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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당의 불문율 / 이미경
언젠가 친구가 했던 말을 떠올리며 나는 웃는다.
‘아무렴 그렇고말고. 술자리에서 일어난 일은 절대로 발설하지 않는 게 주당들의 불문율이고말고!’
얼마 전 술을 배우고 있다는 내 말에 친구가 웃었다. 그리고는 어디 배울 게 없어 그런 걸 배우냐며 곱게 눈을 흘겼다. 정확히 이야기하자면 술을 배운다기보다는 술을 가까이하는 기회가 많아졌다. 그러다 보니 냄새만 맡아도 취하던 내가 맥주 두세 잔 정도는 거뜬하게 마실 수 있게 되었으니 언젠가는 주당의 세계에 입성하지 않을까 하는 것이 막연한 바람이다.
내 몸은 술을 한 모금만 마셔도 얼굴이 붉게 변하면서 몸이 가려워져 민망하기가 그지없다. 심장은 기분 나쁘게 뛰고 머리가 아프다. 그러다 보니 술자리는 될 수 있으면 피해왔다. 친구는 2차 술자리가 정말로 진솔하고 재미있다고 늘 말했다. 그러면서도 내가 2차 술자리의 이야기를 물으면 말하지 않는 게 주당들의 불문율이라며 입을 닫으니 그 세계가 궁금하기 그지없었다.
술을 자주 접할 기회는 정말 우연하게 왔다. 어느 날부턴가 저녁을 먹은 후 남편이 나가기만 하면 취해서 돌아왔다. 담배를 사러 나간다고 하고는 취해서 돌아오고, 이발하러 간 사람이 또 취해서 돌아오고 또 어떤 날은 평소에 하지도 않던 분리수거를 자청하며 나가서는 취해서 돌아왔다. 이유는 다양했다. 담배를 사러 갔다가 친구를 만나서, 이발소에 갔는데 회사 동료도 와있어서, 분리수거를 하다가 본 하늘의 달이 너무 예뻐서 술을 마셨다 했다.
남편이 술을 좋아하는 것을 알기에 나는 남편이 술 마시는 것에 대해서는 무심한 편이었다. 더구나 술 마시는 곳이 동네에 있는 주점이라니 그러려니 했다. 그런데 같은 일이 몇 달째 반복되다 보니 이상한 촉이 발동하기 시작했다. 도대체 그 집 마담이 어떻게 생겼을까 하는 궁금증이 들었다.
하루는 남편이 한 잔 하고 오겠다는 말에 나도 같이 가자고 했다. 남편은 술도 못 마시는 사람이 무엇하러 가려느냐. 피곤할 테니 쉬어라 금방 올 것이라며 혼자 나갔다. 그리고는 12시가 넘어 들어왔다. 그 후로도 몇 번 더 그런 일이 반복되었다.
‘어디 잡히기만 해봐라.’니 죽고 내 사는 날이다.’ 나는 더듬이를 남편에게 세우고선 기회만 엿보고 있었다.
남편이 아들과 저녁을 먹으면서 술잔을 기울인 날이었다. 설거지를 하고 있는데 술이 모자랐는지 간단히 한잔 더 하고 오겠다며 남편이 현관 밖으로 나가고 있었다. 나는 고무장갑을 벗어던지고 따라나섰다. 따라오지 않으면 안 되겠냐는 남편을 앞세워 술집으로 들어섰다.
7080 음악이 흐르는 작은 실내에 남편이 들어서자 여기저기서 모두 인사를 했다. 술집에 있는 모든 손님들이 남편을 알고 있다는 것이 신기했다. 실내는 자그만 했다. 테이블 네 개가 전부였다. 낭창한 몸매로 콧소리를 내고 있어야 할 내 상상 속의 마담은 오간데 없고 푸짐한 몸매의 입담이 걸쭉한 여주인이 있었다.
알고 보니 이곳은 남편처럼 술을 마실 때 안주를 먹지 않는 사람은 안주를 시키지 않아도 되는 편한 곳이었고 자주 오는 손님은 여주인이 손님들끼리 통성명을 하게 하였다. 그러다 보니 어느새 동네 사랑방이 되어 있었다. 혼자 가도 거의 아는 얼굴이 있는 집이라 그런지 대부분 혼자 술을 마시러 왔다가 합석을 하는 분위기였다. 합석 시 술값 또한 주인이 알아서 깔끔하게 갈무리해 주었다.
그곳에서 나는 한 쌍의 부부를 알게 되었다. 남편과는 이미 아는 사이었다. 부인과 나는 동갑이라 그 자리에서 친구 하기로 했다. 그래서 가끔 두 부부가 같이 술을 마시기도 했고 남편 혼자 간 날은 그곳에 있던 누군가가 불러주어서 자주 술을 접하게 되었던 것이다.
술과는 거리가 좁혀지지 않던 내 몸이 나이가 들면서 체질이 변했는지 예전보다는 술을 술술 받아들여 맥주 세잔 정도는 거뜬하게 마실 수 있게 되었다.
어제저녁, 그 부부로부터 한 잔 하자는 전화가 왔다. 두 잔 마셨을 뿐인데 이상하게 취기가 왔다. 누군가가 맥주에 소주를 타놓았던 것이다. 그것도 모르고 소맥 세 잔을 먹은 나는 제대로 걷지를 못했다.
걸어서 7분 정도 되는 거리임에도 택시를 탔다.
잠시 졸다가 눈을 뜨니 나는 집 소파에 앉아 있고 남편은 소파 밑에 앉아 텔레비전을 보고 있었다. 갑자기 내 눈 앞에 커다란 곰 인형 머리가 보였다. ‘오구오구 귀여워라’ 곰 머리를 잡고 흔드는데 남편의 고함 소리가 들렸다.
남편이 그렇게 폴짝 뛰는 것은 처음 보았다. 지금까지 그 누구한테도 머리를 잡혀 본 적이 없다며 노발대발하는 게 아닌가. 헛것이 보여도 유분수지 내가 잡은 것이 남편 머리였나 보다.
놀란 내가 무조건 미안하다고 잘못했다고 말해도 소용이 없었다. 죽을 때까지 못 잊을 일이라며 씩씩거렸다.
술을 머리 회전도 빠르게 하는지 어느새 내가 거래를 하고 있었다. 당신이 나 모르게 큰돈을 주식으로 날린 것과 엇셈하자는 말이 술술 나왔다. 남편은 더 펄쩍 뛰며 그것과는 비교가 안 될 일이라 했다. 주식은 우리 가족들 잘살기 위한 투자였지만 나의 행동은 상대를 무시할 때 나오는 것이라 했다. 취기가 오를 대로 오른 나는 될 대로 되라는 심정으로 당신은 오늘 일을 가슴에 새기고 나는 주식 사건 가슴에 새기며 살다 가자하며 등을 돌리고 잤다. 잠결인지 꾼결인지 남편의 볼멘소리가 멀어졌다 가까워졌다 했다.
오늘 우린 각자의 일터로 출근했다. 종일 마음이 편치 않았다. 이제부터는 술을 먹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하며 퇴근을 했다. 아직도 남편이 어제 일로 화가 풀려있지 않으면 어쩌나 걱정하며 현관문을 열었는데 아들과 술잔을 기울이던 남편이 아주 반갑게 맞아주었다. 기분이 좋아진 나도 자리를 같이 했다. 취기가 오를 대로 오른 남편과 나는 내일을 위해 자야지 하며 잠자리에 누웠다. 그때 남편이 한마디 한다.
“세상에 하늘 같은 남편의 머리채를 잡다니. 나 원 참, 그래도 오늘 회사 가서 생글생글 웃으며 근무하고 왔다이”
알딸딸한 나도 낭창하게 한마디 한다.
“뒤끝이 장난이 아니구먼, 나도 생글생글 웃으며 수업하고 왔다이”
둘은 동시에 까르르 웃었다. 남편과 한 뼘만큼 더 가까워진 느낌이 든다. 술은 사람과 사람 사이를 가깝게 해주는 요물임에는 틀림이 없다.
까무룩히 잠의 세계로 건너가는데 슬며시 웃음이 배어 나온다.
‘아무렴 그렇고말고. 술자리에서 일어난 일은 절대로 발설하지 않는 게 불문율이고말고! 혹 시댁에서 알기라도 해봐‘
2017년 수필세계 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