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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련위의집 본문

소금인형의 수필

목련위의집

소금인형 2006. 1. 17. 11:07
 

 

목련위의 집 /이미경


봄빛이 피어오르고 있다. 파스텔을 옅게 문질러 놓은 듯한 봄빛 아래서 잠시 그 집을 쳐다본다. 회색 콘크리트 숲에서 가장 먼저 봄이 오는 집이다. 주위의 나무들은 아직 겨울잠에 취해 생기가 없건만 그 집의 목련은 벌써 하얗게 꽃망울을 터뜨렸다. 목련의 우듬지가 이층 베란다 보다 조금 높다. 볕 좋은 날 이층 창문을 활짝 열어 놓으면 목련 정원이 거실로 들어올 것이다. 그 집에는 희고 긴 목선의 여자가 목련향기를 맡으며 닦아 놓았을 살림들이 쥐 눈처럼 반짝일 것 같다. 집안 곳곳에는 크고 작은 화분들이 나란나란 꽃을 피우고, 바지런히 움직여 빨갛게 상기된 얼굴의 그녀는 살찐 봄나물을 다듬고 있겠지. 화장끼 없는 얼굴로 찾아가서 봄나물을 함께 다듬고 싶다. 왈츠를 들으며 차 한 잔 마시고 싶다. 그렇게 그 집에 깃들고 싶다.

 길을 가다말고 무엇하느냐는 어머니의 목소리에 화들짝 정신이 들었다. 어머니의 표정이 어디 아프냐고 묻고 있다. 어머니와 나는 시장에 갔다 오는 길이었다. 손님을 초대해놓은 터라 두 사람 다 찬거리를 가득 사들고 오는 중이었다. 집이 가까워오자 연로하신 어머니가 힘들어 하셨다. 내가 먼저 짐을 갖다 놓고 오겠다며 뛰어가다 갑자기 그 집 앞에 서 있었으니 그럴 만도 하다. 겸연쩍어진 나는 목련위의 집을 쳐다보며 어머니에게 한번 들어가 보고 싶지 않으냐는 생뚱맞은 말을 했다. 아는 집이냐며 어머니는 대수롭지 않게 물으셨고 모르는 집이라는 내 말에 어머니는 “싱겁기는” 하시며 앞서 걸으셨다.

목련꽃만 보면 가슴 가득 기분 좋게 차오르는 셀렘이 있다. 봉오리만 여문 채 눈보라 속에서 겨울을 나는 고아함 때문인지 봄의 첫 자락에서 피워낸 화려함 때문인지는 나도 모르겠다. 나는 길을 가다가도 목련꽃과 마주칠 때면 어머니의 품속 같은 안온함으로 넋이 나간 사람이 된다. 

 어린 시절, 우리 집 마당에는 커다란 목련 한 그루가 있었다. 추위를 잘 탔던 나는 봄이 어서 오기를 기다리며 하루하루를 보내었다. 그러다 겨울이 등을 보이고 찬바람의 여운마저 사라지고 나면 시름시름 앓기 시작했다. 밤을 지새우며 간호해 주시던 어머니의 사랑으로 내 몸이 충만해지고, 기분 좋은 나른함으로 눈을 떠보면 신열을 앓은 며칠 뒤였다. 그때마다 어김없이 우리 집 작은 마당에는 하얀 목련이 봉우리를 피웠고 노란 봄 햇살아래 나무는 연둣빛으로 수줍게 돋아 있었다. 갓 피어난 꽃잎이 바람에 하늘거리던 풍경은 고운 수채화로 남아있다. 앓고 난 뒤 보이는 세상은 늘 신선했다.

한껏 더 착해진 마음으로 바라본 어머니의 얼굴은 목련꽃만큼 정겨웠으며 지금까지도 따뜻하고 행복했던 기억으로 남아있다.

그런데 어머니의 생각은 나와는 달랐다. 목련 나무가 그다지 크지도 않았으며 어머니의 삶에서 가장 힘든 시절이었다는 것이다. 직장생활을 그만두신 아버지께서 사업에 두 번이나 실패한 뒤 살았던 변두리의 작은 집이었단다. 먹는 게 시원찮은 탓에 내 얼굴은 목련꽃만큼이나 창백해 있었으며 병을 자주 앓았다 하셨다. 밤에는 목련꽃이 고봉밥으로 보였고 어디론가 가고 싶어도 그럴 수 없는 현실이 지는 꽃처럼 참혹했었노라 말씀하시는 것이었다. 떨어질 때의 목련꽃처럼 옹색하고 초라한 삶속에서도 그토록 무심하며 의연한 모습을 하고 계셨다니…….

 저녁이 되어 어머니를 배웅하러 밖으로 나왔다. 봄이라고 하지만 아직 바람이 차다. 나는 스웨터 앞자락을 여미며 목련위의 집을 바라보았다. 창문 틈에서 나오는 불빛을 받은 목련은 환하게 켜 놓은 등불 같다. 어둠에 둘러싸인 집은 하늘궁전처럼 평화롭다.

밤이란 것이 인적이 드물다는 것이 용기를 준 것일까. 나는 그 집 문 앞까지만 가보기로 했다. 목련등에 이끌린 듯 천천히 옆 통로로 향했다. 그 집에서 나는 투명한 웃음소리가 들릴까하여 귀를 기울여본다. 어딘선가 쿵하는 소리가 들린다. 무엇인가 던지는 소리 같기도 하고 부딪치는 소리 같기도 하다. 층계를 조금 올라가자 남자의 고함소리와 비명에 가까운 여자의 목소리가 들린다. 누가 싸우고 있나보다. 이층 복도에 올라선 나는 내 귀를 의심했다. 싸우는 소리는 분명 목련위의 집에서 나는 소리였다. 그때 문이 열리면서 중년의 여인이 뛰쳐나왔다. 순간 집안이 렌즈 속처럼 확대되어 들어왔고 나는 휘청거렸다. 여기저기 널브러져 뒹구는 가재도구들.

 목련위의 집은 목련꽃이 만들어낸 환상이었다. 내 무의식 속에 있던 유년기의 정서가 일으킨 혼란이었다. 나만의 환상 속에서 나만의 소중한 가치를 지키느라 큰 그림 뒤에 숨겨진 작은 그림들을 지나치며 살아온 것이다.

세상을 살아가면서 그동안 내가 알고 있는 것에는 얼마나 많은, 또 다른 것들이 포함되어 있는 것일까.

목련화를 지우고 그 집의 풍경을 떠올려본다. 내 눈에 비치는 집은 차가운 형광등 불빛만 반짝인다.


목련위의 집 8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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