. 같은 과 학생이었다. 그때 나는 마흔을 넘기고 만학에 들어서 있었다. 그녀 역시 오래전 대학을 졸업하고 회사에 다니다가 교사가 되기 위해 편입했다고 했다. 늦게 시작한 대학생활은 어색했다. 언니, 누나라고 부르는 학생들과는 세월만큼의 두꺼운 유리벽이 있었다. 나이만큼 뇌세포도 죽은 것인지 세 시간이면 끝낼 공부를 서른 시간을 해야 보폭을 맞출 수 있었다.

하루하루가 전쟁이었다. 아이들을 깨워 학교로 보내고 남편의 출근을 돕기가 무섭게 학교로 뛰는 생활이 계속되었다. 식구들이 나의 부재를 느끼지 않게 수업시간표를 짜다 보니 점심시간이 따로 없었다. 강의실을 이동하면서 김밥과 물을 그냥 삼키다시피 해야 했다. 그러나 정말 힘들게 하는 것은 취미삼아 학교를 다니는 팔자 좋은 여자로 여기는 눈이었다. 일주일에 등교는 몇 번 하느냐, 뭘 그리 열심히 하느냐, 대충 시간만 보내면 학점은 거저 주지 않느냐는 등 편안대로 말하는 사람들의 입에 엿이라도 물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녀 또한 서른 넘어 다시 시작하는 공부를 주위에서 입방아 찧는다며 상처받아 아파했다. 우리는 동병상련으로 빠르게 친해졌다.

그녀는 네자매 중에 둘째였다. 언니는 결혼해서 외국에서 살고 있었다. 아버지가 교통사고로 돌아가신 충격으로 어머니는 어른에서 소녀가 되었다. 예쁘고 좋은 것만 찾고, 떠나고 싶으면 말없이 며칠씩 여행을 가야만 어머니의 우울증을 잠재울 수 있다고 했다. 이제는 그녀가 어머니가 쉴 수 있는 튼튼한 그늘을 만들어야 하기에 교사가 되기 위해 편입했다. 서로의 상처를 쓰다듬고 싸매주면서 우리의 우정은 점점 돈독해갔다.

미혼인 그녀는 나보다는 시간이 많았다. 공부에 필요한 자료들을 그녀가 늘 미리 찾아 놓는 덕분에 가끔은 분위기 좋은 찻집에서 차를 마시는 여유가 생겼다.

중간고사를 하루 앞둔 날이었다. 그날은 집안 제사라서 어쩔 수 없이 결석을 해야만 했다. 시험을 앞두고는 교수님 대부분이 시험에 대한 정보를 주었기에 시험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면 휴대전화로 문자를 넣어 달라는 부탁을 그녀에게 했었다. 제사음식 준비로 한창 바쁠 때 그녀에게서 문자가 왔다. 복습만 했을 뿐 시험과 관련된 별다른 정보는 없다는 내용이었다.

답안지를 제출하고 복도에 서 있던 나는 심한 충격에 빠졌다. 이번 시험에 꼭 나온다며 가르쳐준 문제를 그녀가 나에게 전하지 않는 것이다. 세상의 모든 사람이 나에게 친절하기를 바란 건 아니었지만 가장 믿었던 사람이 그랬다는 사실은 좌절감을 주었다. 그녀를 믿었기에 시험에 관한 정보를 다른 이에게 묻지 않은 것이 내 자신이 바보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친하다고 생각한 건 순진한 내 생각, 내 착각이었던 것 같은 서운한 마음에 한동안 가슴앓이를 심하게 했다.

살다보면 어떤 일로 짧은 인연을 맺는 경우가 있다. 이런 만남은 좋지도 나쁘지도 않은 감정으로 서로 깍듯이 대하다가 헤어지는 사이어서 시간이 흐르면 곧 잊히기 마련이다. 차라리 그녀와도 그런 인연이었다면 그렇게 아파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렇듯 맛깔난 매실청이 되기 위해서는 매실과 설탕이 발효 과정을 거쳐야 한다. 새콤한 매실과 달콤한 단맛의 설탕이 어우러지기 위해 거품이 생기고 끓어오름 현상이 일어나는 시간을 겪어야하는 것이다. 매실과 설탕에는 고통과 인내의 시간인 셈이다. 이런 과정이 지나고 나면 거친 매실과 설탕이 미세하게 익어서 맛있게 숙성이 된다.

이제 와서 생각해 보니 그녀와 나는 발효되는 시간을 가지지 않은 설익은 사이었던 것 같다. 만학도라는 공통점으로 그저 서로의 입장을 이해하는 연민의 사이였던 것 같다. 차라리 그녀가 나에게 결정적인 실수를 했을 때 서운하면 서운한 감정을, 화가 나면 화난 감정을 그대로 전했더라면 지금 쯤 우리 사이는 더 깊어 있을지도 모르겠다. 서운한 감정을 앞세우며 혼자서 마음의 문은 닫은 것은 언니로서 성숙하지 못한 행동이었다. 그녀가 변명하든 사과하든 한번 부르르 끓어오르는 갈등의 시간을 겪었더라면 사람 때문에 가슴을 아파하지하지 않아도 되었을 것이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도 발효의 시간과 숙성의 과정은 필요한 것인 것 같다.

그녀의 실수가 고의적이었는지 아니면 자신도 미처 듣지 못해 전하지 못한 건지는 아직 알 수 없다. 설령 고의적이었다 하더라도 답장 없는 문자를 여러 번 보낸 것을 보면 화해의 몸짓임에 틀림없다. 매실청이 담긴 병 하나를 한지로 곱게 싸고 붉은 리본으로 이쁘게 묶었다. 언제 한번 만나자는 문자를 넣는 동안 몸보다 마음이 먼저 그녀를 만나기 위해 신을 신고 있다.

그녀의 실수를 용납하지 못해서 많은 시간을 괴로워했는데 이제는 흐르는 강물을 보는 것처럼 덤덤한 것을 보니 다쳐서 상한 내 마음의 결도 시간이 말갛게 삭혀 놓았는가보다.

  2013 수필사랑 24집

'소금인형의 수필' 카테고리의 다른 글

마당  (0) 2014.07.06
지팡이 / 이미경  (0) 2014.01.26
시소  (0) 2013.08.28
폭삭속았수다  (0) 2013.07.30
작전주   (0) 2012.11.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