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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문화와 커피
남편에게서 전화가 왔다. 갑자기 급한 일이 생겨 한 시간쯤 늦을 거라 했다. 이미 약속 장소인 지하철역 입구에서 기다리고 있었던 터라 난감했다. 집으로 다시 되돌아갔다가 나오기에는 짧은 시간이고 그렇다고 길거리에서 마냥 기다릴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하는 수 없이 가까운 카페로 들어갔다.
커피 향이 진한 카페에는 서너 팀이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이국적인 실내장식과 다양한 커피를 즐기는 사람들의 모습이 어찌나 자연스럽던지 커피문화가 마치 한국문화라는 착각이 들었다. 아메리카노커피를 주문하고 출구가 훤히 보이는 자리를 잡고 있는데 결혼 이주여성인 듯한 사람 서너 명이 들어왔다. 카페 안에 있던 몇 사람이 고개를 돌려 그들을 쳐다봤다. 그 여성들은 30분 정도 머물다 카페를 나갔는데 생김새가 달라서인지 드나드는 사람들의 눈길을 자주 받았다.
한국어 방문지도를 하러 다니면서 결혼 이주 여성들의 어려움을 많이 듣는다. 그중 하나가 한국 사람들의 시선에 관한 이야기이다. 그녀들은 자연스럽게 행동을 해도 사람들이 쳐다봐서 부담스럽다는 말을 했다. 젊고 예뻐서 쳐다봤을 거란 내 말에 그녀들은 부정했다. 그런 눈빛이 아니라는 것이다. 심할 때는 지나가는데 침을 뱉는 사람도 있었다고 했다. 내가 직접 눈으로 본 것이 아니어서 어떤 상황이었는지는 잘 모르겠으나 그 말이 사실이라면 충격적인 일이다, 그녀들에게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어 어느 나라든지 몰상식한 사람은 있다거나, 예뻐서 쳐다봤을 거란 말로 넘기지만 아직까지 다문화가정에 대한 시선이 곱지 않은 것은 사실이다. 이러한 시선에는 다문화의 형성이 우리의 아픈 역사와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근대 다문화의 형성은 일본으로 강제 징용되어 간 한국인과 일본 여성과의 결혼으로 비롯되었다. 일본의 식민지 지배라는 역사적 사실은 우리 민족의 열등감을 자극하여 국제결혼에 대한 부정적 시각을 갖게 하였다. 6·25전쟁 이후에는 주로 한국 여성과 미군 남성의 결혼으로 빈곤했던 상황 속에서 경제적 안정을 위한 수단으로 다문화가 이루어졌다. 당시 한국사회는 국제결혼을 하는 한국 여성들에 대해 차별적인 편견을 가졌다. 그것은 폐쇄적인 우리의 문화적 특성에서 비롯된 것이기도 하지만 기지촌 문화 때문이기도 했다. 국제결혼은 우리 민족의 역사적 과정에서 소수에 의해 이루어지는 특별한 결혼 형태의 하나로 단일 민족의 순수한 혈통을 무너뜨리는 정상적이지 못한 결합으로 여겨져 왔다. 그래서 주변 사람들의 부정적인 시선과 가족들의 반대에 부딪혀야만 했다.
국제결혼이 과거와는 다른 양상으로 나타나기 시작한 것은 1980년대 후반 통일교가 결혼을 주선하기 시작하면서부터였다. 통일교는 '이상적인 참 가정'을 만들고 세계평화를 가져온다는 종교적 이유를 내걸며 한국의 농촌 총각과 일본 여성의 결혼을 주선하였다.
그 후 1992년 중국과의 외교관계가 공식적으로 재개되면서 조선족 여성들이 친척방문 형식으로 한국에 입국하여 취업하기 시작했다. 그녀들은 더 합법적인 이주를 위해 국제결혼을 선택했다.
이렇듯 다문화의 시작이 우리의 슬픈 역사와 맞물려있었다. 거기다 더해 결혼 중개업체들의 불법행위, 국제결혼을 악용하는 외국인 여성들, 국제결혼의 불행한 면만 보도하는 매체, 선진국과 후진국의 문화와 국민을 차별하는 현상 등으로 다문화 가정에 대한 시선은 그다지 긍정적이지 않았다.
우리나라는 짧은 기간에 농업국가에서 산업국가로 옮아가면서 급속한 도시화와 가파른 임금상승 그리고 3D 직업 기피 등으로 농촌 총각 문제와 노동자 수급의 문제를 낳았다. 이러한 환경 속에서 농촌의 시, 군, 지방자치단체가 농촌총각 장가보내기 사업을 펼치면서 국제결혼이 본격화되었다.
2000년대로 오면서 국제결혼은 우리 사회의 다양한 결혼 유형 중 하나로 인식되기 시작했다. 이들은 귀국을 전제로 한 이주노동자들과 달리 한국 사회에 영주할 것을 목적으로 왔기에 국적도 한국으로 바꾸는 등 한국 사회의 일부분을 형성하고 있다. 국제결혼은 매년 증가하고 있어 지금의 추세라면 2020년에는 다섯 가구 중 한 가구가 다문화 가정이 될 상황이다.
다문화 형성 기간이 100여 년 이상을 거친 다른 선진국과 비교해 볼 때 우리나라는 매우 빠르게 진행되고 있다. 워낙 짧은 시간에 다민족 사회로 전환하다 보니 한국인들이 이에 적응할 수 있는 사회문화적 소양 교육을 받아 본 적이 없다는 것도 다문화에 대한 부정적 시각을 갖는 이유 중 하나일 것이다.
주문한 커피가 나왔다. 이 카페는 질 좋은 원두를 쓰는지, 로스팅을 알맞게 하는지 몰라도 늘 입에 맞다. 그런데 오늘은 커피 맛이 쓰게 느껴졌다. 몸 상태가 좋지 않은 모양이다. 나는 기분에 따라 같은 맛이라도 강하게 느끼는 경향이 있다. 커피에 뜨거운 물을 더 탈까 하다가 설탕 한 봉지를 뜯어 넣고 휘휘 저었다. 검은 액체가 소용돌이쳤다.
기록에 의하면 커피가 우리나라에 들어온 지는 100년이 조금 넘었다고 한다. 굳이 기록이란 말을 쓴 것은 그전부터 우리나라 무역이 중국과 성행했으므로 상인들이 먼저 가베라 부르는 차를 먹었을 것 같아서이다. 불현듯 커피의 슬픈 역사가 떠오른다. 커피는 고종이 아관파천으로 러시아 공사관에 있을 때 중국에서 들어온 가베라고 부르는 차를 처음으로 마셨다. 그 쓰고 달콤한 커피를 마시면 고종은 어떤 생각을 했을까?
그로부터 100여 년이란 세월이 흘러 후손인 나는 커피를 마시면서 뜬금없이 된장녀란 말을 생각한다. 된장녀란 2000년대에 만들어진 유행어로 허영심 때문에 자신의 재산이나 소득 수준에 맞지 않는 명품을 걸치며 사치를 일삼는 여성을 비하하는 말이었다. 단어의 유래는 ‘젠장’이 된장으로 발음되며 된장녀로 불리게 되었다는 설, 똥과 된장도 구분 못 하는 무개념이라는 의미에서 된장녀라 불리게 되었다는 설, 그들이 즐겨 들고 다니는 스타벅스 커피의 색깔을 된장국에 빗대어 부른 것이라는 설 등 여러 가지가 있다.
요즘은 한 끼 식사비인 커피를 들고 거리를 다녀도 아무도 사치나 허영이라 여기지 않는다. 커피문화가 일상이 된 까닭이다. 이질적인 문화가 고유의 문화처럼 생각되기까지는 이처럼 소용돌이와 긴 세월이 있어야 하나보다. 커피문화가 100여 년에 걸쳐 우리 문화에 서서히 젖어들었듯 다문화도 많은 세월이 필요할 것이다.
어느 틈엔가 남편이 내 앞에 와 있다. 지금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는 사람들은 모를 것이다. 아주 오래전, 남편이 탐라국 사람이었고 내가 신라 사람이었다는 것을, 우리 부부도 다문화 가정이라는 것을. 주위를 살짝 둘러본다. 우리에게 시선을 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