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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 이미경
2월은 다른 달에 비해 짧아서 쏜살같은 달이다. 그럴 뿐만 아니라 참 애매한 계절이다. 입춘이 지났지만 봄의 흔적을 찾을 수도 없고 바람 끝이 칼이다. 그 칼바람이 얼음을 얼게 하는 것도 아니니 겨울이라 부르기도 부족하다. 이도 저도 아닌 계절, 삶에도 제 색깔을 내지 못하는 계절을 만날 때가 있다.
수업을 마치고 나오니 낯선 고양이 한 마리가 내 차 옆에 앉아 있었다. 버림받은 고양인지 잘못하다 집을 나온 고양인지는 몰라도 날렵하고 윤기 나는 하얀 몸, 라임 색 눈동자가 눈에 띄게 예뻤다. 그곳을 몇 달간 오갔지만, 고양이를 한 번도 본 적이 없던 터라 반가운 마음에 아무 생각 없이 냥이야 하고 불렀다. 녀석은 마치 제 이름인 양 나를 반겼다. 그리고는 기다렸다는 듯이 내 주위를 돌며 애처롭게 눈을 맞추며 울었다. 저를 데려가 달라는 것 같았다. 흰털의 얼룩이나 코 주변이 지저분한 거로 봐서 거리를 떠돈 지 얼마 되지 않은 고양이 같았다. 예쁘고 가엾지만 이미 우리 집에는 이미 두 마리의 고양이가 있어서 데려갈 엄두가 나지 않았다. 사실 두 마리를 관리하는 것도 내게는 버거웠다. 하지만 눈을 맞추며 애처롭게 울어대는 냥이를 보며 신장이 망가지지 않게는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길고양이 대부분은 뚱뚱하다. 사람들은 잘 먹어서 그렇다고 비웃기도 하지만 신장이 망가져서 그런 경우가 대부분이다. 길고양이가 먹는 음식쓰레기들은 사람들이 먹었던 음식으로 짜고 맵다. 살찐 것이 아니라 부은 것이다. 냥이 곁으로 다가가서 쓰다듬으며 내일 다시 오라고 타일렀다. 냥이는 자꾸 눈을 맞추며 야옹거렸다. 백미러를 보니 냥이가 안타까운 눈빛으로 내 차가 사라지는 것을 끝까지 보고 있었다. 그 모습이 내내 머릿속을 맴돌았다.
다음날 세워둔 차 맡에 고양이 사료와 물을 준비해놓고서 냥이를 불렀지만, 녀석은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수업을 마치고 돌아와 보니 사료 그릇이 말끔히 비어 있었다. 삼 일째 되던 날 냥이는 사료를 먹은 후 얌전히 앉아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영리한 동물이 그 짧은 시간에 체념이란 걸 배웠는지 서로 반가워하며 잠시 놀뿐 데려가 달라고 보채지 않았다. 다행스럽다 생각하면서도 냥이가 문득문득 짠했다.
챙겨주는 사료 그릇과 물그릇이 가끔 엎어져 있는 날이 있었다. 냥이가 실수로 그랬거니 했다. 이상하게도 그릇이 엎어진 날은 냥이가 많이 지쳐 보였지만 길고양이 생활이 지속하다 보니 그러려니 생각했다. 그때는 그저 가엽고 귀여워서 밥 먹여보겠다고 시작한 사소한 일이 서로에게 상처가 되어 남을 수도 있다는 것을 몰랐다.
사료 그릇과 물그릇이 엎어져 있는 날이 잦아지면서 까닭 모를 불길함이 엄습했다. 어느 날 수업을 마치고 돌아오니 냥이 대신 어떤 아주머니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짜증 섞인 말로 고양이에게 사료를 주지 말라 했다. 가끔 동물을 싫어하는 사람도 있기에 아주머니에게는 알겠다고 했다. 대신 먹이를 준 후 뒤처리를 더 야무지게 했다. 사료를 계속 준다는 것을 눈치 챈 아주머니는 노발대발이었다. 고양이에게 사료를 주니까 길고양이들이 꾀이면서 가끔 다툼이 일어난다고 했다. 그때야 알았다. 사료 그릇과 물그릇이 엎어진 날은 냥이가 밥그릇을 지키기 위한 치열한 싸움을 했었다는 것을, 그래서 냥이가 많이 지쳐 있었다는 것을.
아주머니께는 미안한 일이지만 산목숨인 냥이를 굶길 수가 없었다. 다른 고양이가 냥이와 밥그릇 싸움을 하지 않기 바라는 마음으로 사료 그릇 두 개를 더 준비해서 길 건너편에도 놓아두었다. 이를 안 아주머니는 시뻘게진 얼굴로 급기야 나를 캣맘이라 불렀다. 그러고는 사료 그릇과 물그릇을 내 차 보닛 위로 내동댕이쳤다. 순간 멍해졌다. ‘캣맘’이라는 단어만 귓가를 울렸다. 나는 그저 앞뒤 재지 않고 살아 있는 생명에게 밥을 먹이려는 지극히 단순한 사람일 뿐 고양이를 위해 투쟁하는 캣맘이 아니었다.
호불호가 갈리는 캣맘, 나는 캣맘을 우러러본다. 그들은 세상에서 가장 낮고 어두운 곳으로 숨어든 길 위의 생명의 처지를 헤아릴 줄 안다. 고단했던 하루를 마무리할 시간에 밀려오는 피로를 털어내며 하루하루 생사의 갈림길에서 힘들게 삶을 이어갔을 생명에게 한 끼를 내어주는 따뜻함도 가졌다. 그런데도 고양이를 싫어하는 사람들에게 공격과 혐오를 받기도 한다. 신념 없이는 결코 할 수 없는 일이다. 가당치 않게 캣맘이라 부르는 것에 항변하고 싶었지만 그러지도 못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고양이도 살아 있는 생명이니 불쌍히 여겨 달라 부탁할 뿐이었다. 그리고 뒤로 돌아서 인간의 이기심에 분노했다. 결국, 아주머니와의 마찰에 지칠 대로 지친 나는 방학을 핑계로 그 일을 그만두었다.
삶은 누구에게나 소중한 것이다. 사람이 행복을 원하고 고통을 두려워하며 죽음이 아닌 생명을 원하듯 동물 역시 그러하다. 고양이를 키우면서 깨달은 것이다. 하지만 냥이에게 사람과 동물의 공존을 위한 뚜렷한 신념으로 먹이를 준 것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나만 좋으면 무슨 상관이야 할 만큼 미련하거나 어리석지도 않았다. 관심과 무관심 아이러니한 그 중간 어디쯤에서 타인에게 캣맘으로 보였던 2월이 불쑥불쑥 떠오른다. 그 이유가 끝까지 책임지지 못한 냥이에 대한 미안함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오늘의 수필3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