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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주란 본문
문주란
눈이 내린다. 단아한 여인의 춤사위 같은 눈이 내린다. 첫눈 같은 셀레임 은 없지만 자꾸 시선이 창 밖 향한다. 휘돌다 감기듯 난무하는 흰 눈들이 한동안 잊고 있었던 하얀 꽃잎으로 피어난다.
모든 것이 낯설기만 하던 결혼 첫 해에 처음으로 시가에서 가져온 것이 문주란 씨앗이었다. 시댁의 앞마당에 참빗으로 곱게 빗어 넘긴 여인의 머릿결처럼 윤나던 동백 아래 당당하게 자리 잡고 있던 커다란 화초 가 있었는데 바로 문주란이었다.
언제부터 그 곳에 있었는지 원기둥 모양의 비늘줄기는 굵고 튼실했으며, 안정감 있게 넓게 펼쳐진 두꺼운 잎에서는 청정한 향기가 감돌았다.
싱싱한 바다 바람과 잘게 쪼개진 노란 햇살이 포물선을 그리며 비추는 마당 한쪽에서는 낯익은 곡식들과 처음 보는 열매가 몸을 말리고 있었다. 밤톨만한 크기의 예쁜 열매였다. 그 열매가 문주란 씨앗이란 걸 알았을 때는 해넘이가 시작될 무렵이었다. 씨앗의 크기가 주는 신비함과 푸른 잎이 주던 청아(淸雅)함. 마음에 안달이 일었다.
그땐 무엇이 그리 조심스럽고 어려웠던지, 그 흔한 씨앗조차 달라고 말하지 못한 숙맥 같은 나는 남편을 통해서야 어머니께 씨앗을 받았다.
시댁에서 돌아오자 곧바로 그 씨앗을 기다란 직사각형의 화분에 심어 싹을 틔웠다.
화초의 길이가 한 뼘 정도 자랐을 때 예쁜 화분 하나 사와 정성 들여 심어 놓고 나머지는 이웃에게 나누어주었다.
앙증맞은 연두 싹에 초록빛 물이 스미고도 얼마의 시간이 흐르는 사이 아이가 하나 둘 태어나고 나의 하루는 늘 종종걸음 치기에 바빴다. 초록 잎들이 얼마만큼 자랐는지 볼 여유도 없이 습관적으로 물주기를 몇 해. 베란다에서 키우기엔 부담을 느낄 만큼 자랐다.
지금 생각해보면 커서 부담을 느꼈다기보다는 별로 예쁘지도 않는 것이 자리를 많이 차지함에 대한 불만이 솔직한 표현인 것 같다. 그러면서도 탐내는 새 주인을 찾아주지 않은 것은 나의 결혼생활과 같이 시작했다는 인연 때문이었다.
아이들이 커감에 따라 우리는 좀 더 넓은 집으로 이사를 했고 문주란은 여전히 미운 오리새끼로 베란다의 한 구석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고운 빛깔의 꽃과 윤기 나는 화초들 사이에 있기엔 조금 남루한 모습으로.
더위에 지친 바람이 가끔 한숨을 쉬어주던 어느 해 늦여름, 짙은 것 같으면서도 은은한 향기가 바람에 실려 왔다. 산형 꽃차례로 무리 지어 핀 하얀 문주란 꽃의 향기였다.
꽃이 핀 첫해 문주란은 그 은은한 향기로 취하게 해서 화초에 무관심했던 남편과 아이들이 꽃에 관심을 가지게 하는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
짙은 그 향기만으로도 우리 가족들을 충분히 행복하게 해 주었던 문주란은 그 이후 두세 번 꽃을 피웠으나 어찌된 일인지 향기가 나지 않았다. 향기를 잃어버린 탓이었을까?
아이들의 물주기와 남편의 분갈이 정성에도 문주란은 더 이상 꽃을 피우지 않았다.
스산한 바람이 창문에 매달리는 날이거나 고운 햇살이 좋아 잡다한 여러 가지 일을 잠시 미루고 한 잔의 차와 마주하는 시간.
꽃이 하양(많이, 활짝)피면 향이 좋을 거라며 소녀 같은 눈빛으로 꽃씨를 곱게 싸서 주시던 시어머니와 귓불이 붉어지며 수줍게 받던 내 새 색시적 모습만 잠시 환영처럼 스쳐줄 뿐 문주란은 더 이상 꽃을 피우지 않았다.
난 꽃을 참 잘 기른다. 아니 꽃들이 우리 집에선 잘 자란다.
친구 이게 얻어온 작은 모종도 화분 가득 차고 넘치게 자라서 이웃이게 나누어주는 재미도 쏠쏠하다.
그런데 어느 해 봄 12년을 같이해온 문주란이 죽었다. 밑동이 문드러진 채…….
힘들게 보낸 겨울 탓이려니 하며 가슴에 묻었었는데, 내리는 눈이 하얀 꽃잎으로 보임은 왜인가. 문주란이 죽었던 그 해 겨울은 유독 추웠었다. 추위에 약한 화분들을 집안에 들여놓으면서 문주란에도 시선이 갔다. 생기 잃은 초록의 큰 덩치. 집안으로 들여놓기엔 화초의 크기가 조금 부담스러웠다. 풀 한 포기에게 뿐만 아니라 삶을 살아오는 동안 이 세상에 얼마나 많은 생채기를 보태며 살아온 걸까 ?
의도하지 않았던 그래서 사죄의 기회조차 없었던 잘못들에 대해서 용서를 빈다.
눈이 내린다. 내 기억의 편린인 흰 꽃잎이 눈꽃으로 피어난다.
(2003. 한국조폐공사. 문예큰잔치. 최우수상)