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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른 사용 설명서 본문
어른 사용 설명서 /이미경
세상에는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사용 설명서가 있다. 약 사용 설명서부터 자동차 사용 설명서까지 그 종류도 다양하다. 그런데 어른 사용 설명서는 없다. 모든 사용 설명서의 주체가 사람이기 때문일 것이다. 사람이 사람을 사용하는 설명서라 생소하겠지만 나이게 맞게 행동하지 못하는 사람을 볼 때면 이런 설명서도 필요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한다. 내가 이런 생각을 한 이유는 어른답지 못한 사람으로부터 어이없는 일을 겪었기 때문이다.
오랜만에 고모 집에 놀러온 조카는 신이 났다. 그동안 배운 태권도 품새를 보여준다며 넘어지기도 하고 고양이를 따라 다니며 신나게 뛰기도 했다. 그때 관리실에서 연락이 왔다. 아래층으로부터 시끄럽다는 민원이 들어 왔다했다. 오랜만에 어린 조카가 고모 집에 와서 그런 거라며 미안하다고 했다.
눈치 빠른 조카가 하던 행동을 멈추고 책을 가지고 왔다. 제 집에서도 그런 일이 있었던 모양이다. 그림책을 만지작거리던 조카가 갑자기 망고떡을 꺼내달라고 했다. 아랫집에 가서 사과를 하고 싶다는 것이다. 망고떡은 동생네가 가져온 떡이다. 조카가 정말 맛있다며 고모만 먹으라며 가져온 것이었다. 그런 것을 아랫집에 줄만큼 조카는 미안한 것일까? 마음껏 뛰며 놀아야 할 나이임에도 그렇게 하지 못하고 자라는 조카가 짠하면서도 대견했다.
떡을 가지고 간 조카가 사색이 되어 돌아 온 것은 몇 분 후였다. 한 층만 내려간다는 것이 잘못해서 두 층을 내려가서 떡을 준 것이다. 울상이 된 조카를 보며 우리는 배꼽이 빠지게 웃었다. 제 아빠인 남동생이 다시 가서 잘못 전달되었다고 말하고 찾아오면 된다고 하자 조카는 멋쩍게 웃으며 다시 내려갔다.
“호호 그렇지 않아도 잘못 전달 된 것 같아서 기다리고 있었다.” 아주머니는 흔쾌히 떡을 돌려주었다. 여기 사는 어른들은 참 친절한 것 같다며 조카는 신이 나서 다시 아랫집으로 내려갔다. 그런데 조카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제 아빠가 빛의 속도로 뛰어가서 현관문을 열었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조카의 울음소리가 절규에 가까웠다. 하도 울어서 꺽꺽 소리까지 났다. 눈물이 쏟아지는 작은 얼굴에는 처음으로 겪은 두려움과 당혹감이 엿보였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평소 엘리베이터에서 본 아랫집 사람은 예쁘게 생긴 젊은 여자였다. 쑥스러움이 많은지 어쩌다 마주쳐도 먼저 인사하는 것을 못 봤다. 내가 먼저 인사를 건네면 그때서야 답을 했다. 마흔 쯤 되어 보이는 어른이 일곱 살 먹은 아이를 도대체 어떻게 했기에 이런단 말인가. 조카는 그 아줌마 도깨비보다 더 무섭다며 울음 묻은 목소리로 사연을 이야기 했다.
조카가 사과의 말과 함께 망고떡을 내밀자 아랫집 여자는 조카의 이마를 검지로 쳤다.
“오~ 네가 쿵쾅거린 아이구나. 넌 아파트에서는 조용히 다녀야 하는 것도 모르니? 그딴거 필요 없다, 너만 쿵쾅거리지 않으면 된다.”
처음 겪는 무안함과 두려움 앞에서 얼음이 되어 서 있다가 문 닫는 소리를 듣고 울기 시작했을 일곱 살, 그 나이에 할 수 있는 것은 큰 소리로 우는 것뿐이었으리라. 울음 섞인 조카의 말을 듣고 있는데 가슴 밑바닥에서 뜨거운 것이 올라왔다. 뜨거운 불길이 되어 솟구쳤다.
어느새 내 마음은 한 쪽 슬리퍼를 신은 채 아래층으로 달렸다.
‘딩동’
여자가 문을 열고 도도하게 고개를 내미는 순간 내 검지가 여자의 이마를 민다.
‘오~네가 일곱 살을 울린 마흔이구나, 나이 먹었다고 다 어른인줄 아니? 어른이면 사리분별 할 줄 알아야지. 아이의 행동이 거슬리더라도 미숙함을 포용하며 기다릴 줄 알아야지“
여자가 벌레 씹은 얼굴을 하며 굳어진다. 하지만 그것은 마음 속 상상일 뿐 현실은 제자리에 앉아 울화통만 쳤다.
조카의 울음소리는 잦아들었으나 여전히 분한 듯 씩씩거리고 있다. 그 아줌마는 ‘도깨비 대마왕’이라는 아이다운 욕으로 분풀이를 했다. 앞으로 살아가면서 수많은 일들로 상처 입을 조카를 바라보는데 그 옆에 아무렇게나 던져진 망고떡이 보였다. 슬쩍 하나를 꺼내 반으로 잘라서 나누어 먹었다. 세상에서 이렇게 맛있는 떡은 처음 먹어본다는 과장된 내 목소리에 조카가 미소를 지었다.
어른이라는 말에는 기대와 책임이 담겨있다. 어른이란 인격이 충분히 성숙되어 있는 사람, 모나지 않고 둥글고 원만한 사람이다. 모든 것이 빠르게 흘러가는 시대에 어쩌다 어른이 된 탓인지 어른다운 어른을 찾기가 어려운 세상이다. 물론 완벽한 어른, 정답인 어른의 상은 없다. 하지만 아랫사람에게 좋은 영향력을 주며 나이에 맞는 역할을 열심히 하는 것이 어른사용법의 기본 항목이라 생각한다.
예전에는 사리분별 확실하고 기다려 줄 줄 아는 어른다운 어른이 많았다. 빨리빨리 돌아가는 세상이라 그런지 덜 성숙된 어른이 예전 보다는 많은 건 확실하다. 닮고 싶은 사람, 나이에 맞게 행동을 하는, 사람 사용설명서의 본보기가 되는 사람이 그리운 날이다.
2019년 오늘의 수필 4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