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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기잼 플러스 물 본문
딸기잼 플러스 물
닛차난은 나를 보자 무척 기다렸다 한다. 며칠 동안 무슨 일이 있었나 싶어 안색을 재빠르게 살펴본다. 결혼 이주 여성들이 기다렸다고 말하면 열에 아홉은 어떤 문제가 있다는 뜻이다. 부부 싸움을 했든지 아니면 시어머니와 갈등이 심해 상담을 하고 싶다는 뜻이다.
생머리를 찰랑거리며 얌전한 원피스를 입은 닛차난은 평소와 다름이 없는 듯 보인다. 그녀는 컨디션이 좋지 않으면 머리를 묶는 버릇이 있다. 기다린 이유를 물으니 대답 대신 미소를 짓는다. 그리고는 내게 꼭 주고 싶은 게 있다며 주방으로 향한다. 아침을 든든히 먹고 온 터라 닛차난을 말렸지만, 기어이 뭔가를 가지고 나온다.
닛차난은 정이 많은 여성이다. 작은 것이라도 나누기를 좋아한다. 수업 올 때마다 과일이나 과자를 내놓는데 그 덕분에 요즘 몸무게가 자꾸 느는 것 같아 걱정된다. 먹지 않으면 되겠지만 내가 먹지 않으면 그녀도 먹지 않기 때문에 어쩔 수 없다. 한국에서는 윗사람이 먼저 음식을 드신 다음에 먹는 게 예의라 했던 말을 기억하는지 꼭 그대로 하고 있다.
입국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의사소통이 거의 불가능할 때의 일이었다. 하루는 닛차난의 손톱에 빨간 매니큐어가 칠해져 있었다. 길고 가무잡잡한 손에 발린 매니큐어는 매력적이었다. 매니큐어 바른 손이 예쁘다고 했더니 무슨 뜻이냐며 눈을 똥그랗게 뜨고 나를 보았다. 손을 가리키며 “예뻐요.” 했더니 매니큐어를 가지고 와서는 묻지도 않고 내 손에 빨갛게 발라주었다. 닛차난의 따뜻한 마음이라 웃음으로 화답을 하긴 했지만, 빨간색 매니큐어를 한 번도 바른 적이 없었던 나는 어색하기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내 신경은 온통 손톱에 가 있어서 사람을 만나면 먼저 하는 일이 주먹을 쥐고 손톱을 감추는 일이었다. 그렇다 보니 모든 것이 부자연스러웠다. 그렇다고 손톱을 지울 수도 없었다. 닛차난이 서운해할 것 같았다. 나에게 한국어를 배우는 이주 여성들은 한국에 와서 처음 대하는 타인이 나인 경우가 많다. 나와의 경험은 한국 사람에 대한 첫인상이 되므로 모든 것을 조심하게 된다.
주방에서 나오는 닛차난은 뭐가 그리 좋은지 입이 귀에 걸렸다. 쟁반에는 뭔가가 찰랑거린다. 붉은 알갱이가 동동 뜨는 것이 처음 보는 것이다. 순간 입에 침이 가득 고인다. 닛차난은 잔을 내려놓으며 남편이 어제 사 왔는데 정말 맛이 있어 나에게 꼭 맛을 보여 주고 싶었다며 웃는다. 밥을 든든히 먹고 왔음에도 나도 모르게 입맛을 다시며 한 모금을 쭉 들이켜는데 어째 맛이 익다. 무엇이냐고 물으니 주방으로 달려가서 병에 든 것을 가지고 왔다. 내가 생각한 대로 딸기잼이다.
한국에서는 보통 딸기잼을 물에 타서 먹지 않고 빵에 발라서 먹는다는 내 이야기를 듣고도 닛차난은 맛있다를 연발하며 가라앉은 알갱이까지 숟가락으로 싹싹 긁어먹는다. 제 입맛이라지만 이게 그렇게 맛있나 싶다. 딸기잼 주스를 쳐다보며 잠시 고민에 빠진다. 그토록 맛있어 보이던 것이 물에 탄 딸기잼이라는 것을 안 순간 먹을 생각이 가셨기 때문이다. 하지만 닛차난의 예쁜 마음을 생각하면 먹어야 할 것 같다. 잠시 고민하다 맛있는 것을 나에게 주고 싶어 하는 닛차난의 마음만 생각하기로 한다. 한약을 먹듯이 숨을 잠시 멈추고 단숨에 목 안으로 넘긴다.
집으로 돌아오는 내내 속이 거북하다. 매슥거리는 것이 영 개운하지가 않다. 결국, 차를 세우고 나무그늘로 찾아든다. 속에 든 것이 시원하게 밖으로 나오기라도 하면 좋겠는데 그럴 생각은 없다. 깨작깨작대며 신경만 거슬리게 한다. 무엇이 내 속을 이리도 불편하게 하는가. 아마도 잼은 꼭 빵에만 발라먹어야 한다는 심리적 정서일 것이다. 같은 음식을 먹은 닛차난은 오히려 달콤한 것을 먹어서 기분이 좋다고 했다.
딸기잼은 딸기를 설탕에 졸인 것으로 독특한 맛이 있다. 그 맛이 좋아 나는 가끔 그냥 먹기도 한다. 물도 깨끗함과 청량감으로는 최고의 맛이다. 갈증이 날 때 한 사발 들이키면 시원함이 그 어떤 것도 따라올 수가 없다. 둘 다 내가 좋아하는 음식이다. 다만 익숙하지 않은 방법으로 먹었을 뿐이다.
빨간 매니큐어 역시 나를 야한 여자로 보지는 않을까, 노는 여자로 보지는 않을까 하는 편견으로 불편했었다. 매니큐어를 바를 나이가 되면서 가장 발라보고 싶었던 색이 빨간색이었음에도 이런 이유로 한 번도 발라보지 못했다.
아직 많은 사람이 외국인에 대한 편견을 가지고 있다. 나와 생김새와 문화가 다르다고 이유 없이 눈살을 찌푸리고 거리감을 두기도 한다. 편견이 무서운 이유는 그냥 싫어하거나 좋지 않은 감정을 품기 때문이다. 그런 감정은 먹을 수 있는 달콤한 음료임에도 속을 불편했던 딸기잼 플러스 물과 같은 것이다.
얼마 전 아들이 사온 운동화는 끈은 묶어야 한다는 편견을 깼다. 매는 대신 구멍에 끼웠다. 끈이 실리콘으로 만들어져서 발 모양이나 크기에 상관없이 사용할 수 있고, 신고 벗는 데 편리했다. 그래서 매듭을 잘 묶지 못하는 아이들에게 인기가 있다고 한다. 겉은 바삭하면서도 따뜻하고, 속은 시원하면서 달콤한 아이스크림 튀김 역시 편견을 깼기 때문에 가능했을 것이다. 편견을 없애면 삶이 더 풍성해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