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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의 길목을 돌다 본문

소금인형 수필2

봄의 길목을 돌다

소금인형 2015. 3. 15. 07:53

봄의 길목을 돌다 / 이미경

 

참으로 오랜만에 봄을 앓는다. 온몸으로 퍼지는 한기를 느끼며 이불을 가슴까지 끌어 덮는다. 그러다 문득 교회가 그려진 그림에 눈길이 멈춘다. 가끔씩 시리도록 그리운 그곳이다. 창밖에는 봄눈이 온 도시를 덮었다. 그리고 찬바람이 며칠째 불고 있다. 문병 온 친구로부터 한옥교회라는 말을 듣는 순간, 기억 속 유년의 놀이터가 삐죽이 고개를 내밀었다. 생의 밝고 따뜻함으로 가득 찬 그곳이 흑백의 책갈피에서 동면하고 있다가 채색되어 나타나는 기분이었다. 기억 속 교회의 까만 기와지붕은 방부처리라도 된 듯 내 머릿속에서 선명하게 떠올랐다. 금박지로 만든 종(鍾)이 크리스마스트리 위에서 반짝이고, 친구들의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던 예쁜 삽화 같은 곳이었다.

어른이 된 후 어린 시절 놀던 교회 놀이터를 다시 찾았을 때는 빼곡히 들어선 아파트가 생뚱맞은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어디가 어딘 줄 알 수 없었던 나는 기억의 조각과 퍼즐 맞추기를 하다 어질 머리가 되어서 돌아와야만 했다. 그날 이후 그곳은 기억의 낡고 바랜 책갈피에 끼워져 시들어져 갔다. 그러다가도 세상살이가 신산할 때면 무채색으로 내 주위를 돌곤 했다. 한옥 교회라는 자천교회로 들어가는 길목은 돌과 황토로 만든 토담으로 이어졌다. 토담이 정겨워 손으로 담을 어루만지며 걸었다. 손끝으로 전해오는 흙의 부러움과 돌의 단단한 조화가 내 안으로 스며든다. 낮은 토담 너머로 수수하게 서 있는 교회가 보인다. 단아하게 담 위를 덮은 기와 위에서 담쟁이들이 낯선 방문객을 보고 수런거린다. 그 모습이 정겹다. 오래된 기억 하나가 과거로 내달리며 퍼즐처럼 흩어져있던 기억들을 모으기 시작한다. 대여섯 살 때쯤 까만 기와지붕의 교회가 있는 마을로 이사하던 날 대문 앞에서 나물을 다듬던 아줌마들의 표정이 꼭 담쟁이 같았다. 낯선 사람을 보며 두런대던 소박했던 동네 아줌마들의 모습이 흐릿하게 스친다. 기억들의 퍼즐들은 어느새 유년의 길 가운데 꼿꼿하게 허리를 세우며 서 있다. 집과 밭이 조각보처럼 펼쳐진 동네를 소녀 하나가 걸어가고 있다. 길 끝자락에 있는 당산목(堂山木)을 지나서 삐꺽거리는 철문을 밀고 들어간다. 한옥으로 지어진 예배당이다. 예배당 터는 당산보다 넓어 소녀의 친구인 은과 종지기 딸이었던 희의 집 외에도 몇 채의 집이 더 있었다. 나는 그녀들과 마당에 있는 그네와 시소를 타며 놀다가 예배당 종소리가 카랑하게 울려 퍼지면 우르르 예배당 안으로 몰려 들어갔다.

자천교회 내부는 작고 정갈했다. 작고 낮은 것에게는 상대방을 편안하게 하게 하는 힘이 있다. 서구양식의 교회에 비해 작고 낮은 한옥이 주는 느낌이 포근해 한동안 그곳에 앉아 있었다. 이곳은 특이하게 남녀가 따로 예배를 드릴 수 있는 구조로 되어있었다. 구한말의 상황에 맞게 설계된 까닭이다. 가운데 있는 네 개의 기둥에 칸막이하여 남녀를 서로 내외하게 하였다. 또한, 교회 출입문도 드나들 때 남녀가 마주치는 것을 피하기 위해서 좌우로 남녀의 문을 따로 만들어 놓았다. 이것이 자천교회가 108번째의 봄을 맞을 수 있게 한 힘인 것 같았다. 새로운 문물이 들어오면서 기존의 문화를 배척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조화를 이루며 상생하는 것도 어찌 보면 낮춤에서 시작된 것이다. 오래전 전통문화와 서양문물이 팽팽하게 맞섰더라면 자천교회는 유구한 비바람을 오래도록 견디기 어려웠을 것이다. 낮아지는 것은 부드러워지는 것이고 부드러운 것은 휘어질 수 있기에 더 오래갈 수 있다는 삶의 이치가 가볍게 이마를 두드린다. 가끔 고딕양식처럼 자신을 세우는 사람을 만나는 경우가 있다. 살아오면서 겪었던 경험과 다분히 주관적이 면을 진리로 착각한 듯 한치의 양보가 없다. 결국, 팽팽히 맞서다가 서로에게 생채기만 남긴다. 나 또한 살아오면서 느낀 주관적인 면이 나도 모르는 사이에 개입된다. 그래서 그런지 나이를 먹으면서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본다는 게 점점 어려워지는 것 같다. 대상이 사람일 때는 더욱 그러하다. 이곳에서 유일하게 높고 뾰족한 것은 나무 종탑뿐이다. 시계가 보급되지 않았던 시절 예배시간을 멀리까지 알리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을 것이다. 지금은 하늘을 나르지 못하는 종소리가 마을 아래로 은은하게 내리는 모습을 상상하니 풀어져 있던 마음이 숙연해진다. 한 세기도 더 지난 어떤 기운이 내 몸으로 들어와 피돌기를 하는 것 같다.

봄은 낮은 곳에서 시작된다. 얼음장 밑에서 물이 졸졸거리고 아지랑이 피는 들판이 푸른 싹을 부르는 것처럼 내 안의 성찰도 몸과 마음이 가장 낮게 엎드려 있을 때 들불처럼 타올랐다. 다시 생각하니 삶이 팍팍할 때마다 따듯했던 유년의 놀이터가 떠오른 이유가 아무런 근심 걱정 없던 시절이 그리워서만은 아닌 것 같다. 우리 몸에 영양분이 필요하면 그 음식이 먹고 싶어지듯 위로만 보고자 하는 마음이 가득할 때 유년의 그 놀이터가 떠올랐다. 봄여름 가을 겨울이 순환하며 세상이 진보하듯 내 삶도 가끔은 옛날을 비추며 내 삶을 기름지게 하나보다. 아장아장 걸어오던 봄을 시샘하던 동장군이 움찔 뒷걸음친다. 때를 감지한 나무는 잠든 뿌리 깨우며 본능적으로 봄을 태질하고 있다. 한 그루의 나무처럼 더디게 오는 봄을 기다린다. 유난히 추웠던 만큼 따스함에 대한 갈망이 더욱 커진다. 따뜻한 풍경, 따뜻한 무엇이 그립다. 눈을 감는다. 애벌레처럼 웅크린 내 귓전에 까만 기와지붕의 맑은 예배당 종소리가 울린다. 내 마음이 깃털처럼 가벼워진다. 봄의_길목을_돌다.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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