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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기 본문
감기
느닷없이 찾아온 감기에 적이 당황스러웠다. 재채기가 연이어 나오더니 콧물까지 줄줄 흘렀다. 오한이 들면서 삭신이 쑤셔왔다. 허리는 끓어질 듯 아프고 팔은 아프다 못해 저리기까지 했다. 감기 바이러스가 머리를 마구 흔드는지 머릿속이 윙윙거렸다.
아침에 목이 조금 부어 따끔거리기는 했다. 내 딴은 조심한다고 생강차를 다려먹고 옷도 든든히 챙겨 입고 나왔는데 몸은 이미 감기가 다 점령해 버렸다. 친구가 건네준 해열진통제로 응급조치는 했지만, 내 몸속은 걷잡을 수 없이 나빠졌다. 산속 마을 공기가 내 뼛속을 마구 헤집고 다녔다. 빨리 집으로 가서 눕고 싶은데 그럴 처지가 못 되는지라 콧물만 연신 들이마셨다. 급기야 괜히 왔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친구가 노후에 살 계획으로 10년 전 산 땅에 전원주택을 지었다. 부부가 오랜 기간 심혈을 기울여 지은 집이다. 한번 가 봐야지 가 봐야지 하다가 오늘로 날을 잡았다. 아침까지만 해도 외출 채비를 하면서 즐거웠다. 자연을 마당삼아 지은 친구의 집에서 멋진 추억을 만들어 올 것을 생각하니 절로 콧노래가 나왔다.
친구 집은 친구가 전해준 대로 산이 가까이 있어 한 폭의 수채화 같았다. 바지런하게도 산과 어울리게 몇 그루의 나무와 꽃을 마당 가득이 심어 산 전체가 조경처럼 느껴졌다. 그뿐만 아니라 몇 발자국만 떼면 산나물들이 지천이라 보는 것만으로도 넉넉했다.
친구가 마당에 숯불을 피우고 고기를 굽는 동안 나는 텃밭에서 뜯어온 나물을 씻었다. 야들야들한 잎돌이 식욕을 돋웠다. 그런데 일이 벌어진 것은 장작을 가져와 난로를 피우고 텃밭에서 뜯어온 나물로 고기를 구워 먹었던 여운이 채 끝나기도 전이었다. 차 한 대가 수로에 빠져 내 차가 나갈 수 없게 된 것이다. 친구와 차를 마시며 골목길로 자동차가 오는 것을 보았다. 차가 서길래 집 앞에 주차하는 줄 알았지 바퀴가 수로에 빠진 줄은 몰랐다. 더군다나 동네 아저씨 차라는 친구의 말에 걱정조차도 하지 않았다. 정작 내가 집으로 돌아가려고 차 주인을 찾았을 때는 행방불명이었다. 전화기도 꺼져있었다.
다급해진 친구가 차 주인을 수소문했다. 차 주인이 술에 취해 차를 몰다가 수로에 빠지자 그대로 두고 어디론가 갔다고 했다. 사람들 말로는 약주를 좋아하시는 분이라 아마도 택시를 불러 타고 술을 마시러 갔을 거라고 했다.
낭패도 이런 낭패가 없다. 곧 해가 질 터인데 속이 타들어 갔다. 아픈 몸도 문제지만 아들의 생일파티가 예정되어 있기 때문이었다. 계획대로였다면 나는 벌써 집으로 돌아가서 저녁을 짓고 있어야 한다. 미역국을 뽀얗게 끓이고 나물을 조물조물 무치고 있어야 한다. 더군다나 이번 생일은 아들이 군 제대 후 첫 번째 맞는 생일이라 여간 신경이 쓰이는 게 아니었다.
갑자기 마을 사람들의 웅성거리는 소리가 멀리서 들렸다. 그 속에 노부부가 다투는 소리도 들렀다. 차를 뺄 수 있다는 할아버지와 남의 차를 함부로 빼다가 사고가 나면 어쩔 거냐는 할머니의 목소리가 한 치의 양보도 없이 카랑카랑 울렸다. 동네일을 도맡아 걱정해 주는 할아버지 할머니의 부부 싸움이 정겨웠다. 다시 자지러질 듯한 기침이 시작되더니 눈조차 뜨기 싫었다. 그저 눕고 싶다는 생각뿐이었다. 도대체 차 주인은 어디에 있단 말인가.
피할 수 없는 감기처럼 느닷없이 다가온 현실에 속수무책이었다. 추웠다. 온몸에 구멍이 난 것처럼 찬바람이 헤집고 들어왔다. 그저 잠시라도 좋으니 누웠으면 좋겠다. 몸이 차가우니 조금 전까지만 해도 동화 속처럼 포근했던 마을이 겨울 왕국처럼 느껴졌다. 산속의 찬 공기가 내 주위를 어슬렁거렸다. 목구멍에 무언가가 가득 찬 느낌이다. 따뜻한 차가 그립다. 따뜻한 물에 꽃송이를 올리면 미라처럼 죽었던 꽃이 서서히 피어나는 모습을 보며 꽃차가 마시고 싶었다. 그렇게라도 하고 나면 몸이 한결 좋아질 것도 같았다. 내 맘대로 할 수 없는 지금의 현실이 감기 기운을 더 돋우었다.
따뜻한 물이라도 마실 요량으로 부엌으로 들어와 물을 끓이는데 밖이 소란했다. 멀리 간 줄 알았던 차 주인이 실은 집에서 자고 있었단다. 내 차를 보긴 했지만, 동네에 비슷한 차가 있어 아무 생각 없이 집에 갔다고 했다. 차 주인은 마치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 트랙터를 가지고 와서 수로에 빠진 차를 꺼냈다. 그제야 내 조마심도 사라졌다.
집으로 오는 내내 미안해서 식구들 얼굴을 볼수 없을 것 같았다. 그러나 걱정했던 것과는 달리 내가 없어 더 즐거웠다는 표정이다. 삼부자가 모처럼 식당에 가서 거하게 먹고 노래방까지 갔단다. 거실은 세 사람이 내 뿜는 술 냄새로 가득했다.
늦은 시간이라 감기약 한 알을 삼키고 자리에 누웠다. 누우면 바로 잠들 것 같았는데 잠은 오지 않고 오늘 일들이 홀씨 되어 떠다녔다. 좋지도 나쁘지도 않은 평범한 일상의 줄 위에서 쉴 새 없이 나오는 기침에 거친 숨만 토했던 하루가 몽롱한 얼굴로 지나갔다. 앞으로도 살아가면서 감기처럼 느닷없이 나타나는 일들이 많을 것이다. 그러나 조바심을 낸다고 해결되는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차주인의 느긋함에서 해결법을 배워야 할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