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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사는 CC TV가 만든다. / 이미경
왜 그런 날이 있지 않는가? 아무렇지도 않게 지나온 일상들이 그날따라 거슬리는 날 말이다. 오늘이 딱 그런 날이다. 출근을 하기 위해 현관문을 열었는데 늘 무심히 지나쳤던 CC TV가 괜히 못 마땅하다. 죽은 듯 천장에 붙어서 나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는 감시자처럼 느껴진다. 그렇다고 내가 지금 윤리에 어긋나는 행동을 하고 있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안 보는 척 나를 지켜보고 있는 눈을 곱지 않는 시선으로 한번 쓱 쳐다보고는 엘리베이터 스위치를 누른다. 문이 열리더니 작고 환한 공간이 나를 맞이한다, 아무도 없는 이 작은 공간이 참으로 안온하게 느껴진다. 거울을 보며 머리도 매만지고 짝짝이로 그려진 눈썹을 손으로 수정하다가 멈칫한다. 여전히 나를 보고 있는 눈을 의식했기 때문이다. 아무래도 컨디션이 최악인 모양이다. 예사롭던 일상들이 이렇게 짜증스럽게 다가오는 걸 보니. 이럴 때는 무조건 조심하고 주의해야 하루가 편하다는 것을 경험으로 알고 있다.
현금지급기에서 돈을 찾아서 한참을 가던 나는 발길을 멈춘다. 그렇게 주의한다고 했는데 돈은 그냥 두고 현금카드만 뽑아서 나왔다. 내 뒤에서 반바지에 슬리퍼를 신은 꾀죄죄한 아저씨가 차례를 기다리고 있던 것이 생각난다. 급한 맘에 젖 먹던 힘을 다해 뛴다. 내 심장 뛰는 소리가 또깍대는 구두 소리보다 더 크게 들릴 때쯤 아저씨를 만난다. 아저씨는 내 돈이 다시 기계 안으로 들어갔다 한다. 요즘은 돈을 빨리 꺼내지 않으면 돈이 다시 기계로 들어간다는 설명까지 친절하게 덧붙여 준다.
반신반의하며 카드를 넣어보니 정말 돈이 인출되지 않았다. 적지 않은 금액이었는데 손을 타지 않아서 다행이다. 순간 바닥을 기어 다니던 내 컨디션 게이지가 한 뼘 정도 올라가면서 의심의 눈길을 보낸 아저씨에게 미안한 마음이 든다.
오늘 수업은 한국인 아버지와 베트남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일곱 살 난 아이 수업이다. 지루하지 않게 푸드아트를 활용해 수업할 요량으로 몇 가지 과자와 짜서 먹는 초콜릿을 사서 간다.
아이는 웬일로 과자를 본체만체하며 상기된 얼굴로 나를 맞는다. 착한 일을 했단다. 놀이터에서 돈 오만 원을 주워서 경비실에 갖다 주었다는 것이다. 나는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그렇게 뿌듯할 수가 없다. 어제 내가 한 말을 잊지 않은 아이가 고맙고 대견하다. 그리고 가르친다는 직업에 전율을 느낀다. 해맑게 웃고 있는 아이의 얼굴을 쳐다보니 어제의 일이 파릇하게 고개를 내민다.
수업시간에 아끼던 볼펜이 없어졌다. 친구가 외국 여행을 다녀오면서 준 선물이었다. 은빛 몸체에 세로로 정교한 홈이 파진 볼펜은 빛이 닿으면 오묘하게 반짝거렸다. 볼펜을 볼 때면 머나먼 이국땅에서도 나를 떠올리며 고르고 골랐을 친구의 마음이 늘 빛처럼 반짝였다. 그래서 행여 잃어버릴까 봐 집에서만 사용하곤 했는데 아침에 메모할 일이 생겨 사용하고는 그냥 필통에 넣어서 가지고 왔던 것이다. 행여 어디에 떨어뜨렸나 해서 주위를 샅샅이 살펴보았지만 없었다. 이쯤 되면 같은 공간에 있는 사람을 의심하는 게 인지상정인지라 아이를 쳐다봤다. 아이는 습관처럼 오늘도 내 필통을 열었다. 볼펜을 꺼내 들고는 만지작거리더니 예쁘다는 탄성을 지르며 내 눈치를 살폈다. 갖고 싶다는 표현이다. 어지간하면 그럴 때마다 주곤 했는데 그날은 아끼는 물건이라서 줄 수 없다는 말로 이해시키고는 볼펜을 받아서 책상 위에 두었는데 감쪽같이 없어진 것이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공부하기 싫다며 엉뚱한 짓을 하던 아이가 얌전하게 앉아 그림에 색칠을 하고 있었다. 아이에게 볼펜을 못 봤느냐고 조심스레 물었다. 모른다는 대답이 담장에 부딪친 테니스공처럼 튕겨 나왔다. 그러더니 일어나서 여기저기 찾으러 다녔다. 돌아와서는 볼펜이 비싼 것이냐고 물었다. 선물 받은 거라서 얼마인지 모른다는 말에 아이는 선생님은 어른이고 돈도 있으니까 하나 사면되지 않느냐고 했다. 볼펜이야 다시 살 수 있지만 잃어버린 볼펜과 같을 수 없다는 말에 아이의 눈이 동그래졌다. 엄마에게서 선물 받은 장난감과 길가다 주운 장난감 중에서 어느 게 더 소중할 것 같으냐고 물으니 엄마가 준 것이란다. 어린아이지만 꼭 비싸서 소중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아는 아이가 귀여웠다.
수업을 마치고 나오면서 아이에게 혹 볼펜이 보이면 잘 간수해 달라는 말을 당부하는데 아이의 바지주머니가 불거지는 게 보였다. 주머니의 물건을 꺼내 보라고 했더니 자기 고추라며 시침을 떼고 깔깔 웃는다. 7살 아이치고 맹랑하기가 그지없다. 정색을 하며 달라는 뜻으로 내가 계속 손을 내밀고 있자 아이는 이게 왜 여기 있는지 모르겠다며 마지못해 볼펜을 돌려주었다.
선생님을 골탕 먹이니 재미있느냐는 말로 아이의 민망함을 달랬다. 그리고는 아이의 손을 잡으며 가지고 싶다고 해서 남의 물건을 가지면 안 된다고 말했다. 사람에게는 해서 되는 일과 해서는 안 되는 일이 있는데 이것을 구분하고 참을 줄 알아야 훌륭한 어른이 된다는 말도 덧붙였다. 잠자코 듣고 있는 아이는 “알아요” 하며 겸연쩍게 웃었다.
지금 해맑게 웃고 있는 아이의 미소는 분명 어제의 미소와는 다르다. 겸연쩍게 웃던 웃음이 아니라 뭔가를 해냈다는 뿌듯한 웃음, 당당한 웃음이다.
사람이 변하기란 힘든 일이다. 사람의 머리와 마음은 다른 축이어서 따로 놀기 일쑤이고 알고 있는 것과 행동이 같이 움직이려면 적지 않은 인내와 노력이 필요하다. 아직 미성숙한 일곱 살 아이에게 돈의 유혹은 생선을 본 고양이보다 더 했을 것이다. 그런데도 내가 어제한 말을 잊지 않고 있다는 것이 갸륵하다. 미운 일곱 살이 예쁜 일곱 살로 변화되는 모습을 보는 것만큼 설레게 하는 일이 있을까? 분명 멋진 향기를 지닌 어른으로 성장할 것 같은 예감에 아이를 꼭 안는다. 그 돈이면 가지고 싶은 장난감을 살 수도 있었을 텐데 잘 참아서 정말 대견하다 속삭인다.
“선생님 놀이터에는 CC TV가 있잖아요.”
내 말이 채 떨어지기도 전에 귀에 들린 아이의 낭랑한 목소리이다.
‘그럼 은행의 그 아저씨도...’
오눌의 수필 2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