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꼰대 본문
꼰대/ 이미경
팔도의 개성 있는 이장들이 한자리에 모여 여러 주제로 입담을 펼치는 프로그램에서다. MC가 패널에게 질문을 한다.
‘당신은 어른입니까? 꼰대입니까?’
아홉 사람 중 세 사람만이 꼰대라 답을 한다.
꼰대는 기성세대, 늙은이를 가리키는 은어다. 꼰대는 시대변화에 빠르게 적응하지 못하고 늘 해오던 방식을 고수한다. 자신의 가치관이나 삶의 방식으로 어린 사람을 훈계하며 강요하려 한다. 이렇게 부정적인 말이다 보니 스스로 선뜻 그렇다고 응하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올 설에는 제주 시가에 가지 않았다. 부모님이 돌아가시자 갈 곳이 없어졌다. 물론 큰 형님 댁에 가도 되지만 부모님 집만큼 편하지가 않았다. 질부와 조카사위, 손주들이 와서 북적대니 우리가 군식구처럼 느껴진다. 남편도 나와 같은 생각이었는지 비행기 표 사는 것을 차일피일 미루었다.
설 전날 친정집으로 갔다. 몸이 불편한 어머니는 텔레비전을 보고 계셨고 결혼하지 않은 여동생 혼자서 차례 음식을 준비하고 있었다. 하나뿐인 올케가 좀 일찍 와서 거들었으면 좋겠지만 동생 부부는 늘 늦게야 온다. 서울에서 맞벌이하고 있고 명절 교통체증 또한 장난이 아닌 것을 알기에 그 누구도 늦게 오는 것에 대해 불평을 말한 적이 없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오 남매가 모여 제사 문제를 의논했을 때 대구에서 지내자고 한 사람이 여동생이었다. 어머니께서 몸이 성하다면 어머니가 계시니 그런 의논조차 하지 않았을 것이다. 동생 말대로 몸이 불편한 어머니를 모시고 서울 남동생 집까지 가는 일도 예삿일이 아니었다. 어머니가 계실 때까지 대구에서 지내고 그 후에 아들네로 옮기기로 했었다. 여동생도 직장 생활을 하고 있다. 단지 결혼을 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가까이 산다는 이유로 명절마다 가까운 본가로 와서 제사 준비를 하는 것이다.
“동생네는 올해도 늦게 오려나 보네. 연휴가 앞쪽으로 긴데 올해만이라도 좀 일찍 오지.”
내 말을 들은 동생이 전을 뒤집으며 올해는 처가에 먼저 다녀올 거라는 말을 했다. 세상이 바뀌어도 아들 하나 있는 집인데 여전히 늦게 온다는 사실에 기분이 언짢았다. 남동생이 형제 중에 막내라 지금까지 오냐오냐했었다. 하지만 마흔이 넘어서도 집안일을 보살피지 않는 것 같아 큰누나로서 심기가 불편했다.
모두 설을 쇠고 각자 제 삶의 터전으로 돌아갔지만, 여동생만 뒷정리 걱정에 돌아갈 생각을 하지 않았다. 보다 못한 내가 제사를 남동생에게 가져가라고 하는 게 어떻겠냐고 물었다. 동생은 어머니가 사시면 얼마나 사시겠냐며 그대로 하자고 했다.
집으로 온 나는 남동생에게 이제부터는 명절에 조금 더 일찍 왔으면 좋겠다는 문자를 넣었다. 올케도 며느리 자리를 차츰 맡아야 좋지 않겠느냐는 말도 덧붙였다. 차례 음식을 배달음식으로 하는 것이 모두를 위해 좋겠다는 동생의 답을 받고서야 생각이 나와 아주 다르다는 것을 알았다. 동생은 급변하는 시대에 차례에 초점을 두지 말고 서로 얼굴 보고 쉬며 에너지를 받는 날로 하자고 했다. 또한 요즘은 여성도 남성하고 똑같이 공부하고 돈을 벌며 아이들 키우고 집안일 하니까 며느리 역할 이야기는 하지 말라고 했다. 지금처럼 부모의 큰 도움 없이 잘 살 것이고 자식의 도리는 다하겠다고 했다. 대기업에서 살아남으려면 사투를 벌여야 하는데 집안 일로 에너지를 잃고 싶지 않다고 했다. 이것이 서울에 사는 자기 또래의 일반적인 사고라는 말도 덧붙였다. 생각지도 못한 동생의 답에 나는 머리를 망치를 맞은 듯 멍해졌다.
천안에 사는 여동생에게 전화를 했다. 뜻밖에도 동생 또한 남동생 말에 수긍하는 눈치였다. 서울이라는 곳이 여러 지역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곳이다 보니 모든 것이 빠르게 변하고 그 변화 또한 빠르게 받아들인다고 했다. 제사도 한날 모아서 지내거나 없애는 집이 많다는 것이다. 스멀스멀 화가 나기 시작했다. 이렇게 막가도 되는가 싶었다. 그런데 오늘 텔레비전을 보는 동안 꼰대라는 말이 나에게 탁 와 닿는 것이다.
내가 꼰대의 길 위에 서 있다고는 한 번도 생각한 적이 없었다. 나이도 그렇고 구태의연하지도 않았다. 다름을 인정하려고 노력했고 늘 듣는 자세로 살아왔다. 생각해 보니 띠동갑인 남동생은 개인적이고 독립적이며, 경제적 가치를 우선시했다. 검색도 포털보다는 동영상으로 주로하고 브랜드보다는 상품 가치를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나와는 다른 세대였다. 인정하고 싶진 않지만 나는 기성세대였다. 삶에서 얻은 경험과 안목의 자로 변해 가는 시대를 재면서 살고 있었다. 지금까지 내 속에서 일렁이고 있는 화는 변해가는 가치관을 인정하지 못한 내 고정관념 때문이었다. 내가 가지고 있던 삶의 방식을 동생이 받아 주지 않은 것에 대한 분노였다.
다시 생각하니 동생의 말이 아주 틀린 것도 아니다. 하지만 쿨하게 동생의 말에 전적으로 동의하지는 못하겠다. 다만 그것이 시대의 큰 물결이라면 그 물결을 유유히 타는 것도 한 방법이라며 나를 다독인다.
2019 수필세계 여름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