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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의자 본문
나무의자/이미경
아픈 몸을 한 늙은 신을 보는 것 같아 애잔하다.
조상 대대로 살아온 평화로운 숲에서 고목이 될 줄 알았는데, 우리 집과 인연이 되어 이곳저곳을 떠돌다 떠나는걸 보니.
고대광실 대들보나 조용한 암자의 기둥이라도 되었으면 부초처럼 살진 않았을 텐데, 한평생 누군가의 엉덩이를 받쳐주다 쓸모없어지니 초라하지 그지없다. 이리저리 뜯겨 만신창이가 되어 다른 가구들 옆에 우두커니 주저앉아 있다. 너무 치쳐 버린 걸까. 한번 쯤 넋두리를 할만도 한데 딴청이다. 이제 아파트 폐기물수거장에 버려졌으니 따스한 햇볕과 맑은 바람에 풍장 될 일도 없을 듯하다.
인연이란 사람과 사람 사이에만 있는 게 아닌듯하다. 세상에 존재하는 생물과 무생물 사이에도 보이지 않는 신경망 같은 게 이어져있는 것 같다. 무관심하게 이어져 있는 신경망이 어느 날 우주의 온갖 기운이 쏠린 듯 한 끌림으로 내 안으로 들어온다면 바로 그것이 인연의 시작이 아닐까. 우습게도 그 끌림이라는 것은 아주 사소한 곳에서 시작된다. 그래서 인연의 씨앗 속에는 깊고도 길긴, 어떻게 증명해보일수 없는 무엇이 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인연을 신의 뜻이라든지, 운명이라는 말로 설명하곤 한다.
많은 책상들 중에 원목책상만을 고집하는 아이에게 가게주인은 원목의 튼튼함과 자연친화적인 면을 내세우면 탁월한 선택이라고 추켜세웠다. 하지만 진짜 이유는 책상에 딸린 의자 때문이었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의자 뒤에 붙은 도자기로 구운 나비 장식이 아이의 마음속으로 들어와 자리를 잡았다. 군살이 없는 나무 의자에 단정한 모습으로 날아오르는 나비에는 시골 마을에 핀 자연스런 꽃과 같은 부드러움이 있었다. 그 부드러움이 아이 마음속에 숲길 하나를 내며 맑게 펼쳐진 가을 하늘 같은 청명한 편안함을 주었으리라.
방안에 책상을 들여다 놓은 후 아이는 틈틈이 의자의 장식을 손으로 쓰다듬었다. 그럴 때마다 느껴지는 감촉이 매끈하면서도 감미롭다며 즐거워했다. 시절인연이라고 했던가. 의자는 아이 방에서 그리 오래 머물지 못했다. 아이는 중학교에 들어가면서 딱딱하고 불편하다는 푸념을 자주 늘어놓았다. 그래서 나무의자가 있던 자리는 인체공학적으로 허리를 보호해 준다는 푹신한 의자로 바뀌었다.
자신의 자리를 잃은 의자는 거실 한 모퉁이에 잊힌 듯 있었다. 높이 있는 물건을 꺼낼 때나, 천장의 전구를 달 때 외에는 쓰임이 별로 없었다. 아주 잠깐 식탁의자가 부서져 그 역할을 대신하기도 했고, 가끔 남편이 앉아 신문을 보거나 차를 마시기도 했지만 군더더기 같은 존재였다.
결국 의자는 베란다에 방치되어 몇 해를 보냈다. 그러는 사이 의자도 살아가는 법을 터득 했는지 희미하게 자기 자리를 만들어갔다. 추운 베란다에서 주위의 화초와 어울리며 풍경 속으로 스며들기 시작했다. 어느 날 그 풍경이 내 안으로 들어 왔다.
의자는 나의 특별한 장소가 되었다. 자세를 바로 잡아주는 나무의자가 더 없이 편안하고 좋았다. 의자 등에 나의 등을 쫙 펴고 개운한 느낌으로 차를 마시거나 눈을 감고 명상을 하기도 했다. 날 빛 좋은 날은 오가는 사람들을 바라보기도하고 의자에 앉아 자연이 주는 사계절 행위예술을 감상하기도 했다.
잔잔한 바람이 불 때면 의자에서는 나무향이 나는 듯 했다. 그럴 때면 의자의 단아한 나뭇결을 천천히 어루만지며 이상이 없는지도 살펴보았다.
내가 공부를 시작하면서 의자를 찾는 날이 줄어들었다. 의자는 오랜 세월 베란다의 구석진 곳으로 옮겨져 버려진 듯 있었다. 바람이 불 때면 나는 듯한 향기도 사라지고 뒤에 붙어있던 나비장식도 떨어졌다. 장식이 떨어져 나간 자리에 먼지들이 들어와 둥지를 틀더니 의자는 맥없이 삐걱거렸다.
아픈 몸을 한 늙은 신을 위로라도 하려는 듯 엷은 바람이 분다. 의자에 깃들었던 먼지들이 민들레 홀씨처럼 날아간다. 떠나든, 남겨지든 인연의 매듭에는 늘 상처가 남는다. 상처란 자신만이 극복 할수 있는 게 아니던가. 정물화처럼 있던 의자가 바람에 기대며 말하는 것 같다. 상처를 누구에게도 떠밀지 않고 오롯이 마주하다 보면 새살은 돋기 마련이라고, 설령 상처를 이기지 못하더라도, 그 상처를 마주해온 시간들은 거부 할수 없었던 소중한 삶이었다고, 그것 또한 인연이었으니 다독이며 살라고.
의자가 있었던 자리가 허전하다. 인연의 기억이 한 컷의 사진처럼 지나간다. 내가 숨 쉬고 움직이는 동안 내 삶의 엉덩이를 받쳐 준, 내가 기꺼이 의자가 되었던 인연들에게 가장 순수하고 밀도 있는 연민을 보낸다.
음악을 켠다. 하나의 선율이 사라지려다 다시 살아나고 살아나는 듯하다가 다시없어져 간다.
2011년 수필세계 겨울호
이미경- 호 松栽, 영남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졸업,
수필세계 신인상 수상
제1회 프런티어문학상 우수상
수필사랑 문학회 회원
수필세계 작가회 회원
대구문인협회 회원
대구수필가협회 편집간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