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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금인형의 수필

내복패션

소금인형 2016. 3. 28. 11:39

내복 패션

 

아주머니가 나를 보며 웃었고, 남자들은 입을 요렇게 하고 소리를 냈어요.“

흐엉이 뾰로통한 얼굴로 한 말이다. 흐엉은 내가 한국어를 가르치고 있는 베트남 결혼 이주 여성이다. 생물학적 나이는 이십 대 중반이지만 한국에 온 나이는 한 살이 채 안 되었다. 그런 흐엉이 내복을 입고 마트에 갔다가 봉변을 당한 것이다.

흐엉 집으로 첫 수업 갔을 때가 생각난다. 현관에 들어서는 순간 독특한 냄새가 났다. 방은 신혼집답게 아기자기한 장식품과 결혼사진으로 치장했지만 뽀얀 먼지들로 가득했다. 며칠 후 두 번째 수업을 갔을 때는 더 많은 먼지가 나를 반겼다. 그렇다고 외국인인 흐엉에게 청소하라는 말을 하기는 조심스러웠다. 휴지로 수업할 책상 위 먼지를 닦는데 흐엉이 아무리 문을 닫아도 먼지가 자꾸 있다며 어떡해야 하느냐고 물었다. 그제야 흐엉의 집에서 나던 냄새와 먼지가 이해되었다.

흐엉의 친정집은 공기 맑은 곳에 지은 베트남의 전통 가옥이었다. 오염이 안 된 곳에다 나무로 얼키설키 짠 트인 집이니 먼지가 쌓일 일도 청소를 따로 할 일이 없었다. 나는 창문을 열어 환기를 시키고 청소기를 돌리고 걸레로 구석구석 먼지를 닦으며 매일 이렇게 해야 한다고 가르쳤다. 그런 흐엉이 내복을 입고 마트에 간 것은 이상할 것이 없는 일이다.

꽃분홍색 내복에 검은 봉지를 들고 있는 흐엉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한다. 늘 나만 보면 방긋 웃으며 인사하기 바빴는데 인사하는 것도 잊고 기분이 나쁘다는 말을 연발하며 발을 쿵쾅거린다. 마음의 상처를 단단히 받은 모양이다.

얼마 전 흐엉의 생일이었다. 마흔이 넘도록 결혼을 못한 아들에게 시집온 며느리가 고마워 시어머니께서 내복을 사주셨다. 흐엉은 목둘레에 있는 장미꽃 레이스가 가득한 것이 마음에 든다고 자랑을 했다. 잘 어울릴 것 같다는 추임새를 흐엉에게 넣으면서도 내복을 입고 집 밖에 나가리라는 생각을 미처 하지 못했다.

화가 난 흐엉을 달래며 지금 입고 있는 옷을 한국에서는 내복이라고 하는데 그 옷은 속옷이라 외출할 때 입지 않는다고 했다.

정말요?”

흐엉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이럴 때는 그래요?” 하는 거라고 가르쳐주었다. 사실 내복은 야한 옷이 아니다. 남자들이 속옷은 야하다라는 관념으로 흐엉에게 끈적끈적한 눈길을 보내며 야유를 보냈을지 몰라도 가릴 곳 다 가리는 얌전한 옷이다. 하의 실종 패션이나 시스루룩, 스키니보다 몸매가 덜 드러나는 옷이다.

만약에 우리나라가 봄, 가을만 있는 나라였다면 내복은 속옷이 아니라 목 주위로 예쁜 레이스가 하늘거리는 옷으로 유행의 첨단을 걸었을지도 모르지 않겠는가? 사계절이 더운 나라에서 온 흐엉에게는 내복이 오늘 같은 초겨울에 입기 딱 맞은 겉옷이었을 것이다.

흐엉의 내복을 보니 어릴 적 입었던 새빨간 나일론 내복이 생각난다. 요즘 내복은 레이스를 달아 멋을 더했지만, 그때는 그냥 새빨간 나일론 내복이었다. 그 내복을 입고 나도 흐엉처럼 거리를 활보한 적이 있었다,

여섯 살 때인가 시장에 가신 어머니께서 내복을 사 오셨다. 엄마가 없는 틈을 타서 옷을 입고 거울을 보니 얼굴에 생기가 돌면서 예뻤다. 어렸지만 허리가 잘록하게 들어가고 오동통한 궁둥이가 나온 모습이 귀여웠다. 더군다나 동네에는 빨간 내복을 입은 친구가 없었다. 깜찍한 여섯 살짜리는 자랑을 하고 싶었다. 엉덩이를 실룩거리며 동네로 나갔다. 날씨는 좀 쌀쌀했지만 그건 문제가 되지 않았다.“예쁜 내복을 샀구나.” 동네 아주머니가 아는 척을 해주었을 때는 날아가는 기분이었다. 나는 신이 나서 빠른 걸음으로 점방을 하는 친구 집 앞으로 갔다. 점방을 보던 친구가 달려 나와 부럽다는 듯 쳐다보며 옷을 만졌다. 나는 더욱 으쓱해졌다. 친구가게에서 사탕을 사서 입에 물고 배꼽마당으로 갔다. 남자애들이 구슬치기하고 있었다. 내 내복에는 관심 없다는 듯이 아이들은 하던 일을 계속했다. 마당을 돌아 한복집을 지나갈 때 한복집 할머니가 감기 들겠다며 걱정을 했다. 할머니가 내 빨간 내복에 대해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것이 섭섭했다.

내가 빨간 내복 차림으로 동네를 활보했을 때 비웃은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 그것은 내가 어렸기 때문이다. 여섯 살 꼬마에게는 내복을 입고 다니는 것이 이상하지 않았고 어른들은 멋모르고 하는 꼬마의 행동을 이해해 주었다.

여섯 살 꼬마가 빨간 내복을 입고 거리를 활보한 것과 한국에 온 지 채 일 년이 안 되는 흐엉이 꽃분홍색 내복을 입고 마트에 갔던 일은 딱히 다르지 않다. 다문화 가족이 늘어가는 이 시대에 다문화를 이해하는 것은 간단하다. 상대방의 처지에서 생각하면 되는 것이다.

어쨌든 나도 빨간 내복을 입고 거리로 나간 야한 여자였다.

 

 

  2016년 수필사랑 27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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