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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의 상자 본문

푸른 노트

아버지의 상자

소금인형 2009. 6. 3. 08:58

아버지의 상자


며칠 동안 우리 집에서 가장 오래된 물건에 대해 골똘히 생각해 봤다. 하지만 딱히 떠오르는 게 없었다. 나에게는 기껏 해야 10년이 다되어가는 세탁기와 냉장고가 가장 오래된 물건이었다. 그래서 나는 친정에서 찾아보기로 했다. 어쩌면 결혼하기 전에 내가 쓰던 물건 중에 반짝이는 그 어떤 것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서였다.

지금껏 몰랐었는데 내가 결혼 하고 두 번 이사를 한 친정집에는 내가 서운할 만큼 내 흔적들이 다 지워져 있었다. 초등학교 때부터 모은 우표집도, 중학교 때 장난으로 한 설문지 공책도 흔적 없이 사라져 있었다. 결혼하면서 내 물건 잘 챙겨오지 못한 내 잘못이니 누구를 원망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허탈해하며 이방 저 방을 다니다 작은 상자 하나를 발견했다. 뚜껑을 여는 순간 내 눈은 반가움으로 반짝였다. 하지만 이건 내 물건이 아닌 아버지의 물건이었다.

상자에는 무엇이 들어 있을까?

내 아버지의 성함은 이자 근자이시고 올해 76세이시다. 어머니의 말씀을 빌리자면 남 밑에 진득이 있지 못하는 성격으로 아주 다양한 직업을 가지셨단다. 그 덕으로 어머니는 꽤 많은 고생을 했다고 요즘 들어 가끔 말총을 쏘아대곤 한다. 난사된 총알이 퍽퍽 소파에 박히고 안 방문을 관통하고, 내 앞에도 유탄이 날아온다. 그래도 어머니의 말총에 응사가 없는 걸로 봐서 아버지는 잔소리에 대한 내공이 꽤 깊은 것 같으시다. 내공이라는 것이 하루아침에 생기는 것이 아닌 줄 알기에 일단 어머니의 손을 들어 주기로 한다.

친정집에는 책이 참 많다. 이사를 갈 때마다 세간보다 책이 더 많은 것에 은근히 부아가 치민 어머니는 가재 눈으로 아버지를 쳐다보곤 했던 기억이 난다. 지금 생각해보니 책이 성가셨던 게 아니라 변변치 않는 경제사정에도 불구하고 책만 샀다는 불만의 표현 이었다. 지금도 친정집 양쪽 베란다 창고에는 책들로 가득 찼다.

책을 좋아하셔서 인지 아버지는 참 낭만적인 분이셨다. 우리 오남매의 자장가는 어머니의 노래 소리가 아니라 아버지 읊어 주시는 산유화였다. 오래된 기억이지만 여름날 평상에 누워 별을 보며 듣던 산유화는 늘 현재형으로 내 가슴에서 쉼 쉬고 있다.



낭만주의자이셨던 아버지는 술도 참 좋아하셨다. 건하게 취해서 오신 날은 잠든 우리를 깨워 일렬로 세워 놓고 아주 엄숙한 의식을 치르듯 용돈도 넉넉히 주셨다. 그래서 우리들은 늘 잔소리만 하시는 어머니보다 아버지를 더 좋아 했다. 어느 날, 기분 좋게 취해서 들어오신 아버지는 우리를 깨워 앉히시고는 공기놀이를 시작하셨다. 어디서 구해 오셨는지 까맣고 동그란 돌로 공기를 하시다가 그걸 입에 쏙 넣으시더니 푹 쓰러지셨다. 꾸벅꾸벅 졸던 우리의 잠은 찬물을 뒤집어 쓴 것처럼 놀라 달아났다. 아버지를 부르며 달려드는 우리를 향해 한쪽 눈을 뜨시더니 그 공기 돌을 소리 내어 씹으셨다. 알고 보니 그것은 과자였다. 아버지는 가끔 이렇게 동네 구멍가게에서는 볼 수 없는 과자를 사 오셔서 우리를 놀라게 하거나 즐겁게 하셨다.

이렇게 상상력이 풍부하고 책읽기를 좋아 하셨던 아버지이시니 그 많았던 직업 중 당연히 작가라는 타이틀이 붙은 적도 있었다.

그 시절의 이야기를 꺼내면 어머니는 눈시울부터 적신다. 그러니까 내가 태어나던 그해 아버지는 신춘문예로 희곡이 당선되었다. 그 때부터 아버지는 잘 다니시던 직장을 그만두고 라디오 드라마 작가 생활을 하셨다.

아버지가 매일 원고지와 씨름을 하던 그 시절, 어머니는 나를 업고 하루 종일 동네를 돌아 다니셔야만 했었다. 단칸방이었기에 내가 울기라도 하면 아버지께서 글쓰기에 몰입할 수 없다며 짜증을 내셨기 때문이었다. 딱히 갈 곳도 없었고, 수줍음이 많았던 어머니는 정말 고통스러웠다고 털어놓으셨다.

요즘은 방송극본을 잘 쓰면 돈과 명예를 얻을 수 있지만 그 시절은 그렇지 못했었다. 아버지가 방에 앉아 글을 쓰신 글은 라디오 연속극이 되어 전파를 탔지만 생활은 그리 넉넉하지 못했노라고 어머니는 말씀하셨다.

나는 점점 자라고 동생이 생기자 어머니는 먹고는 살아야겠기에 궁여지책으로 구멍가게를 하셨다. 부잣집 막내딸로 태어나서 처음으로 해 보는 장사였다. 처음에는 부끄러워서 물건을 제대로 팔지도 못했다는 게 어머니의 말씀이다.

결국 아버지는 드라마 쓰는 일을 그만두셨다.

작은 방에서 밥상하나 달랑 펴 놓고 창작활동을 하시던 아버지와, 생활을 위해 글쓰기를 접어며 고뇌하던 아버지의 모습이 드라마의 모자이크 장면처럼 겹친다.


분홍색의 작은 상자. 겉보기에 깨끗한 그 상자에는 아버지의 남루했던 삶이 고스란히 들어 있었다. 스무 개쯤 되는 수첩에는 아버지의 삶이, 우리가족 역사가 고스란히 담겨있었다. 삶의 얼룩이 빼곡히 들어있는 작은 노트는 아버지의 꿈들이 꿈틀거렸다.

아버지는 평생 쓰는 일을 게을리 하지 않으셨다. 시를 쓰고, 편지를 쓰고, 일기를 쓰고, 틈틈이 붓글씨도 쓰셨다. 이쯤 되면 쓰는 것에 몰두하는 아버지의 열정에 경의를 표해야 할 것 같다.

아버지는 3년 전 뇌졸중을 앓은 후 글과 말을 잃어 버리셨다. 아버지의 상자에는 더 이상 아버지의 꿈이, 아픔이 자라지 않는다. 쓰러지기 전까지 꼼꼼하게 쓰인 아버지의 노트를 보니 눈물이 핑 돈다. 식구들을 위해 접어야만 했던 꿈을 아버지는 이렇게 혼자서 키우고 계셨다.

상자에 들어 있는 한 장의 사진은 1963년 방송국 신춘드라마 공모에서 입선되시고 상을 받는 사진이었다. 젊다 못해 앳되어 보이는 사진이다. 그리고 아주 오래도록 내 눈을 잡아 둔 것은 세월의 흔적이 고스란히 느껴지는 누런 책들이었다. 그것은 아버지가 쓰신 방송극본들이었다. 내 나이만큼의 세월을 지낸 종이는 누렇게 변해 만지니 바스러졌다.

아버지의 성함 ‘이근 작’이란 글씨가 또렷하다.

사십년하고도 육년이란 세월을 가지고 있는 아버지의 드라마 방송극본이 아마도 우리 집에서 가장 오래된 물건일 듯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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