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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비 본문
봄비
비가 온다. 계절을 재촉하는 단비다. 봄비, 혼잣말로 중얼거려본다. 봄비는 다른 비와 달리 절대로 물러서지 않을 것 같은 동장군도 낭창낭창한 애교로 달래어 보내고 언 땅을 녹인다. 죽은 듯 있는 식물의 뿌리를 간질여 잎들에 생기를 불어넣으며 꽃에 색을 입힌다. 내리는 비를 한동안 바라보다가 집을 나선다. 새로운 다문화 가족을 면담하러 가는 길이다. 차는 비를 가르며 공단 쪽으로 향한다.
며칠째 머릿속을 가득 채우는 일이 있다. 남편과 나는 이제 아이들이 대학을 졸업하고 나면 얼마 남지 않은 정년까지 노후생활을 대비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그런데 큰 아이는 졸업하자마자 대학원을 알아본다며 서울에 다녀왔다. 박사 과정을 마치는데 웬만큼 큰돈이 드는 게 아니었다. 남편과 나는 동시에 눈이 마주쳤다.
“전문직인데 그래야지.” 호탕하게 말하는 남편의 어깨가 내 눈에 한없이 작아 보였다. 큰 아이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둘째가 거들었다. 서울에 있는 대학교로 편입하기 위해 휴학하고 편입학 학원에 등록하겠다고 했다. 벌써 3학년을 마쳤는데 말이다. 남편과 나는 커다란 눈이 더 커졌다. 또 커다란 눈을 하고 서로를 마주 보았다. 이번에 남편은 침묵했다.
늘 형과 비교하며 눈치를 보는 아이라 내가 호들갑을 떨었다.
“그래, 그렇게 해. 인생 길게 보면 네 나이 때 일이 년 그거 아무것도 아니야.”
남편이 더 커진 눈으로 무언의 말을 전해 온다.
‘어쩌려고. 혹 숨겨둔 돈이라도 있어요?’
‘내가 무슨 돈이 있어요. 큰애 보고는 공부하라 그러면서 둘째 보고는 하지 말라는 말을 어떻게 해요’ 남편과 나는 서로를 바라보며 쓴웃음을 버무려 달콤한 척 웃었다.
공단의 매캐한 공기가 봄비 탓인지 한결 부드럽다. 좁은 골목을 돌고 돌아 차가 선 곳은 원룸 앞이다. 바로 들어가지 않고 잠시 주변을 살핀다. 공단 주위라 그런지 풀 한 포기 보이지 않고 온통 공사 현장이다. 이곳은 캄보디아 이주 여성인 토아 씨가 사는 집이다. 낯선 땅에 덩그러니 혼자 남겨진 토아 씨의 마음이 전이된 듯 가슴이 갑자기 답답하다. 다문화 가정 한국어 방문 교사라는 직업을 가지고부터 가끔 앓는다. 눈에 보이는 이주여성의 어려운 사정을 내가 어찌해주지 못할 때 내 몸의 기가 빠져나가면서 아팠다. 오늘도 앓을지 모르겠다. 이제부터 나는 10개월 동안 이 집을 드나들면서 토아 씨 아이의 정서적 안정을 돕고 더불어 살아가는 데 필요한 여러 방법들을 알려주어야 한다.
다행히 거실이 환하다. 커튼도 열려있고 화분의 식물들도 윤이 난다. 행여 우울증이라도 앓고 있으면 어쩌나 했는데 마음이 놓인다. 학교 간 아이들이 곧 돌아올 거라며 차를 내어 오는 토아 씨는 말이 아주 서툴렀다. 한국에 온 지 10년이 넘었음에도 조사는 생략하고 존칭어도 빼먹기 일쑤다. 그동안 사는데 바빠 한국어를 체계적으로 배우지 못한 것 같다.
초기 면접지를 작성하면서 토아 씨의 검고 깊은 눈을 바라본다. 서른다섯의 이 조그만 여자는 오래전에 사고로 남편을 잃었다. 기댈 곳이 있는 것도 아니다. 시골에 계신다는 시어머니는 시각 장애인이고 시아버지도 연로하다. 아이들을 돌보며 일을 해야 하는 처지인데 일자리 얻기가 쉽지 않다고 한다. 공장에서는 늦은 밤까지 일할 사람을 원하는데 아이들 때문에 저녁이면 돌아와야 하기 때문이다. 각다분한 세월의 강을 건너오는 동안 가슴은 메마르다 못해 먼지가 폴폴 날릴 것 같으나 토아 씨 얼굴에는 그늘이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무거운 마음으로 집을 나선 내 모습을 들킬까 봐 옆에 있는 거울에 내 얼굴을 잠깐 비춰 본다.
학교에 간 토아 씨의 아이들이 토닥거리며 집으로 돌아온다. 아이들은 제 엄마에게 오늘 있었던 일을 쫑알거리며 매달린다. 환한 얼굴로 아이들 간식을 챙겨 온 토아 씨의 얼굴이 봄비 맞은 꽃처럼 싱그럽다.
학습 진도를 정하려고 테스트한 아이의 성적은 좋지 않다. 또래 아이와 비교해 많이 뒤처져 있다. 해맑은 얼굴로 나를 향해 모르겠어요를 연발하는 아이를 보는 토아 씨 얼굴이 어두워지다 못해 굳어진다. 자신은 아무리 힘들고 외로워도 괜찮은데 아이들만 생각하면 근심이 깊어진다 한다. 아이들이 학교 공부에 뒤처질까 봐 겁이 난단다. 어미의 타는 마음이 가뭄 철 논바닥처럼 쩍쩍 갈라지는 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토아 씨의 눈에 눈물방울이 맺힌다.
“엄마, 울지 마! 공부 열심히 할게”
봄볕에 꽃 터지는 속도보다 더 빨리 달려온 아이들이 봄비 같은 애교로 제 엄마를 달랜다. 아들은 엄마의 눈물을 훔치고 딸은 뽀뽀하느라 야단이다.
노심초사하던 어미의 맘을 봄비 같은 애교로 녹이니 토아 씨의 얼굴이 꽃송이처럼 벙근다. 가족의 푼푼한 정을 보며 오늘은 앓지 않을 거란 생각으로 원룸 문을 나선다. 비가 온다. 어미 맘을 녹이는 애교 같은 봄비다. 비가 하도 감미로워 바라보고 있는데 아들에게서 문자가 온다.
‘엄마 대학원은 제가 알아서 할 거니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사랑합니다.’
아이의 다정한 문자가 봄비를 타고 온다. 내 몸을 포근하게 적시는 아이의 사랑스런 마음이 봄비를 타고 내린다.
205년 그린에세이 가을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