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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팡이 / 이미경 본문
지팡이 / 이미경
아침 운동을 갈 때마다 만나는 아름다운 풍경이 있다. 여든이 다 되어 보이는 노부부의 모습이다. 할아버지는 몸이 불편한 할머니 손을 잡고 하루도 빠짐없이 걷는 연습을 시켰다.
노부부를 처음 보았을 때 할머니의 몸은 마치 나무토막 같았다. 오로지 할아버지를 의지해 겨우 서 있는 모습이었다. 아마도 할머니는 뇌졸중 후유증인 듯했다. 할아버지는 할머니의 몸을 받치느라 땀을 뻘뻘 흘리고 있었다.
오랜 시간이 흐른 뒤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하나의 몸이 되어 걸었다. 아주 느린 걸음이었지만 할머니를 뒤에서 안고 걷는 할아버지의 모습은 발레리나와 발레리노의 몸짓보다 더 아름다웠다. 이 세상 어느 연인의 모습이 저리 다정할까 싶었다. 서로의 몸을 완전히 밀착시키고 걸을 때의 모습은 서로에 대한 믿음이 가득할 때라야 볼 수 있는 몸짓이었다.
지성이면 감천이라는 말은 진리였다. 벚꽃 비 하롱하롱 내리던 봄날은 두 분이 손을 잡고 걸었다. 걸음이 완전하지는 않았지만, 할머니는 할아버지 손을 지팡이처럼 의지하고 걸었다. 마치 이 도령의 손을 잡고 걷는 춘향이 같았다. 아주 짧은 순간 어화둥둥 내 사랑아 하는 사랑가가 울리며 그들 위로 떨어지는 꽃잎이 나비 떼가 군무하는 것처럼 보였다. 풋풋한 젊음 사랑도 예쁘지만 세월에 곰삭은 사랑은 감동이었다.
가끔 백년해로에 대해 생각을 해본 적이 있었다. 열렬한 사랑으로‘당신 덕분에’로 시작하지만 살다 보면 ‘당신 때문에’로 변하는 것이 얄팍한 사랑의 세태다. 삶이란 분명 몇 개의 비바람과 몇 개의 사막을 거쳐야 한다. 그 비바람과 사막이 만든 삶의 옹이를 잘 갈무리하며 넘어야만 노부부처럼 늙을 것 같았다.
노부부의 걸음은 이심전심이었다. 꽃잎이 눈처럼 쌓인 길을 앞만 보고 걸었다. 할아버지는 할머니를 아이 다루듯 조심했지만, 굳이 눈을 돌려 옆을 보거나 말을 하지 않았다. 무념무상의 얼굴에 몇 수의 앞을 볼 수 있는 국수(國手)의 눈을 가진 듯 보폭을 맞추며 걷고 있었다. 사랑이란 서로 바라보며 집착으로 생체기를 내는 것이 아니라 같은 방향을 바라보는 일이라는 것을 체득한 듯 보였다. 그 모습은 내가 지금까지 보아온 어느 것보다도 감동이어서 가던 걸음을 멈추고 오랫동안 내 눈에 담아두곤 했었다.
노부부와 연배인 친정 부모님도 저들처럼 사셨다. 어머니가 뇌출혈로 한쪽 몸이 마비되었을 때 아버지는 무슨 생각이셨는지 어머니 키에 맞는 지팡이부터 만드셨다. 아버지는 당신의 앞날을 예견이라도 하신 것일까? 얼마 되지 않아 아버지는 뇌출혈로 투병하시다가 돌아가셨다.
오늘은 아버지가 계신 추모공원에 가는 날이다.
아버지는 죽은 자의 아파트에 편히 계셨다. 그사이 동생네 부부가 다녀갔는지 질녀가 할아버지께 쓴 편지가 붙어 있었다. 삐뚤빼뚤 쓴 손녀의 편지를 읽은 아버지는 생전의 모습으로 웃고 계셨다. 그러고 보니 아버지가 저렇게 웃으시는 이유가 질녀의 편지 때문만은 아닌 듯했다. 아버지 옆집에는 곡주를 좋아하셨을 딸기코 아저씨가 이승에서 이사를 와 있었다. 밤이 되고 이승의 사람이 잠들면 두 분이 대작하며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눌 것 같았다.
아버지의 새로운 이웃을 둘러보는데 내 시선을 길게 끈 사진이 있었다. 남자분이었는데 왠지 낯이 익었다. 그분이 누구인지 아는 데는 그리 긴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이 대 팔 가르마에 검은 머리였지만 분명 할머니와 손을 잡고 걷던 우리 동네에서 보았던 그 할아버지였다.
그러고 보니 언제부턴가 할아버지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던 것 같다. 할머니 곁에는 할아버지 대신 지팡이가 있었다. 지팡이 모양이 특이했다. 종이우산을 접어 테이프로 감아 만든 듯 지팡이의 끝 부분이 둥글넓적했다.
늘 실과 바늘처럼 붙어 다니던 모습을 봐왔던 터라 그런지 할머니의 모습이 낯설기까지 했다.
아버지를 뵈러 갈 때의 마음과 달리 돌아오는 길이 숙연했다. 세상을 등진 이를 모셔오는 가족들의 통곡소리를 많이 들은 때문만은 아니었다. 할머니의 지팡이가 왠지 할아버지가 급히 만들었을 것만 같았다. 내 아버지가 그랬던 것처럼.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벤치에 앉아 계신 할머니를 만났다. 운동을 하시다 잠시 쉬는 모양이었다. 이마에는 땀이 송골송골 맺혀있었다. 끝이 둥글넓적한 지팡이를 벤치에 걸쳐 놓고 먼 하늘을 보고 계셨다.
노부부가 살아온 세월의 반 정도를 산 우리 부부는 가끔 ‘하는 거 봐가면서’라는 농담을 한다. 서로에게 뭔가를 요구할 때 당신이 나에게 해주는 것을 참고하여 대응하겠다는 의미다. 육신이 사그라지면서도 할머니의 지팡이가 되고자 했던 노부부의 사랑과는 차이가 있다. 아직은 서로가 건강하니 하는 푸념이라 생각하면서도 할아버지의 사랑 앞에서는 고개를 숙인다.
부부란 서로에게 지팡이 같은 존재이다. 사랑하고 미워하고 상처받으면서도 서로 의지하며 늙어가는 사이인 것 같다.
노부부나 우리 부모님이 긴 세월 동안 안개 빛 강을 건너고 애증의 협곡을 헤쳐 나올 수 있었던 것은 다 지팡이 같은 사랑 때문이리라.
슬며시 할머니 곁에 앉았다. 경건한 마음으로 할머니의 지팡이를 잠시 바라보다가 할머니의 시선을 쫓아갔다. 저녁 하늘빛이 유난히 고왔다.
수필미학2014 겨울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