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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당 본문

소금인형의 수필

마당

소금인형 2014. 7. 6. 20:31

마당/ 이미경

 

눈을 떴을 때 집에는 아무도 없었다. 늦잠을 잔 것이다. 잠시 두리번거리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시댁이었다. 지난밤 잠을 몹시 설쳤다. 설 명절을 쇠고 모두 제집으로 돌아가자 시아버님, 남편 그리고 나만 남았다. 하필이면 보일러 기름이 떨어져서 전기장판이 있는 아버님 방에서 세 사람이 잠을 청해야만 했다. 구순이신 아버님은 텔레비전을 친구처럼 끼고 사신다. 세상과 소통하는 유일한 문이다. 밤늦게까지 꾸벅꾸벅 조시면서도 전원만 끄면 보는 중이라면 못 끄게 했다. 그뿐만 아니라 담배를 얼마나 많이 태우시던지 내가 두더지가 된 기분이었다. 건강을 위해서라도 담배를 덜 태우라고 말씀드렸지만 잘 들리지 않는지 그냥 나를 보고 웃으셨다. 결국, 잠을 이루지 못하고 마당으로 나왔다. 칠흑이었다. 세찬 바람이 마당을 훑고 지나가는 을씨년스러운 소리가 분분했다. 달도 별도 바람에 떠밀려갔는지 하늘마저 캄캄했다. 커다란 종려나무가 바람에 머리채를 잡혀 끌려가는 모습이 어렴풋이 감지되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마음이 편안했다. 귀신울음 같은 바람 소리도, 간간이 들리는 이웃집 개가 짖는 소리도 어둠 속 마당에 서니 아늑하게 느껴졌다. 마치 어머니의 자궁에 든 기분이었다. 도시보다 농촌에서 식물들이 더 튼실하게 자라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다 어둠 때문이었다. 어둠 속에서 위안을 얻고 깊이 잠들어 진액을 모아 알차게 열매를 맺는 것이리라. 방으로 들어오니 남편은 술기운에 깊은 잠이 들었고 아버님께서도 곤히 주무시고 계셨다. 텔레비전을 끄고 누웠다. 등으로 전해지는 온기에 까무룩히 잠이 들려는 순간 ‘아이고 아이고’ 아버님의 잠꼬대가 들려왔다. 늙으면 가만히 있어도 뼈마디가 쑤신다는데 평생 농부로 사신 몸이니 오죽하랴 싶었다. 새벽녘까지 아버님께서 코 고는 소리와 ‘아이고’ 소리에 쉬이 잠들지 못하다가 잠시 잠이 들었던 모양이다. 집안 이곳저곳을 찾아보았으나 남편과 아버님은 보이지 않았다. 그들의 흔적을 지우기라도 하려는 듯 눈이 펑펑 내리고 있었다. 두 사람을 찾을 요량으로 아무 생각 없이 대문까지 나갔다가 멈추었다. 마당을 벗어나자 어디로 가야 할지 막막했다. 여전히 마당 밖의 세계가 너무 낯설게 느껴졌다. 어디쯤 있을 내 첫 발자국을 눈으로 더듬었다. 대구에서 자라 제주도가 고향인 남편을 만나 서툴게 찍었던 발자국은 여전히 이방인처럼 웅크리고 있을 것이다. 독특한 제주 방언과 섬 문화는 신라국과 탐라국의 거리만큼의 이질감이 있었다. 수고했다는 제주 방언인 ‘폭삭 속았수다’를 ‘다른 사람의 거짓말이나 꾀에 빠져서 넘어가다’로 오해하며 서운해했던 일과 고구마를 뜻하는 감저를 감자로 이해할 만큼 이 마당 안에서는 모든 것이 서툴렀다. 그럴 때 마다 혼자 마당을 걸으며 어색함을 달랬다. 문득 서러워져서 다시 집으로 되돌아왔다. 처음으로 마당에 찍힌 내 발자국을 보았다. 타원형이 그려져 있었다. 마당에 화석처럼 숨어있는 발자국들은 대부분이 타원형을 그리고 있을 것이다. 나간 사람이면 들어오고 들어온 사람이면 반드시 돌아 나갔을 테니까. 마당 위에 타원형으로 찍힌 발자국은 안녕하다는 증표였다. 몇 해 전 돌아가신 시어머니 생각에 눈시울이 뜨거워진다. 마당에는 어머님이 그려놓은 타원형이 수없이 많을 것이다. 초례를 치른 날부터 마당은 어머님의 생활 터전이었다. 육 남매의 첫걸음마를 가르치고, 자식들의 배필을 맞이했다. 알곡과 열매들을 마당에 널어 말렸다가 거두어들이던 곳이었다. 햇빛에 습기를 날린 곡식들은 정갈하게 갈무리되어 창고에 쌓이고 꾸덕꾸덕 말린 열매들은 장아찌로 저장되었다. 거둔 곡식들을 자식에게 나눠주기 위해 포장을 하고 자식들이 좋아하는 꽃을 짬짬이 가꾸며 기다리던 장소였다. 하지만 어머님의 마지막 발자국은 원을 그리지 못하였다. 걸어서 병원으로 가신 어머님은 마당 안으로 되돌아오는 대신 곧장 저승 문으로 걸어가셨다. 눈은 여전히 내리고 마당에 찍힌 내 발자국 위로 시나브로 흰 눈이 쌓였다. 다행이다. 여전히 서툰 내 삶의 흔적을 잠시라도 감출 수 있어서. 훗날 저승의 마루에 앉아 내 삶의 터전이었던 이승 마당을 바라보며 어떤 표정을 지을까? 살아간다는 것이 나에게는 여전히 서툴고 버겁다. 그래서 발자국 역시 조금 어설프게 찍힐 것이다. 그러나 진솔한 삶의 모습이니 아름다운 추억을 들여다보듯 담담히 바라보리라. 눈발이 차츰 거세졌다. 마당에 흰 눈이 겹겹이 쌓이면서 울퉁불퉁했던 마당이 팽팽히 당겨진 한 필의 비단 폭 같다. 나는 씩씩하게 발자국들 찍으며 마당 한 바퀴를 돌았다. 이방인처럼 웅크리고 앉아 제자리걸음만 하던 내 첫발자국이 쪼르르 달려와 함께한다. 성큼성큼 대문 밖으로 남편을 찾으러 나섰다. 용기를 내어 이웃집을 두르려 볼 참이었다. 그때 멀리서 두 사람의 모습이 보였다. 과수원에 다녀오는 길인지 주홍빛 귤을 들고 오는 부자의 모습이 한 폭의 그림처럼 스며들었다. 수필사랑 26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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