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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년/초저녁 본문

소금인형 수필2

중년/초저녁

소금인형 2017. 1. 5. 21:23

 남편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회식이 있어 좀 늦을 거라 했다. 요즘 들어 흰 머리카락이 부쩍 눈에 거슬려 뽑아 달라고 할 참이었던 터라 힘이 빠졌다. 하는 수 없이 탁자 위에 동그란 거울을 세워놓고 족집게로 흰 머리카락을 뽑기 시작했다. 하필이면 흰 머리카락이 정수리 부분에 소복했다. 눈을 치켜 올려 뜰 수밖에 없었다. 거울 속 내 모습이 한 마리 가자미 같았다.

몇 개 뽑지도 않았는데 눈이 아팠다. 뽑힌 머리카락이 흰색보다 검은색이 더 많았다. 무엇이든 연습이 필요한 모양이다. 하던 일을 멈추고 가만히 거울을 들여다본다. 또렷했던 쌍꺼풀이 파랑의 세월을 거쳐 오는 동안 윗눈꺼풀이 늘어져 눈이 많이도 작아졌다. 눈 밑은 지방이 모여 작은 둔덕을 만들었다. 거기다가 피부도 탄력을 잃어 푸석푸석했다. 더 내려가면 목주름이 목걸이처럼 늘어져 있을 테고 뱃살이 파도를 타고 있을 것이다.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는 말을 처음 한 이는 누구였을까? 나이 앞에 우울해 하는 사람을 위로하기 위해 한 말이거나 자신을 위로하기 위한 말일 거라는 생각을 했다. 앉았다 일어날 때 무릎 관절에서 소리가 나거나 알고 있던 단어가 머릿속에서만 맴돌며 입으로 나오지 않을 때마다 나이는 숫자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그와 더불어 마음에 그림자가 드리운다. 아무도 없는 집, 거울 속의 나는 수족관에 고립된 물고기가 되어 빠끔빠끔 숨을 쉬었다. 오래전 나는 혼자만의 시간을 갈망하고 갈망했다. 아이들의 뒤치다꺼리로 종종걸음칠 때마다 오롯이 혼자만의 아늑한 시간을 간절히 원했다. 그런 날이 올까 싶었는데 아이들이 자라 제 삶의 터전을 찾아가면서 그런 시간이 왔다. 그런데 도대체 무엇 때문에 혼자만의 시간을 그토록 원했는지 모르겠다.

회귀본능 같은 것이었을까? 어머니의 자궁 속에 안착한 순간 혼자만의 안온함이 무의식 속에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초저녁은 참 어정쩡한 시간이다. 무엇을 시작하기에는 늦은 것 같고 가만히 있기에는 지는 해가 아깝다. 해는 시나브로 지고 있었다. 더 이울기 전에 무언가를 해야 할 것 같았다. 그런데 딱히 떠오른 것이 없었다. 그동안 희망의 우듬지만 쳐다봤지 희망로는 닦아 놓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우습게도 내가 간 곳은 노래방이었다. 혼자 간 것이 아니라 혼자 있다는 친구 A와 B를 불러 함께 갔다. 참으로 오랜만에 분위기를 잡고 노래를 불렀다. 노래를 부를 때마다 옷도 선율에 따라 뒤척였다. 코스모스 같았던 허리가 두루뭉술해져 나온 배를 가리느라 헐렁하게 옷을 입은 까닭이다. 언뜻언뜻 보이는 배의 실루엣, 아이를 잉태하고 기르느라 열상으로 희끗희끗해진 흉터가 훈장처럼 쓸쓸한 얼굴로 있을 것이다.

노는 것도 힘들다는 A의 푸념에 잠시 쉬기로 했다. 시원한 음료수로 갈증을 녹이며 휴대전화기를 봤다. 세 통의 부재중 전화가 남편으로부터 와있었다. 그때 다시 전화벨이 울렸다. 남편이었다. 다짜고짜 어디에 있느냐고 물었다. 시간으로 봐서 애주가들이 절정에 있을 시간이었다. 집이라고 할까 하다가 사실대로 이야기했다.

 “ 뭐 노래방이라고? 내가 살짝 기분 나빠지려고 하니 10분 내로 집으로 오소.” 남편의 목소리에 취기가 가득했다. 다른 날은 늦게 잘도 들어오더니 오늘따라 왜 빨리 와서 그러는지. 한참 무르익어가는 분위에 찬물을 끼얹을 수는 없어 그냥 놀았다. 30분이 지난 후 다시 전화벨이 울렸다. 지금 갈 수 없다는 내 말에 남편은 맘대로 하라며 전화를 끊었다. 친구는 남편이 그러는 것이 다 내 탓이라고 했다. 그동안 너무 충실한 삶을 산 결과라는 것이다. 생각해 보니 쉰이 넘도록 너무 남편에게 맞추며 살아온 것 같았다. 그래서 ‘맘대로 하라’는 말을 ‘당신이 편한 대로 놀다 오시오.’로 해석하고 놀았다.

집으로 돌아오니 남편은 소파에 기대어 텔레비전을 보고 있었다. 큰일이라도 날 줄 알았는데 아무 일 없이 대하는 남편의 반응을 보며 괜히 마음 졸인 것 같아 억울했다. 이럴 줄 알았더라면 더 놀다가 올 것을 하는 후회가 파도처럼 밀려왔다. 다음날 퇴근 시간이 훌쩍 지났는데 남편에게서 연락이 없었다. 걱정스러운 마음에 전화했더니 노래방이라 했다. 기다렸다는 듯이 내가 말했다. “ 뭐 노래방이라고요? 살짝 기분 나빠지려고 하니 10분 내로 집으로 오세요.” 남편의 멋쩍은 웃음소리가 내 귓전에서 울렸다. 30분 후 다시 남편에게 전화를 걸었더니 지금은 갈 수 없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나 역시 맘대로 하라는 말을 화답으로 남기고 전화를 끊었다. 예전에는 생각지도 못한 일이다. 중년이 되면 남성은 여성 호르몬이 증가하고 여성남성 호르몬이 증가한다더니 우리 부부가 좀 달라지긴 달라진 것 같다. 예전에는 시소 놀이를 하듯 한쪽이 올라가면 한쪽은 내리는 거로 균형을 맞추었지만 이제부터는 힘다리기로 균형을 맞추어도 좋을 것 같다. 가끔 슬쩍 끌려갔다가 다시 당기는 묘미도 있을 것이다.

초저녁 같은 중년은 다시 시작하기에는 모호한 시기지만 전환점으로 삼기에는 좋은 것 같다. 中年, 중간 나이로 뜻풀이를 하며 남편 나이에 내 나이를 더해서 2로 나누었다. 동갑처럼 토닥토닥 살 것을 생각하니 중년이 새롭게 보인다.

 

2016년 현대수필 겨울호, 2016년 대구의 수필

이미경 miz130@hanmail.net

대구 출생

영남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졸업

다문화가정방문 한국어 교사

월간 사진속여행 에디터

 2006년 계간 수필세계 신인상

제 1회 프런티어 문학상 수상

대구수필가협회 이사

수필세계 작가회 부회장

대구문인협회, 수필사랑 회원

2015년 대구문화재단 창작기금 수여 

2015년 수필집 「모자이크」 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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