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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의창 본문
겨울의 창/이미경
간간히 내리는 눈을 맞으며 두레박을 올리는 어머니의 귓불이 빨갛다. 언 손에 입김을 불어가며 배추를 씻던 어머니의 손길은 빨라진다. 배추가 산 모양으로 쌓이고 샘 주위에 살얼음 얇게 비치면 샘물로 말개진 배추는 처마 안쪽 부엌에서 물기를 걷고 있다. 심심해진 다섯 살의 어린 나는 방문을 열고 내다보는 일도 지루해져 엎드린 채 고샅길로 난 흩어지는 눈을 바라보고 있다. 부엌에서 그릇 부딪치는 소리와 구수한 양념 냄새가 방안 가득 퍼질 때쯤 온돌의 따스한 열기에 나는 잠이 내미는 손을 뿌리칠 수 없다. 그 때 방문이 열리고 이불 속으로 들어오는 어머니의 찬 손 보다 먼저 들어온 싸늘한 공기에 화들짝 놀란 잠은 저 만치 달아난다.
찬바람이 불기 시작하면 마음 저 안에서 부터 일렁이는 물빛 같이 파문을 그리며 슬며시 다가오는 창. 나는 어른이 되었고 흰 눈 고스란히 맞던 샘터는 흔적도 찾을 수 없지만 다섯 살의 계집애는 여전히 거기 남아 김장 하던 날 아랫목에서 몸을 녹이며 동화책을 읽어주는 어머니의 낭랑한 목소리를 듣고 있다.
올해는 일찌감치 김장을 했다. 김치 냉장고가 있는 이유도 있지만 지인에게 김치 만드는 법을 특별 전수 받았기에 빨리 만들어 어머니께 드리고 싶어서이다. 햇 배추로 담은 김치는 깊은 맛이 적은 것 같아 단 맛든 가을배추로 항상 한 해 먹을 김치를 한꺼번에 담근다. 어머니 세대만큼의 많은 양은 아니지만 불혹을 지난 나이임에도 김장은 여전히 버거운 일 중의 하나다. 곰삭은 젓국에 단풍 빛 고추가루를 풀어 큰 원을 그리다 차츰 작은 원을 그리며 천천히 젓는다. 김치 소를 만들 때마다 어머니의 목소리가 따라다니는 듯하다. 결혼하기 한 해전 김장하시는 어머니 옆에서 양념 그릇을 젓고 있을 때 저으면 저을수록 반발하듯 밖으로 튀어 나오는 양념에 쩔쩔매는 나를 보고 한 말씀이셨다.
“사람 사는 게 그거와 비슷한 기라. 내 편하다고 두서없이 직선으로 젓거나 급하다고 뒤섞다보면 불협화음만 나제. 바깥에서부터 안으로 부드럽게 다독이며 곡선으로 저어봐라. 잘 어우러져서 맛깔스럽게 되지.”
어머니 생각에 손놀림이 둔해진 내 모습을 보던 아이는 엄마의 김치 담기가 힘들어 그런 줄 알았는지 동화책을 읽어주겠단다.
“수염이 텁수룩하게 난 도둑 두목이 커다란 바위 앞에서 큰 소리로 외쳤습니다. 열려라 참깨…….”
동화를 들으며 굵게 채 썬 무가 양념과 어울리지 못하고 삐죽이 나오는 것을 다독이던 나는 김치 속 하나를 뜯어 굴을 싸서 입에 넣어준다. 길들여진다는 것은 이런 것일까. 가족이란 이름으로 너무도 평범하게 서로가 익숙해져 있다. 빤작이는 기쁨을 준 아이를 바라본다. 훗날 이 아이의 겨울의 창은 어떤 모습으로 떠오를까. 살얼음 낀 샘과 부엌에 곡선을 그리며 집안일을 하시던 어머니만큼의 여유를 아직 배우지 못한 나는 동화를 읽어 주긴 커녕 아들이 읽어 주는 동화를 듣고 있다. 살을 에는 추위에 김장 하던 날, 책을 읽어주던 어머니의 모습은 메마르게 주름지던 삶에 생기를 더 해 주지 않았던가.
숨죽여 엎드려 있던 일상이, 잔잔한 물결 출렁이며 쓸쓸함으로 다가와 삶이 춥다 느낄 때 마음 한 구석, 동화를 일어주던 어머니의 모습을 들여다봄으로써 따뜻해 질 수 있었다. 그 따사로움은 마음의 뿌연 먼지를 쓸어내리고 동자승의 눈처럼 긍정적이고 맑게 세상을 바라보게 해 주었다.
“여보 이러게 많은 금돈이 어디서 났어요? 깜짝 놀란 알리바바의 아내는 눈이 휘둥그레지며 물었습니다.”
카랑한 목소리로 책을 읽는 아이의 뒤 창 너머로 모과나무가 보인다. 우듬지에 몇 남지 않은 잎들은 흔들림이 없다. 겨울을 재촉하는 비가 내린 후 하늘빛과 어울려진 낙엽이 한결 깊어 보인다. 머지않아 눈도 내릴 것이다.
아직 어우르지 못해 날것의 맛을 내는 김치에 세월이 내려앉아 기다림의 맛으로 읽을 동안 아이와 함께 따스한 추억을 만들어야겠다. 내 아이가 어른이 된 후에도 겨울은 올 것이고 그 시대에 맞는 겨울 준비를 할 것이다. 어느 해 겨울 마음의 창을 들여다보는 내 아이의 얼굴에 흐르는 산길 물길처럼 넉넉하고 여유 있는 미소가 햇살처럼 퍼지길 바라며.
수필사랑 5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