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딜 본문
딜(Deal)
밥을 사겠다고 한다. 친구가 뜬금없이 밥을 사겠다고 한다. 당장 밥을 사지 않으면 큰일이라도 날것처럼 안달이다. 나는 접시 눈을 하고 친구를 바라본다. 친구는 평소 만 원 이상을 가지고 다니지 않는다. 쓸데없는 돈을 쓰지 않기 위함이라 했다. 그러다 보니 여럿이 모여 밥을 먹고 일어설 때면 화장실로 갔다가 누군가 음식 값을 치르고 식당 밖을 나올 때야 늘 허겁지겁 뒤따라 나왔다. 물론 친구에게는 나름의 이유가 있기는 했다. 8남매의 맏이인 친구는 아버지를 일찍 여의었다. 열네 살 때 막일을 나간 아버지가 머리가 아프다면 일찍 집에 들어오셨다. 아버지는 약을 사오라는 심부름을 시키면서 돈이 없으니 딱 한 알 만 사오라고 했단다. 약을 사 들고 왔을 때 아버지의 혼은 이승을 떠난 뒤였다고 했다. 그 후 친구는 늦은 밤부터 새벽까지 어머니와 둘이서 매일 떡을 빚었다. 지금도 문풍지 소리를 장단 삼아 떡 빚은 때를 생각하면 몸서리가 쳐진다고 했다. 결혼이라도 편한 곳으로 갔으면 좋으련만 흥부네와 다름없는 집의 9남매 맏며느리가 되었다. 여덟이나 되는 시동생, 시누이를 건사하려니 짠순이가 될 수밖에 없었다. 형편이 넉넉해진 후에도 굳어진 습관 인 자린고비 생활은 여전했다. 밥 한번 사는 일 없는 친구가 가끔 얄밉기도 했지만 언제부턴가 그러려니 했다. 식당의 테이블에 친구와 마주 앉는다. 멸치 다시향이 진한 국물에 뽀얀 김이 나는 칼국수를 앞에 두고도 식욕이 일지 않는다. 분명 밥을 사겠다는 이유가 있을 것만 같다. ‘돈을 빌려 달라면 어쩌지, 내가 이번에 적금 탈 게 있다는 말을 했던가? 어쩜 보증을 서 달라고 할지도 몰라.’ 오래전, 친구도 잃고 돈도 잃은 경험이 있는지라 가까운 사이일수록 돈 관계는 안하는 게 좋다는 것이 나의 철학이다. 사람이 사람을 속이는 것이 아니라 돈이 사람을 속였다. 어떻게든 친구가 맘 상하지 않게 거절해야 할 텐데 적당한 말이 떠오르지 않아 전전긍긍이다. 친구는 내 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칼국수를 후르륵 소리 나게 입으로 넣고는 깍두기를 냠냠거리며 맛있게도 먹는다. 그리고는 오늘 봉사활동을 갔는데 시간이 없어 점심을 걸렀다는 말을 한다. 친구는 수요일마다 봉사활동을 간다. 10년 동안 눈비가 내려도 한결같았다. 돈 쓰임새는 야박하지만 마음 쓰임새는 넉넉한 사람이다. 식사가 끝날 때까지 친구는 어떤 부탁의 말을 하지 않는다. 그냥 친구 혼자 밥 먹기 싫어 내게 식당가자고 한 것을 내가 괜히 설레발 친 것 같아 부끄럽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전화벨이 울린다. A에게서 온 전화다. 그 친구가 요즘은 만나는 사람마다 밥을 사고 선물을 주며 돈을 물 쓰듯 쓰고 다닌다는 소문이 장마철 푸른곰팡이처럼 퍼진다고 전한다. 점심을 먹은 후 생글생글 웃으며 계산을 하던 모습이 떠오른다. 무슨 좋은 일이 있느냐고 물으니 친구는 그냥이라고 대답했다. 좋은 일이 있는 게 분명하다. 로또에 당첨되었거나 숨겨둔 조상 땅을 찾기라도 한 것 같다. 아니 어쩌면 사두었던 땅의 시세가 몇 배로 올랐을 지도 모를 일이다. 정확하지 않는 이 믿음은 하루 볕이 무서운 봄풀처럼 내 마음 속에서 부쩍 부쩍 자란다. 창을 흔드는 바람소리가 오늘따라 더욱 거세다. 마음이 뒤숭숭한데 식구들의 귀가마저 늦다. 이런 날은 군에 간 둘째가 더 생각이 난다. 좀 늦다 싶은 날이면 혼자 있냐고 문자로 내 상황을 묻곤 하던 아이였다. 괜스레 냉장고 문을 열어보고 텔레비전 채널을 이곳저곳 돌리다 멈춘다. 흰 눈이 하얗게 덮인 최전방에서 철책 점검하는 군인들 모습이 보이기 때문이다. 살을 에는 찬바람을 맞으며 둘째도 저러고 있을 것이다. 자세히 보니 탈영병 소식을 전한다. 경계근무를 마치고 생활관으로 돌아오던 어느 병장이 근무하러 가던 병사들에게 수류탄을 던지고 총을 난사했단다. 아들은 지금의 혹한을 어떻게 감당하고 있는지. 가끔 부대에서 전화가 올 때면 잘 지내고 있으니 걱정 말라고 하지만 난생 처음 경험하는 일 앞에서 쩔쩔매고나 있지 않을는지 늘 걱정이다. 나도 모르게 두 손이 모아진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기도 밖에 없다. 옷을 갖춰 입고 성당으로 간다. 성당 안은 고즈넉하다. 제대(祭臺) 가까운 곳에 자매님 한분이 고개를 숙이고 있다. 그녀와 멀찍이 떨어진 곳에 앉아 두 손을 모은다. 더 낮아져서 순하게 살겠습니다. 내가 낮아지는 만큼 전방에 있는 아이를 당신의 은총으로 지켜주십시오. 어이없게도 나는 신과 거래를 하고 있다. 은은한 불빛아래 자비로운 눈으로 바라보는 신과 눈 맞춤을 하고 일어선다. 내가 나설 때까지도 자매님은 일어나지 않는다. 밖으로 나가기 위해 까치발로 서너 발자국 뗐을 때 자매님이 절규한다. 그 자매님은 열심히 살았는데 억울하다고 한다. 재물을 베풀지 않아서 받은 벌 같다고 한다. 그래서 가진 것을 열심히 베풀고 있으니 원하는 것을 달라고 애원한다. 순간 내 귀와 눈을 의심한다. 바로 그 친구다. 내가 동네에 새로 생긴 주꾸미집이 있으니 밥 먹으러 가자고 전화할 때마다 바쁘다며 차일피일 미루더니 그 사이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걸까? 친구가 원하는 것이 대체 무엇인데 저리도 간절한지 궁금하지만 조용히 성당을 나온다. A한테서 다시 전화가 왔다. 친구가 암에 걸렸는데 예후가 좋지 않다는 말을 전한다. 당장 밥을 사지 않으면 큰일이라도 날 것처럼 안달하던 친구, 그런 친구를 접시처럼 동그란 눈으로 바라보던 내 모습이 아프게 스친다. 내 눈에 이슬이 맺힌다. 대구문학 20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